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3화
이 선택지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가 처음 퀘스트를 받았을 때 확인한 보상은 하나뿐이었다.
게임이 아니라 현실이 된 이 세계에서, 대표가 아닌 신주인이라는 온전한 인격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새해가 되자 ‘[신주인]의 현실 복귀’라는 보상이 새로 생겨났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생각이라곤 추호도 없었는데 웃긴 일이지.’
그러나 이런 선택지가 왜 생겨났는지 조금은 짐작이 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소원을 비는 새해.
대표는 소원을 빌지 않았지만…….
‘엄마…… 생각을 했던 것 같긴 해.’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것을 기념할 마음은 딱히 들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새해를 맞이할 엄마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새해 소원을 딱히 빌지 않았기에 그때 생각했던 것이 소원처럼 퀘스트에 적용된 게 아닐까.
신주인이 돌아가야 엄마가 슬퍼하지 않겠지. 그런 생각.
그러나 또 다른 신주인이 나타났다.
이렇게 되면 현실 복귀의 주체가 되는 신주인은 누구인지가 명확하지 않았으나, 대표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냥 말 그대로야.’
신대표의 껍데기를 쓰고 있는 신주인일 수도, 뉴마의 이사인 신주인일 수도 있었다.
이 세계가 현실이 되는 보상은 주체가 대표로 특정되었지만, 새로 생긴 보상의 신주인은 어느 신주인인지 특정되지 않았다.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이 보상을 받게 되는 ‘신주인’이 돌아가겠지.’
얼마 전, 주인은 대표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퀘스트의 보상은 퀘스트를 수행하는 동안 조금씩 이뤄가는 것 같다고.
[너도 이 세계에 정을 붙이면 퀘스트 성공에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어.]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보다 이 세상에 더 정을 붙인 신주인은 현실 복귀와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표 또한 원래 세계에서 도피하고 싶어서 이곳에 정착하려 했던 것뿐이지, 이 세계에서 안정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현실화라는 목표는 지금도 멀게만 느껴진다.
우리는 둘 다 퀘스트 실패를 향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대표는 주인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만일 내 퀘스트가 먼저 성공해서, 두 가지 보상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날이 온다면…….’
대표는 원래 있던 세상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많은 것을 외면해 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또 다른 신주인, 실패하지 않은 신주인이 돌아가는 것은 달랐다.
하지만 자신도, 아이리스도, 주인이 그리 아끼던 모노크롬도 게임으로 남은 세계는 어떨지.
레드를 만나고 온 지금은 상상하기가 두려워졌다.
***
나는 귀가하자마자 전등 스위치를 눌러 어두운 거실을 밝혔다.
여름이 지나니 해가 짧아져서, 퇴근 후 거실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도 점점 밤에 가까워졌다.
‘요즘은 대표가 먼저 불을 켜놓고 들어와 있다 보니까 어두워지는 걸 잘 못 느꼈는데.’
최근 대표의 방문이 뜸해졌다.
원래 매일 와 있지 않고 오다 말다 했지만 요즘은 확실히 찾아오는 횟수가 줄었다.
저번엔 날 흘끔흘끔 쳐다봐서 할 말이 있냐고 물어보니까 별일 없다며 잠깐 있다가 가 버렸고.
처음엔 들어와 있는 것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지만 그새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안 오는 것이 더 신경 쓰였다.
‘이상한 짓이라도 꾸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대표의 퀘스트 목표는 뉴레인의 등급을 올리거나 자산을 늘리는 것.
혹시 저번 계약 파기 위약금 계획처럼 이상한 방법을 떠올렸는데 나한테 들킬까 봐, 혹은 지레 찔려서 발길이 뜸한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대표가 아이리스를 생각하는 얼굴을 보면 아마도 그런 나쁜 방법은 아닐 테지만.
‘내가 아이리스를 볼 때 우형이가 날 왜 그렇게 쳐다봤는지 알 것 같았어.’
대표는 나보고 덕후 같다고 했지만, 대표도 별반 다를 것 없었다.
그러니까 아이리스한테 해가 갈 일은 하지 않겠지.
‘그런데…… 윤환이나 데뷔조 아이들은 대표가 정 붙일 새도 없었지 않나?’
역시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아서 나는 대표에게 어디서 뭘 하고 있냐고 연락했다.
그랬더니 [그냥 집에 있어. 뭔 상관이야?]라는 까칠한 대답이 돌아왔다.
바로 답장이 오는 것을 보니 여유롭게 스마트폰이나 보고 있던 건 확실한 듯했다.
그냥 귀찮아서 안 오는 걸까.
‘순 제멋대로야.’
어차피 이 집은 혼자 지내던 곳이니까 손님이 없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그러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더니, 이상하게 허전하기는 했다.
대표가 자주 찾아오니 음식도 혼자 있을 때보다 더 많이 챙겨놓았는데. 그러다 보니 지금 이 집은 신주인 1.5명이 사는 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대표가 얘기 나눌 사람을 찾아서 이곳에 왔던 것처럼 나도 은근히 사람이 있어서 좋았던 걸까.
‘그래서 모노크롬도 독립을 안 하나?’
아이돌들은 연차가 차면 슬슬 숙소를 정리하는 경우가 많던데, 모노크롬은 숙소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지.
그간 많이 불안했으니 옆에 누구라도 붙어있어야 안심이 되어서가 아닐까.
그러나 탈뉴마를 하면 지금 숙소는 정리해야 할 터였다.
모노크롬의 다음 숙소나 각자의 거주지가 어떻게 될지는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정이 든 공간을 떠나면 기분이 싱숭생숭하지 않으려나.’
나도 어느새 내 집이 된 공간을 잠깐 둘러보다가 태블릿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대표가 없으면 내가 할 일은 커뮤니티 정탐뿐이었다.
요즘 컬러즈는 최신 떡밥, 요리 컨텐츠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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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랑이 꽃게 무서워하는 거 너무 귀엽지 않냐ㅋㅋㅋㅋㅋㅋㅋ
못 만진다고 도리도리하는 해랑이를 볼 줄이야
└해랑이는 진짜 무서워하는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꽃게 ㅋㄱㄲㄱㄲ껔ㅋㅋ
└아 진짜 생각날 때마다 웃김ㅠ 지금까지 해랑이랑 꽃게가 만난 적이 없어서 아무도 몰랐다니
└작은 생명 앞에선 약한 남자.. 날 미치게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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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편집보다는 속도와 양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모노크롬 채널의 특징.
우리는 빨리빨리 정신으로 요리 강습 컨텐츠의 첫 편을 올렸고, 상상을 뛰어넘는 메뉴 선정 덕분인지 생각보다 반응이 더 좋았다.
‘그리고 해랑이가 웃수저 소리를 들을 줄이야.’
예능 레벨의 성장은 대단했다.
컬러즈는 해랑의 새로운 모습을 또 발견했다며 기뻐했다.
아군을 빠르게 버리는 배신자에 이어서, 후배에게 일을 미루는 의지 안 되는 선배의 모습.
이런 이미지만 늘어나는 게 괜찮나 싶기도 하지만.
‘멋있는 모습만 발굴됐으면 예능 레벨이 아니라 매력 레벨이 올랐겠지.’
그렇다고 해서 매력 레벨이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최근 들어 해랑의 인간적인 매력은 늘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꽃게 앞에서 약해진 해랑의 모습은 당연히 멤버들 귀에도 들어갔고, 얼마 전에 한이는 뷰이라이브에서 이런 말을 했다.
[해랑 형이랑 준해가 가져온 게장이요? 해랑 형이 너무 무서워해서 제가 다 처리해줬어요.]
맛있게 먹었다는 걸 이렇게 표현하다니.
그렇지 않아도 동영이 처음으로 같이 만든 요리의 감상을 알고 싶어 할 것 같아서 나도 멤버들에게 게장은 잘 먹었냐고 따로 물어봤다.
꽃게와 기 싸움을 벌이던 해랑과 준해가 과연 먹었을지 궁금했는데 다 같이 잘 먹었다나.
한이는 그날 뷰이라이브에서 이런 말도 했다.
[다음엔 누구누구 나오냐고요? 글쎄요. 무서운 식재료 있으면 해랑 형은 안 나오지 않을까?]
우형을 나르시시스트로 몰던 한이는 이제 해랑을 겁쟁이로 몰기 시작했다.
컬러즈는 [한이 10년 놀림감 생겼네ㅋㅋㅋㅋ] 하며 웃었다.
그리고 한이의 말대로 해랑은 다음 요리 강습 컨텐츠에 출연하지 않았다.
‘번갈아 가며 출연할 예정이라 해랑이는 원래 출연할 순서가 아니긴 했는데…….’
2회차 요리 강습의 메인 식재료는 마침 가을이 제철이라는 오징어였다.
다음 메뉴를 물어보고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사라진 해랑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는 갑각류뿐만 아니라 두족류에도 약한 듯했다.
그리고 찾아온 2회차 요리 강습일. 오늘의 수강생은 우형과 한이였다.
한이는 해랑을 그렇게 놀려놓고 설마 오징어를 못 만지지는 않겠지?
“넌 무서워하는 거 없어?”
귀신이나 좀비 앞에서도, 아니, 그것들을 연기하는 배우분들 앞에서도 멀쩡하던데.
한이가 뭔가를 무서워하는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한이도 내 질문을 듣고 딱히 생각나는 게 없는지 가볍게 턱을 짚었다.
“저요? 준해에게 묶인 150만 원……?”
준해 생일 때 받은 벌금 150만 원은 아직도 그대로냐고.
“정말 준해한테 150만 원짜리 선물 사주게?”
“애교라도 부리면 좀 깎아주지 않을까요?”
“준해가 좋아할까?”
“안 좋아하니까 더 효과적이죠.”
한마디로 깎아줄 때까지 괴롭히겠다는 소리잖아.
어쩐지 137만을 150만으로 반올림해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더라니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그거 말고 제가 무서워하는 거라면…… 세계의 종말?”
“떠오르는 게 없다는 건 알겠다.”
이런 낙천적인 성격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한이와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더클랜 멤버들도 도착했다.
“안녕하십니까, 두목님!”
“두목님……?”
이 호칭을 누군가에게서 들었다면 범인은 한 명뿐이었다.
내가 옆을 바라보자 제 발 저린 한이가 먼저 변명을 꺼냈다.
“저희, 그 프로듀싱 프로젝트를 먼저 기획한 건 저쪽 회사에 비밀이잖아요. 애들끼리 얘기할 때 뉴마 이사님이라고 하면 괜히 눈치 보인다고 그래서요.”
혹시라도 남이 들을까 봐, 회사나 숙소에서 멤버들끼리 대화할 땐 내가 ‘쉽게 이름을 말할 수 없는 그분’처럼 불렸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좋은 호칭이 있다고 알려줬어요.”
“두목님이 더 이상하지 않아?”
“조직이 세력을 확장한 것 같고 좋은데요.”
응. 그래서 이상하다고 한 건데…….
‘주인 님’ 호칭은 회사 안팎으로 여기저기 분포되어 있었는데 ‘두목님’이 세력을 확장한 건 처음이었다.
선배의 말만 듣고 따른 더클랜 멤버들은 내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고 눈치를 봤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는 원래 그렇게 불리시는 줄 알고.”
“아냐. 원래 사람마다 부르는 호칭이 달라서.”
“아, 도한이…….”
오늘 수강생으로 온 이담은 ‘주인님 이사님’이라는 해괴한 호칭을 쓰던 도한을 떠올렸는지 바로 이해했다는 표정을 했다.
더클랜이 회사와 갈등이 있는 상황에 다른 소속사 임원을 자꾸 언급하면 좋지 않다는 점에는 동의했다.
다른 소속사에도 날 별명으로 부르는 이들이 있는데 지금 호칭을 단속하는 것도 별 의미가 없겠지.
호칭은 알아서 편한 대로 고르라고 하고, 난 더 중요한 것을 물었다.
“우리가 곡 줄 의향이 있다는 거, 회사에 운은 띄워봤어? 뭐라고 하셔?”
비밀로 하던 프로듀싱 프로젝트도 슬슬 수면 위로 올려 진행해야 했다.
내가 묻자 리더 동영이 바로 대답했다.
“갑자기 곡을 왜 주냐고 하시더니, 프로듀싱 앨범이나 이터널 선배님들 신곡 얘기 들으시고는 좋은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걸 멤버들한테 설명을 들어서 안 거야?
같이 촬영하게 된 사람들에 관해서 기본적인 조사는 해 둬야 하는 거 아니냐고.
조금 황당하긴 했지만 거절하지 않는다면야 다행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고 싶은 컨셉 같은 건 생각해 봤어?”
“역시 밝은 컨셉이 좋지 않을까 했는데요…….”
이담은 <쉰셋돌> 때도 친근한 컨셉이 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래서 우리도 밝은 컨셉을 원하지 않을까 예상하던 차였다.
그러나 프로젝트 그룹이 아니라 더클랜이라면 상황이 다른 듯했다.
“저희 팬분들은 센 컨셉을 보고 저희를 좋아해 주셨는데, 갑자기 180도 달라지면 마음에 들어 하실지…….”
“으음. 그것도 고민되긴 하겠네.”
“네. 그래서 어느 정도는 기존 이미지를 유지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봤는데 어떠세요……?”
아마도 회사에서 당당하게 의견을 내본 경험이 없을 이담이 조심스레 내게 어떤지를 물었다.
더클랜은 다크한 퍼포먼스형 힙합 그룹이었다.
그 이미지를 고수하면서 어느 정도 변화도 주려면 상당히 어렵…….
‘……잠깐. 마침 다크, 퍼포먼스, 힙합에 특화된 사람이 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