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0화
“너도 참 오지랖이 심하네.”
대표가 모노크롬과 더클랜에 관한 이야기를 듣더니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본질을 꿰뚫는 말이었다.
나는 잔에 든 물을 원샷하고 테이블에 탁 내려놓았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긴 했어. 그래도 이걸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지금까지 우리가 쌓아온 게 의미 없게 느껴질 것 같았단 말야.”
“지금까지 쌓아온 게 뭔데?”
“그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해 보는 거? 그게 꼭 우리만을 위한 일은 아니더라도.”
아이리스는 알아도 모노크롬은 잘 모르기 때문인지 대표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모노크롬을 위한 일이 아니라면 음악대상은 어쩌고?”
“으음. 음악대상도 고려를 안 한 건 아닌데.”
모노크롬의 최종 목표는 돈을 가장 많이 벌고 음반을 가장 많이 파는 그룹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걸 목표로 삼으면 기준치가 점점 높아지기만 하겠지.
국내, 그다음은 해외. 점점 더 높아지는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경쟁에 몸을 던져야 할 터였다.
향상심이 있는 이들에게는 좋은 목표가 될 수 있겠지만, 퀘스트를 발생시킨 모노크롬의 소원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라솔 씨가 그랬지. 음악대상은 음반 판매량을 보고 주는 상은 아니라고.’
물론 판매량이란 건 인기, 성과와 직결되는 지표이니 영향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만.
다른 요소를 많이 고려하는 것은 상업적인 성공 외에도 다른 선택지를 남겨주기 위함이라고 느꼈다.
우리의 퀘스트 목표는 뮤직 어워드에서 음원상, 음반상을 받는 게 아니라 음악대상 수상.
모노크롬에게도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성공을 좇는 게 아니라 모노크롬만의 길을 간다는 선택지가 있었다.
“우리가 시간이랑 노력을 희생하기만 했으면 아마 이렇게 나서지는 못했겠지. 그런데 경험상 이런 일들이 우리한테도 좋은 영향으로 돌아오니까 도와주려는 거야.”
“그러니까 남들을 잘 챙기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 후배들을 맡는다는 얘기야?”
“그런 이미지를 일부러 만들려는 게 아니라. 모노크롬이 가요계에서 잘할 수 있는 게 이런 일들 같아.”
모노크롬은 실패를 겪었다가 되살아난 경험이 있었다. 그러니 실패하는 기분이 어떤지 잘 알아서 남들도 잘 도울 수 있었다.
모노크롬의 이런 모습을 응원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컬러즈는 멤버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면 불만이 없고.
사람마다 음악대상으로 가는 길이 전부 다른 모습이라면, 모노크롬의 길은 이런 형태이리라고 믿었다.
완전히 외부인의 시선인 대표와 대화를 하다 보니 더욱 그런 확신이 들었다. 여전히 대표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내 코가 석 자라는데,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신주인도 신주인이 이해 안 될 때가 있네.”
나도 대표가 참 이해가 안 된 적이 있었는데.
최근엔 대표가 내 집에서 백수처럼 뒹굴거리는 것을 보다 보면 ‘신주인이 이랬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유체이탈해서 내가 나를 관찰한다기보다는 나를 좀 닮은 타인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이따금 ‘역시 신주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자기 자신을 100퍼센트 이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너도 그냥 ‘신주인한테 이런 면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해.”
오지랖은 오지랖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남의 일에 무관심하기만 했다면 이렇게 대표와 마주 보고 대화할 일도 없었겠지. 전부 내 참견의 결과였다.
대표는 아직 완벽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알겠다는 얼굴로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더클랜? 걔네를 뭐 어쩌려고? 평생 키워줄 것도 아니잖아.”
“그렇지. 그래도 우리랑 같이 일해서 조금 탄력이 생기면 회사랑 동등하게 대화해 볼 기회는 생기지 않을까?”
“대화해서 잘 안 되면?”
뉴레인은 대화해서 잘 풀린 케이스니까 이런 말은 해도 괜찮겠지.
나는 업계인으로서가 아니라 내 개인적인 의견을 내뱉었다.
“나쁜 회사는 망하든지 뭘 하든지 해서 연예인들을 빨리 놔주는 게 낫다고 봐.”
“너도 참 극단적이다.”
급발진 대표에게서 들을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우름 컴퍼니는 뉴마보다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였기에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욕하고 다니는 실장 하나만 문제가 아닌 것 같던데, 회사가 계속 그 꼴이면 더클랜도 탈아우름을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돌 방생시키고 다니는 게 네 취미는 아니지?”
“솔로 가수들은 조건 맞는 회사 찾아서 잘 옮겨 다니는데 아이돌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가 있어?”
계속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으면 회사가 잘해야지. 그게 싫으면 소속 가수가 다 나가도 할 말이 없다.
대표도 내 생각엔 어느 정도 공감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이리스도 탈뉴레인 할까?”
여기저기 오지랖 부리고 다니는 나와 다르게 대표의 머릿속에는 아이리스뿐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이리스가 나가리라고만 생각할까.
“너도 아우름 컴퍼니 실장처럼 욕하고 다니게?”
“아니? 내가 왜 욕을 하고 다녀.”
“그럼 뉴레인은 거기보다 괜찮은 회사인 거야.”
“그래도 여러 번 실망시켰던 회사가 조금 나아졌다고 용서할 수 있을까? 난 아닌 것 같아.”
그런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었나.
대표는 예전에 다녔던 회사를 빗대어보는 듯했다.
‘나도 그곳은 평생 싫을 것 같긴 해.’
하지만 아이리스는 정말로 있을 곳이 필요한데.
나는 정규 앨범 제작 이야기가 나오자 표정이 밝아졌던 아이리스를 떠올렸다.
그 표정을 직접 못 봐서 대표는 아직도 아이리스의 진심을 못 믿는 게 아닐까.
‘대표가…… 아이리스를 직접 만나봐야 하나?’
그게 과연 좋은 방법일지 나는 고민에 빠졌다.
***
<상상 카페>에는 가수뿐만 아니라 ‘공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몇 명 게스트로 거쳐 갔다.
임주미 PD는 게스트 선정에 고민이 많은지 내게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고는 했다.
얼마 전에는 한이와 <기로>에 함께 출연했던 연기대상 수상자, 한문호를 부르고 싶은데 섭외가 어렵다며 푸념을 털어놓더니 최근엔 원만호로 타깃을 바꿨다.
안지택 PD와 같이 일하던 그를 데려오면 안지택 PD가 열 받아 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박도발 못지않아……. 아니, 도발 능력은 확실히 우위지.’
그러나 원만호도 연예대상을 받을 정도의 인기 코미디언이다.
고정 예능 프로그램이 몇 개나 있어서 이런 단발성 출연은 스케줄 잡기가 힘들다는 듯하다.
‘전에는 우리한테 라솔 씨를 데려올 수 있냐고 묻기도 했는데.’
나보다 더한 대상 컬렉터 기질이 있던 그녀는 오늘 갑자기 다른 곳에 흥미를 보였다.
“이런 재밌는 일이 있으면 저도 알려주지 그러셨어요.”
“이건 재밌는 일이 아니에요.”
모노크롬이 <상상 카페>의 고정 출연자이기 때문에 임주미 PD도 모노크롬의 스케줄을 대략 공유받는다.
그러다 우리에게 몬클하우스 정기 촬영 일정이 생긴 것을 듣고 꼬치꼬치 캐묻더니 더클랜과의 콜라보라는 사실까지 알아갔다.
그리고 오늘 촬영으로 모이기 전까지 그녀는 더클랜에 관해서 알아봤던 모양이다.
“아이돌 게스트도 방송을 위해서 가끔 나와주면 괜찮은데 말이에요. 너무 자주 나오면 안 되겠지만.”
이터널 완전체 출연 때 반응이 좋았는지 임주미 PD는 눈을 빛냈다.
그러나 그녀는 의도가 불순했다.
“알아보니까 거기도 위태위태하던데요? 많은 얘기를 나눠볼 수 있을 것 같은데.”
해체나 은퇴로 어그로를 끄는 능력은 여전했다.
그런데 지금 그녀가 더클랜을 부르면 아우름 컴퍼니는 바로 오케이할 것 같단 말이지.
불안해진 나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녀를 마주 봤다.
“……파괴왕이 되고 싶으신 건 아니죠?”
“에이. 무슨 그런 불안한 소리를.”
“지금까지 좋은 이미지 잘 쌓아놨는데 아이돌로 화제성만 좇는다는 소리 들으면 안 되잖아요. 잘되면 그때 불러주세요.”
“그러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내가 회의적인 거다. 임주미 PD가 원하는 재미란 게 뻔하지.
임주미 PD라면 더클랜과 회사 간의 갈등을 건들고 싶어 할 거다.
그런데 더클랜이 방송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회사를 향한 선전포고로밖에 안 보이겠지.
지금은 아우름 컴퍼니를 잘 어르고 달래서 우리와 같이 작업하게 만들고 더클랜의 입지를 다지는 게 먼저였다.
“더클랜이 방송에 나온 것 때문에 원치 않는 주목을 받아서 곤란해지기라도 해 봐요. 원만호 씨가 나오고 싶겠어요? 더클랜 멤버랑 같이 활동했던 분인데.”
“흐음. 그것도 그러네요.”
지금 임주미 PD의 마음속에서 원만호와 더클랜을 저울질해보자면 분명 원만호가 이길 터였다.
그녀도 원만호라는 대어를 놓치고 싶지는 않은지 바로 수긍했다.
나는 임주미 PD의 입에서 ‘그래도.’라는 말이 나올까 봐 멤버들의 스타일링을 확인하는 척 서둘러 그녀의 옆을 벗어났다.
멤버들은 오늘의 티푸드 레시피를 훑어보고 있었는데 머릿수가 하나 부족했다.
“한이는 어디 갔어?”
“선배님이랑 계속 대화하고 있었는데. 아, 저기에요.”
준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 배명희가 보였다.
배명희가 항상 촬영 전 작가에게 촬영 내용 설명을 들으며 대기하던 자리인데 오늘은 그 옆에 한이가 앉아 있었다.
배명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를 옆으로 불러 드립 서버에 담긴 커피를 잔에 따라주었다.
“무슨 얘기 중이세요?”
“겨울엔 밖에 나갈 일이 많이 없으니까 뭘 할까 하다가, 옛날에 피아노를 치던 게 생각나서요.”
“피아노도 치셨어요?”
“잘 치는 건 아니고, 조금.”
그래서 피아노를 잘 아는 한이와 대화를 나누던 중이었나 보다.
피아노를 칠 줄 아는 멤버는 몇 명 더 있지만, 우형과 해랑은 전자 키보드를 더 많이 치니까.
“예전에 선배님 곡 피아노 악보로도 많이 나왔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배명희가 가수로 활동하던 시기를 생각해 보면 악보가 나온 것도 오래전일 텐데.
의아해서 물어보니 한이가 바로 대답했다.
“어머니가 악보 모아두시는 책장에 몇 개 꽂혀있던 거 봤거든요.”
“어머니가 선생님 노래 좋아하셨대?”
“네. 같이 방송 출연한다고 말씀드리니까 예전에 모아둔 게 있다고 보여주셨어요. 학교 다닐 때 가요 악보 모으는 게 유행이었대요.”
한이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그래서 클래식 전문이리란 편견이 있었는데, 의외로 선호하는 장르가 넓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트로트 좋아하셨다는 것도 그렇고…….’
한이가 아이돌을 꿈꾼 건 사실 가정환경이 대중가요 친화적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부모님이 부모님 세대의 가요를 좋아하니까, 한이도 한이 나이 대에 맞는 가요를 듣다가 빠진 거지.
“그러면 선생님도 선생님 노래 피아노로 치실 줄 아세요?”
“예전엔 그랬는데. 아휴. 안 친 지가 오래돼서 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
“저도 얼마 전에 콘서트에서 오랜만에 피아노를 쳤는데요. 걱정했는데 손이 기억하고 있어서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그런가? 그런데 나이가 들면 말이지-.”
한이가 자신의 경험을 살려 배명희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두 사람은 다시 피아노 이야기로 대화를 꽃피웠다.
‘음악 쪽에 관심을 보이시는 건…… 좋은 징조가 아닐까?’
이전에 그만뒀던 일을 다시 시작할 생각이 든 것도 그렇고.
어쩌면 배명희가 가수 활동을 어떻게 할지 판단을 내릴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