# 375화
대표가 주인의 집을 찾는 횟수가 줄어든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레드와 만난 후, 어떤 미래를 선택해야 하는지도 혼란스러웠고.
퀘스트 기간이 끝나가는데도 여전히 이 세계에 정을 붙이는 주인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혼자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해.’
신주인의 옆에 있으면 냉철하게 판단하지 못할 듯해서 잠시 거리를 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심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실제로 바쁘기도 했다.
아이리스의 정규 앨범 준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기획실]코드네임 미튜브 및 뷰이라이브 채널 가오픈 일정 공유]
대표는 기획실에서 올라온 업무 보고 메일을 확인했다.
뉴레인의 신인 그룹명은 ‘코드네임’으로 결정되었다.
모노크롬이 흑백, 아이리스가 무지개의 신이라는 기본 컨셉을 지녔듯이, 코드네임은 요원을 기본 이미지로 잡았다.
가요계에서 다양한 작전을 수행하여 성과를 올리겠다는 포부를 담은 그룹명과 컨셉이었다. 앨범이나 컨텐츠 등에도 이 컨셉을 다양하게 활용할 예정이었다.
데뷔에 앞서 준비할 것들이 많았고, 대표는 준비 상황을 꼼꼼하게 보고받았다.
얼마 전까지 아이리스에 집중하던 대표가 다시 관심을 신인에게로 돌린 이유는 바로 퀘스트 때문이었다.
‘어쩌면, 퀘스트를 바로 성공시킬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얼마 전까지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막막했으나, 신인 그룹의 데뷔가 가까워지자 새로운 변수가 생겨났다.
뉴레인과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함께했던 에이펙트 엔터테인먼트가 또다시 손을 내민 것이다.
에이펙트 엔터의 데뷔조는 마음을 빼앗는 괴도 컨셉으로 데뷔할 예정이었고, 마침 요원 컨셉인 코드네임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쫓고 쫓기는 구도로 컨텐츠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 있었고, 더 나아가서는 장기적인 콜라보를 원하는 눈치였다.
대표는 주인이 이전에 지나가듯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신인 애들은 예능 컨텐츠 쪽으로 살려보면 괜찮을 것 같아. 데뷔 서바이벌 때도 에이펙트 엔터는 노잼인데 뉴레인이 있어서 본다는 사람들이 있었거든.]
에이펙트 엔터는 대형 기획사에 속하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에이펙트 정도면 대박 신인을 내야지.’하는 기대를 보여서 부담감이 큰 듯했다.
이전에도 데뷔조를 꾸리기에 앞서 연습생들을 데리고 프로그램을 제작한 적이 있었는데 부진한 시청률로 마무리하게 되어 타격이 컸다나.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신인을 기획하던 뉴레인과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함께하게 되었고, 당시의 반응이 괜찮아서 이번에도 협업 제안을 했다고 한다.
대표는 바로 알았다. 이건 모노크롬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신주인의 영향이지.’
타 그룹과 경쟁하는 게 아니라 콜라보해서 시너지를 일으키자니.
모노크롬이라는 선례가 없었다면 에이펙트 엔터도 이런 제안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에이펙트 엔터도 완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콜라보를 제의한 것은 아니었다.
에이펙트 엔터는 아예 회사 간의 연결고리를 만들고 싶어 했다. 쉽게 말하자면 뉴레인이라는 회사 자체에 관심을 보였다.
이미 타 소형 기획사를 인수하여 레이블로 편입시킨 적 있는 대형 기획사이기 때문에 보일 수 있는 관심이었다.
‘이게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도 있어.’
투자나 인수를 통해 퀘스트 조건을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평범한 대표, 사장이었다면 정성 들여 키우고 더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회사를 다른 곳에 쉽게 넘기지 않겠지만, 대표는 달랐다.
대표는 퀘스트가 끝난 이후에도 엔터사 대표로 남을 생각이 없었으니까.
대표는 ‘[신주인]의 현실 복귀’라는 퀘스트 보상을 떠올렸다.
‘만일 신주인을 돌려보내고자 한다면…….’
기한은 신주인이 이 세계에 남아 있는 올해 말, 모노크롬의 퀘스트가 끝나기 전까지.
그때까지 퀘스트를 성공시키려면 바로 움직여야 했다.
***
“모노크롬의 탈뉴마 준비로 뭘 했냐고? 그건 왜?”
나는 대표의 질문을 듣고 바로 의심부터 했다.
대표는 이전에 아이리스를 뉴레인에서 내쫓으려 한 전적이 있지 않은가.
게다가 요새 갑자기 발길이 뜸해지는 등 이유를 알 수 없는 변덕을 부렸기에 더욱 수상했다.
‘그런데 멋대로 계약 파기를 시킬 거면 이런 질문은 안 했겠지……?’
저번처럼 덮어놓고 계약을 파기하려 한다면 알 필요가 없는 정보들이었다. 아무것도 내주지 않고 몸만 내쫓으면 끝이니까.
대표도 전과 같은 잔인한 방법을 취할 생각은 없는지 순순히 대답했다.
“내가 대표가 아니게 될 때 필요할 수도 있잖아.”
“퀘스트가 끝날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두려고?”
“응.”
대표는 계속 엔터사를 운영할 생각이 없었다.
만일 이 세계가 현실화된다면 대표가 아니라 일반인 신주인으로 돌아갈 테니, 그 전에 소속 아티스트를 위해 미리 준비해놓으려는 걸까.
그건 기특한 생각이었기에 나는 기억을 되짚으며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채널 소유권이나 곡 저작권 문제로 나중에 회사랑 분쟁 안 생기게 최대한 깔끔하게 정리해놓고……. 아! 그리고 그룹명 상표권도 넘기고. 어차피 그룹이 없으면 회사가 갖고 있을 필요 없으니까.”
상표권 문제는 이터널 때 확실히 체감했지.
내가 열심히 머리 굴려 만든 그룹명이 나와 상관없어진 회사에 남는다고 생각하면 매우 답답할 듯했다.
“말로 다 설명하기는 어렵고, 내일 출근하면 파일로 정리해서 보내줄게. 이런 걸 묻는 거 보니 퀘스트에 진전이 좀 있나 보네?”
“응……. 그런 것 같아.”
회사의 주축이던 아이리스가 안정되어서 그런 걸까.
예전에는 아이리스의 활동도 뜸하고 멤버들의 표정도 별로 좋지 않아서 팬들도 불안해하고 온갖 추측 기사들도 나돌았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앨범을 준비 중이라는 티도 내고 분위기가 괜찮았다. 좋은 일이지.
“너는 어떤데?”
대표도 많이 바뀌었구나 하면서 감회에 잠겨 있는데 대표가 내게 반대로 질문해왔다.
“나? 나는…….”
우리의 퀘스트는 어떻지? 진전이 있었다고 해야 하나.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나름대로 최선은 다하고 있어.”
“역시 불확실하구나.”
“‘역시’가 뭐야? 세상에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어.”
나는 대표가 ‘네가 그렇지.’라는 뉘앙스로 ‘역시’라고 말한 줄 알았는데, 대표는 뜻밖의 답을 했다.
“난 진전이 있다고 생각해.”
“……어느 면에서?”
심드렁하게 대꾸만 할 줄 아는 것 같더니, 갑자기 왜 이런 희망찬 소리를 꺼내는 거지.
내가 되묻자 대표는 영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네가 아이돌의 소원을 들어준다면, 신주인의 소원도 누가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대표는 뭔가 확신을 얻은 듯한 표정이었다.
***
누군가의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는 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 일이었다.
‘학생 때나 친구 집에 놀러 갔지,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남의 집에 찾아간 적 자체가 없었던 것 같은데.’
배명희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벌써 세 번째였다.
한 번은 임주미 PD에게 영문도 모르고 끌려갔고, 또 한 번은 그녀의 친한 후배인 예란과 함께 찾아갔었지.
그땐 내가 들이닥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방문보다는 습격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여유로운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배명희가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선에서 들고 갈 선물을 고민했다.
‘피아노 악보……는 내가 잘 모르니까.’
잘 아는 한이에게 물어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미 배명희가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결국 나는 가을꽃을 담은 꽃다발을 샀다.
배명희의 집에 도착한 후, 나는 꽃을 고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초대받은 것은 배명희의 집이 아니라 그녀의 작은 연주회였다. 관객은 나 한 명인.
“이렇게 좋은 공연을 저 혼자 감상해도 되는 건지……. 영광이면서도 송구스럽네요.”
단순한 취미 활동으로 날 부를 것 같지는 않아서 ‘혹시’ 하는 마음이 있긴 했는데.
나는 그녀의 피아노 라이브를 듣게 되었다. 피아노 연주 위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얹혔다.
내게 완곡을 들려준 배명희가 피아노 앞에서 일어나 내 맞은편에 앉았다.
“젊은 분들은 어떻게 들을지 궁금해서요.”
만일 딸이 있었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해 보고 싶어서 날 부른 걸까?
그러나 배명희는 이전처럼 과거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이사님은 제가 활동할 땐 아주 어리셨잖아요. 그렇죠? 그러니까 제 노래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을 것 같아서.”
고개를 저으며 ‘그렇지 않다, 찾아서 들어봤다’고 대답하려 했으나 배명희의 얼굴을 보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답이 있는 표정이었다.
“어땠어요? 제 노래.”
“정말 좋았는데요.”
“개인적인 친분이나 그런 건 싹 빼고, 가수 기획사 이사님으로서.”
엔터사의 이사로서……?
무슨 의도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서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배명희는 긴장된 표정이었다. 이건 마치 오랜만에 신보를 꺼내놓는 가수 같은…….
“떨리시는 거예요?”
“너무 오래 지나서 잊고 있었는데, 나는 옛날에도 그랬어요. 신곡 하나 나오면 ‘배명희 다 죽었다’ 소리 듣지는 않을지 전전긍긍했다니까.”
“올해에도 <송투유>에서 예란 씨랑 같이 노래 부르셨잖아요. 사람들 반응도 좋았는데.”
“거기서는 감정이 복받쳐서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도 못했어요. 예란이가 다 불렀다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거 아니야?”
철저히 가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에 나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당시 시청자는 그런 모습에 더욱 감명을 받았지만, 가수 배명희로서는 불만족스러운 무대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 듣기엔 어떤 것 같아요?”
대중 앞에 다시 가수 배명희를 꺼내놓아도 괜찮을지를 묻는 것이었다.
큰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지만,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제가 아이돌 기획사가 아니라 가수 기획사 임원이었으면 모셔가고 싶어서 안달 났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탐을 내던 라솔의 얼굴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오랜만에 노래를 불렀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에는 울림이 있었다.
이런 그녀가 가수가 아니라면 인류의 손해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배명희도 내 대답이 빈말이 아니라고 느꼈는지 얼굴에서 긴장이 사라졌다.
“후배들이나 방송 게스트들이랑 같이 대화하면서 계속 생각해 봤는데, 나 혼자 노래를 부르고 마는 건 그냥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지 가수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선생님은 가수가 되고 싶으셨던 거네요.”
“이걸 이제 깨달았으니 이제야 가수로 데뷔했다고 해야 하나?”
배명희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수의 모습, 가수 배명희의 이미지가 확실히 생겨난 듯했다.
“라솔 씨가 신인 가수는 오디션을 봐야 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그럼 이제부터 뼈 빠지게 연습해야겠네.”
내가 농담을 하자 배명희가 웃었다.
길고 긴 고민이 끝나서인지 후련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가수 배명희는 이런 얼굴로 노래를 해왔던 걸까.
그녀의 과거 활동기 모습이 궁금해졌고, 앞으로도 한 명의 청자로서 그녀의 활동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가면 라솔 씨한테 연락해봐야겠네요. 라솔 씨도 기대하는 표정이었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이사님.”
배명희는 내게 더 할 말이 있었는지 망설이지 않고 다음 화제를 꺼냈다.
“내가 가수로서 새로운 첫걸음을 내디디는 일이니까…… 괜찮다면 후배들하고 같이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