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8화
해랑의 생일도 그랬지만 준해의 생일이 있는 시기는 나들이하기 딱 좋은 날씨였다.
집과 회사를 오가는 짧은 시간에도 선선해진 바람이 느껴졌다. 마치 이 계절을 놓치지 말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것 같았다.
‘이 날씨에 야외 촬영을 안 하면 손해지.’
작년 가을은 정규 앨범의 계절이었다.
정규 앨범 활동에 팬미팅까지 마치니 가을을 만끽할 새도 없이 계절이 후다닥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올해는 <상상 카페> 촬영장을 오가며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이 넘어가는 과정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자연을 즐기기 딱 좋은 장소가 있지 않은가.
‘마침 몬클하우스에서 촬영할 일정이 있으니 잘됐어.’
그것도 컬러즈가 좋아하는 모노크롬의 요리 시간.
<상상 카페>에서 베이킹을 시도해 본 멤버들은 몬클하우스에서도 실습에 나섰다.
빵이나 쿠키는 결과물의 모양이 정해져 있다 보니, 망하면 망한 게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컨텐츠로는 제격이라는 뜻이다.
‘흐음. 촬영하기 전에 미리 정리를 좀 해야 하나?’
몬클하우스는 메인 숙소가 아니라서 모노크롬이 바쁘면 방치되고는 했다.
도시 한복판의 보도블록 사이에서도 잡초가 자라고 꽃이 피는데 몬클하우스의 주변은 어떻겠어.
마당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데, 담벼락 밖은 허허벌판이라 잡초들이 빠르게 자리 잡아 강한 생명력을 뽐내곤 했다.
특히 얼마 전까지는 날이 더우니 잡초가 자라나는 속도가 어마어마했지.
나는 여름의 몬클하우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멤버들을 찾았다.
“너희 며칠 전에 몬클하우스에서 쉬었지? 마당이나 바깥에 잡초 많이 자랐어? 정리 필요하면 관리 업체 부르려는데.”
“잡초 재민이 온실에…….”
“푸핫. 재민이 들으면 화낸다.”
해랑의 중얼거림을 듣고 우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 재민은 온실에서 잡초를 키우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도 모르는 새에.
허브 씨앗이 싹을 틔운 줄 알고 정성스레 키우던 식물이 사실 몬클하우스 주변에 널려있는 잡초 중 하나였다는 것이 얼마 전에 밝혀졌다.
며칠 전 모노크롬이 몬클하우스에서 뷰이라이브를 하던 중, 재민이 마당에서 퉤퉷거리는 것을 발견하고 준해가 다가갔다.
[형 이상한 거 주워 먹은 거 아냐? 왜 생풀을 씹어 먹어?]
[이거 허브랬는데 너무 써.]
허브가 다 큰 줄 알고 맛봤는데 이상하다는 재민의 말에 준해도 그 풀을 자세히 살펴봤다.
[이 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컬러즈, 이거 무슨 허브인지 알아요?]
재민은 자신이 심은 씨앗이 ‘라벤더’와 ‘애플민트’라고 주장했다.
‘직접 키운 허브로 차분차를 만들고 싶었던 거겠지.’
그러나 잎의 모양은 라벤더나 애플민트와는 확연히 달랐고 풀의 정체는 미궁에 빠졌다.
뷰이라이브를 시청하던 컬러즈가 아는 허브의 이름이 총출동했고, 이내 ‘허브가 아닌 것 같다’라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컬러즈에 의해 실시간으로 소식이 퍼져나갔는지, 온라인의 식물 박사들이 라이브로 모여들어 밝혀주고 갔다.
재민이 키우려던 허브는 발아도 못 했고, 그 자리에 다른 식물이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손질하여 나물로 먹기도 하니 아예 못 먹는 식물은 아니라나.
‘식용 식물만 키우던 재민이의 의도에 맞긴 한데…….’
결국 재민은 ‘이름을 알았으니 뽑기는 미안하다.’라면서 그 불청객을 그대로 키웠다.
빠르게 자라는 잡초 덕분에 그의 미니 온실은 더욱 울창한 밀림이 되었다.
이제 방울토마토가 열리지 않는 데다가 서로 영역을 침범하여 풀끼리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건 그렇다 치고, 내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준해가 했다.
“햇빛 들어오는 데는 풀이 자라긴 했는데 조금만 잘라내면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관리 업체는 나중에 부르고 이번엔 살짝 다듬기만 할까.”
그 정도는 큰 노동도 아니었다. 창고에 수동 예초기가 있으니 그걸로 잠깐 정리하면 될 듯했다.
몬클하우스 컨텐츠가 리얼을 표방하긴 했지만 예쁜 그림을 위해서 이 정도 수고는 들여야지.
전문 관리 업체까지 부를 일은 아니라 노동력으로 때우겠다는 소리에 한이가 관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사람 필요하신가요?”
“너희가 정리하게? 그냥 놔둬. 촬영 전에 시간 잠깐만 들이면 되는데, 뭐.”
“아뇨. 누가 시킬 일 있으면 불러 달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일 없어도 그냥 사람들을 초대하는 곳인데 굳이 일을 하겠다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에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자세히 물었다.
“손님이 와서 일을 하겠대?”
“일하고 잠깐 하숙생으로 들어오고 싶대요.”
“하숙생?”
아이돌 지망생도 아니고 하숙생 지망생이라니.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 의미를 파악해 보려 노력해 봤지만 여전히 뜻을 알 수 없었다.
“몬클하우스 컨텐츠에 나오고 싶다는 얘기야?”
“놀러 오고 싶다는 말을 돌려서 한 것 같기도 하고요. 올 이유가 필요한 것 같던데 자세한 건 모르겠어요.”
“아니, 그래서 누군데?”
누군가가 한이에게 간접적으로 출연 의사를 밝힌 건가? 한이가 특히 발이 넓으니까.
그런데 한이의 입에서 나온 건 또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담이요.”
“이담? 이담이라면 그냥 놀러 와도 아무도 뭐라고 안 할 텐데.”
그는 확실한 모노크롬 라인이다.
그러나 이담의 조심스러운 성정을 생각해 보면 이렇게 돌려 말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라는 말이 있잖아. 와서 놀고먹고만 가는 게 신경 쓰였던 거지.
몬클하우스 초대 컨텐츠를 찍을 때면 촬영도 노동으로 치니까 상관없는데, 촬영이 없는 날 휴식 겸 놀러 오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굳이 일하겠다고 운을 뗀 건가.
아는 이름이 나오자 멤버들도 관심을 가지며 끼어들었다.
“이담이 놀러 오고 싶대?”
“와서 하고 싶은 거 있나?”
“나도 궁금해진다. 너희 몬클하우스에 갈 때 시간 되면 오라고 불러 봐.”
그래서 모노크롬은 몬클하우스에서 쉬는 날 이담을 부르기로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멤버들에게 예상치도 못한 심각한 사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
“이담이가 와서 뭐래?”
“하숙생이 하숙집을 구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담이 다녀갔다는 주말 후 월요일.
궁금해하는 나에게 한이가 갑자기 퀴즈를 던졌다.
“하숙집……? 지낼 곳이 필요할 때?”
“네. 바로 그거예요.”
“……집이 없단 소리야? 더클랜 숙소가 있을 텐데 왜?”
물론 더클랜의 숙소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지만 아이돌 그룹이라면 당연히 숙소가 있기 마련이다. 연차가 높지 않다면 거의 숙소에서 생활한다고 보면 된다.
정말 희귀한 사정으로 숙소가 없었다면, 적어도 지금까지 지내온 곳은 있을 터였다.
갑자기 지낼 곳이 없어졌다는 말은 이상했다.
‘설마…… 회사가 파산 직전에 몰려서 숙소를 정리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머릿속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가정하고 있는데 재민이 이담에게 들은 이야기를 짤막하게 요약해냈다.
“이담이 가출했대요.”
“뭐……? 아이돌이 가출이라니.”
황당해하던 나는 문득 준해와 눈이 마주쳤다.
“저, 저는 가출했던 거 아닌데요……. 그냥 연락만 잘 안 받았을 뿐이지.”
“으, 응. 너한테 뭐라고 할 생각은 아니었어.”
준해는 부모님과 사이가 원만해졌으니 문제없지.
나는 다시 이담과 관련된 화제로 돌아왔다.
“가출이란 건 숙소를 나왔단 소리야?”
“네.”
“회사랑 합의된 게 아니고?”
실제 상황인지 멤버들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클랜이 반항적이고 센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그건 컨셉이었잖아…….’
하지만 평소 행실이 중요하다고, 다른 애도 아니고 이담이 그랬다니까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나는 가출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원인에 집중하기로 했다.
“숙소는 왜 나왔다는데?”
“회사랑 이야기하다가, 조율이 잘 안 됐다나 봐요. 그러다가 전환점이 필요할 것 같았다고…….”
우형이 이담의 이야기를 전하다가 말을 흐렸다.
‘이거…… 얼마 전 아이리스랑 같은 상황 아니야?’
<아이돌부 방학캠프>에서 봤던, 얼마 없는 방송 출연 기회니 뭔가 해내고야 말겠다는 이담의 결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좀비 서바이벌을 즐기다가도 멤버들을 떠올리던 가장 같은 표정도.
그는 항상 노력하지만 돌아오는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않는 듯했다.
회사의 일 처리가 미온적이라는 것은 추측할 수 있었는데, 파업할 정도로 소통에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다.
“상황이 많이 별로래? 이담이는 괜찮아 보였고?”
“일단 복실이가 위로해줬어요.”
재민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람에게 받는 위로도 좋지만 강아지에게 받는 위로만큼 효과적인 게 없지.
이담은 몬클하우스에서 이웃집 복실이와 다시 만나 단란한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숙생 얘기는 뭐고? 설마 숙소 나와서 갈 곳도 없이 여기저기 전전하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이담이 본가가 보성이라는데, 내려가면 서울로 다시 올라오기 힘들다고 경기도에 있는 삼촌 집에서 신세 지고 있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이의 설명을 들었다.
숙소는 뛰쳐나왔지만 회사를 뛰쳐나올 게 아니라면 멀리 있는 본가로 휙 내려갈 순 없겠지. 언제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모르니까.
회사가 얘기 좀 하자고 불렀는데 ‘오늘은 좀 늦을 것 같고 내일 올라갈게요.’라고 대답했다고 생각해 봐.
웬만큼 온화한 회사가 아니라면 괘씸하게 여길 가능성이 있었다.
애초에 온화한 회사였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도 않았겠지만.
“그래서 속세에서 벗어난 곳에서 생각도 하고 조언도 구할 겸 찾아오고 싶었다네요.”
찾아오는 대신 일하겠다던 이담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이건 구조 신호였다.
막막한 상황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구할 곳이 모노크롬밖에 없었던 것이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인 듯했다.
우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말의 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저희가 주말에 몬클하우스에 있는 동안 같이 있다가 돌아가긴 했는데 저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담이도 그걸 알아서 자세히는 다 얘기를 안 하더라고요.”
하기야 다른 회사가 엮였는데 멤버들이 뭘 어찌할 수가 있겠어.
배명희가 얼마 전 ‘후배들에게 선배가 부족한 것 같다’라고 한 게 혹시 이런 의미였을까?
연예계, 가요계는 적자생존의 환경인 데다가 경쟁을 부추기는 분위기까지 있어서 업계 내에서 의지할 대상이 많이 없었다.
멤버들은 동료 아이돌이 위기에 처한 것을 알고 마음이 편치 않은 듯했다.
“……이담이한테 연락해서 여기로 불러올 수 있을까?”
신경 쓰이는 건 나도 마찬가지고.
오지랖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도 나 몰라라 넘어가는 것은 우리의 신념과 어긋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 안녕하세요…….”
밖은 화창한데 이담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인상을 풍기며 나타났다.
회사를 상대로 반항하긴 했는데, 아직은 배짱이 부족한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지나가던 뉴마 직원은 흠칫하긴 했지만.’
마스크를 끼니까 이담의 올라간 눈매가 강조되어서 더욱 사나워 보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알맹이를 알고 있는 우리 눈에는 달랐다.
얘기하기 좋도록 창문이 달려 햇살이 잘 들어오는 회의실로 그를 데려가자 재민이 타이밍 좋게 차분차를 가져다주었다.
“회사랑 무슨 일 있었는지 얘기해줄 수 있어? 말하기 어려운 부분은 생략해도 괜찮고.”
“그게…….”
이담은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모노크롬은 완전체로 자주 방송에 출연했지만 더클랜은 달랐다.
현재 더클랜은 사람들에게 주로 ‘이담네 그룹’으로 불리는 중이었다.
멤버 개인의 인지도가 그룹의 인지도로 이어지는 경우가 있지만, 그 연결고리는 생각보다 약하기도 했다.
‘더욱이 회사가 멤버들을 수납하면…….’
다른 멤버들의 매력을 볼 기회가 없는데 어떻게 그룹에 관심을 가지겠어.
더클랜의 소속사는 성적이 부진한 것을 회사가 아니라 그룹의 탓으로 몰았다고 했다.
‘뉴마도 아니고!’
더클랜을 볼 때마다 모노크롬의 과거가 떠오르던 것은 내 착각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클랜의 소속사는 뉴마보다 태도가 거칠었다.
“얼마 전엔 실장님이 저희한테 심한 말을 하셔서…….”
소속 아티스트에게 폭언까지.
이쯤 되면 가출이 오히려 온건한 반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