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5화
간단한 허밍으로만 가이드를 채운 미완성 곡.
윤환은 목소리가 흘러나오자마자 이 메일을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익명이 익명이 아니잖아.’
이전에는 우형과도 메일로 파일을 자주 공유했기에 그의 메일 주소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굳이 윤환이 모르는 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낸 것은 아마 ‘여우형’으로서 윤환에게 처음으로 곡을 주는 것은 나중 일이 되어야 하기에.
그러니 이 익명의 작곡가가 보낸 데모곡은 당분간 윤환이 혼자 듣고 혼자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동기부여 목적이었다면…… 효과적이었어.’
역시 리더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우형은 윤환을 아주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 곡을 빨리 세상에 내놓기 위해서라도 노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윤환은 데모곡을 재생시킨 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솔로 아티스트로 홀로서기를 결심했을 땐 이런 구체적인 미래는 상상하지 못했다.
죄책감과 불안함이 항상 남아 있었고, 어떻게든 자리 잡는 것이 급선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더 뚜렷해진 길이 자신 앞에 펼쳐졌다.
윤환은 내려받은 데모곡을 스마트폰에 넣은 후.
가만히 화면을 바라보다가 파일명을 ‘약속’으로 바꿔 넣었다.
***
“저희가 싱가포르에 다녀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민형이 출근해서 매니지먼트팀의 다른 직원들에게 뉴레인과 관련된 일을 전해 들었는지 나를 마주치자마자 물었다.
윤희도 내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민형과는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이사님 혼자서 뉴레인을 정복하신 거예요?”
정복이라니. 내가 무슨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한 표현이었다.
윤희는 내게 회사 하나를 뒤엎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는 게 놀라운 듯했다.
“혼자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좀 빌렸어요.”
“최 비서님이요? 아니지, 최 비서님은 원래 이사님 하시는 일을 보조하니까…….”
최 비서가 내게 도움을 주는 것은 맞지만, 이번 일은 최 비서가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확실히 넘어섰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이번 뉴레인 교통정리는 대표의 지원을 받아서 수행했다는 것을.
모노크롬 전담팀은 탈뉴마를 준비 중인데, 이 시점에 내가 뉴마의 대표와 손을 잡았다는 게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을까.
그러나 내가 대표 대리로 권리를 행사한 시점에서 숨길 수는 없는 일이다.
“대표님 지시가 있어서 제가 대리 신분으로 처리한 거예요.”
“대표님이요?”
윤희는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있던 사람이다. 함께 회사 욕을 나누는 동료들도 있고.
대표의 운영에 특히 불만이 많았을 텐데 내가 대표의 지시를 따랐다고 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나는 지레 찔려서 먼저 이런저런 변명을 내뱉었다.
“뉴마는 지금 제가 이사로 있으니까 어쩔 수 있어도, 뉴레인은 다르잖아요. 그래서 잠깐 권한 좀 빌렸어요. 대표님도…… 예전보다는 귀가 좀 열리셔서.”
뉴레인이 개선되었다고 해서 모노크롬에게 뉴레인으로 간다는 선택지가 생긴 건 아니었다.
이번 일은 아이리스와 신인 아이들, 뉴레인과 새로 계약한 윤환은 탈뉴레인이 어려우니까 대표 대신 내가 나선 거지.
그 점을 말하며 슬쩍 대표 실드를 끼워 넣자 윤희가 눈을 깜빡이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사님이 대표님을 움직이셨다는 거야말로 진짜 정복하신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대표가 지금 내 말을 잘 따르니까 그 말도 맞나.
민형도 옆에서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더니 슬쩍 끼어들었다.
“그러면 거기도 앞으로 잘 굴러갈 예정이래요?”
아, 이 사람 무지개였지.
직원으로서가 아니라 팬으로서 뉴레인 일에 관심이 많은 모양이었다.
함부로 정보를 외부에 발설할 일 없는 무지개니까 조금은 미리 말해줘도 괜찮겠지?
“스포일러 해도 돼요?”
내가 물어보자 민형은 들어도 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를 재보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우형도 가끔 대화 중에 고민할 때 이렇게 눈동자를 굴리는데. 분위기는 달라도 눈매는 닮은 두 사람이었기에 자연스레 우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민형의 눈동자가 내게 고정되는 것을 보고 나는 무지개가 좋아할 만한 소식을 전했다.
“내년 초에 앨범 나올 거예요. 그것도 정규 앨범으로.”
“……역시 주인 님은 최고의 프로듀서입니다.”
“제가 프로듀스하는 건 아니지만 뭐…… 네.”
이건 민형이 매우 만족스러울 때 하는 칭찬이었다.
그는 고개를 주억거리고는 들을 얘기는 다 들었다는 것처럼 쿨하게 할 일을 하러 떠났다.
정말 관심사가 뚜렷하면서도 적당히 끊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남겨진 나는 윤희와 마저 대화를 나눴다.
“배우팀 분위기는 어떤 것 같아요?”
“생각보다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뉴레인 일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느낌?”
언제는 같이 손잡고 연습생도 보내고 데려오고 하더니, 이런 일은 그냥 남 일이냐고.
‘정말 콩가루 집안이네.’
게다가 대표가 움직였다고 하면 더 신경을 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별 반응이 없었다.
배우팀도 단독으로 움직인 지 오래되어서 대표 눈치를 덜 보게 된 걸까.
그들은 그냥 모노크롬이 뉴마를 나가서 완전한 배우 회사가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듯했다.
‘뭐, 그건 가만히 두면 언젠가 이뤄질 테니까 그때까지 방해만 안 하면 좋겠는데.’
어쨌든 뉴레인이 배우팀과 계속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좋은 일이다.
초장부터 윤환을 빼가면서 시작된 뉴레인과의 갈등이 퀘스트 기한 안에 제대로 마무리된 듯하여 나는 이제야 한숨을 돌렸다.
***
준해의 생일 컨텐츠 영상은 생일 당일 오전, 모노크롬 채널에 올라왔다.
그리고 저녁에는 생일 기념 뷰이라이브가 있었다.
‘공휴일이지만…… 생일이라는 거대 이벤트가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주말과 공휴일을 따지지 않는 게 엔터사 직원의 숙명 아니겠어.
오늘 멤버들을 따라 덩달아 출근하게 된 직원들에게는 적당히 대체 휴일을 줄 생각이었다.
“자, 그러면 벌점 발표식이 있겠습니다.”
“드디어 폭정이 끝나는구나.”
한이가 준해의 멘트 뒤에 한마디를 덧붙였다가 벌점 수여자가 되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우형과 재민이 뭐라고는 하지 못하고 화면을 바라보며 입 모양으로만 ‘살려주세요’를 외쳤다.
컬러즈는 그들의 구조 신호를 보며 [ㅋㅋㅋㅋㅋ] 하며 웃을 뿐이었다.
멤버들이 힘들어하지 않기를 절실히 기도하며 사는 컬러즈지만, 가끔은 멤버들의 고통이 그들의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일단 해랑 형. 3만 2천 점으로 최하점이에요.”
간신 활동 덕분에 준해 리더의 편애를 받은 해랑은 예상대로 벌점을 가장 적게 받았다.
반대로 벌점 최고점을 다투는 한이와 재민이 그에게 야유를 보냈다.
“우우-, 간신.”
“저번에 나는 ‘준해 바보’라고 작게 말했는데 해랑 형이 준해한테 일렀어.”
이런 활동 덕분에 해랑은 이미 받았던 점수도 준해의 자비를 받아 깎을 수 있었다.
‘멤버들이 간신이라고 하니까 더 보란 듯이 준해의 수족 노릇을 한 것 같은데.’
덕분에 멤버들은 상대적으로 반항적인 이미지가 되어서 벌점을 후하게 받을 수 있었다.
“컬러즈도 영상 봤어요? 해랑이가 어떻게 하는지?”
“나는…… 형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한 건데.”
“그에 비해 나는 형도 아니다?”
“형답지 못하기는 했어.”
우형도 유치하게 장난을 쳤다는 사실은 자각하는지 이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준해가 리더가 처음이었듯, 우형도 리더가 아닌 멤버는 처음이었기에 조금 들뜬 느낌이었지. 리더니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면서.
아무튼 이제부터는 벌점이 십만 단위로 넘어간다.
“우형이 형이 벌점 48만 점. 그다음으로 재민이 형은 99만 8천 점.”
“아-, 나 아깝게 백만 점을 못 채웠다.”
“지금 준해한테 나쁜 말 해.”
“준해 바보.”
재민이 한이의 말을 따랐다가 곧바로 벌점 백만 천 점이 되었다.
“한이 형이 137만 5천…… 대충 반올림해서 150만 점이요.”
“반올림이 이상한데? 뭐, 알겠습니다.”
준해 리더의 통치 아래에선 이것도 있음 직한 일인지 한이는 별말 없이 운명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모인 벌점은 네 멤버의 것을 전부 합쳐 대략 300만 점.
여기에 비공식으로 윤환이 벌점 5만 점을 받았다고 한다.
‘대체 싱가포르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준해의 벌점 기록 수첩에 윤환의 이름이 적힌 걸 목격했을 땐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이제 이걸 그대로 벌금으로 바꿔서, 다 못 갚으면 멤버들이 그만큼 저한테 선물을 줘야 하는데요. 무슨 선물 받을까요?”
준해가 화면을 보며 컬러즈의 채팅을 확인했다.
명품 지갑부터 집, 차, 건물, 세계까지. 컬러즈는 300만 원에 아주 많은 가능성을 부여했다.
“한이 형의 가치가 2조 5천억 원이니까 한이 형을 받으라는데?”
“에이. 2조 5천억 원은 옛날얘기고. 물가 올라서 이제 2조 5천억 150만 원이에요. 준해가 차액인 2조 5천억을 나한테 줘야 해.”
“거래 거부할게요.”
컬러즈, 멤버들과 열심히 머리를 맞댄 결과, 멤버들이 잘해서 벌금을 깎는 게 가장 좋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벌금 삭감 방법도 정해져 있었다.
멤버들이 좋은 태도를 보일 때마다 준해가 복권을 한 장씩 주고, 그 복권에서 나온 당첨금만큼 벌점을 깎아주기로 했다.
복권 당첨금의 총합은 벌금의 총합과 같으니, 멤버들이 복권을 전부 얻어낸다면 전액을 탕감할 수 있다.
“해랑 형은 3만 원 정도만 갚으면 되는데 복권에서 10만 원 나오면 어떡해?”
“그럼 반대로 7만 원을 못 갚은 사람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 사람이 해랑 형한테 7만 원만큼 잘해줘서 그 금액을 양도받으면 돼요.”
이제부터는 벌금이 멤버들 사이에서 돌고 도는 경제 순환 시스템이 발동된다.
멤버들은 노력 여하에 따라 앞으로 준해 리더처럼 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준해…… 형들을 능숙하게 조종할 줄 알아.’
벌점을 마구 뿌린 후에 회수 시스템을 만들어서 위기감을 느끼게 하고, 벌금 탕감의 위기를 기회로 바꿀 여지를 줘서 멤버들이 움직이도록 유도했다.
결국은 벌금을 깎는 것도 준해에게 잘해주는 것이 관건이었다. 벌점을 피하기 위해 준해 리더에게 잘 보이는 것과 본질은 같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다른 기획처럼 이어진 탓에 멤버들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건 준해 리더의 권한이 생일 이후에도 이어지게 만드는 큰 그림이라는 것을.
‘사실 준해가 정말로 바란 생일 선물은 이게 아니었을까.’
멤버들을 오랫동안 발아래에 두는 것. 리더 체험 기획은 그 과정 중 하나였을 뿐이지.
재민이 방금 ‘준해 바보’라며 놀렸지만, 역시 준해는 모노크롬의 브레인이었다.
멤버들도 벌금을 깎아준다니 큰 불만이 없었고, 준해도 만족스럽고, 컬러즈도 10월에 이어질 빚 탕감 스토리를 즐기면 되는.
준해가 원하는 것은 전부 이루면서도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이었다.
***
우형과 성운의 프로듀싱 앨범, 아이돌 콜라보 버전이 온라인 음원으로 공개되었다.
이번 앨범에 담긴 음원은 총 세 곡.
좀비 서바이벌 게스트로 모였던 다섯 명, 거기에 해랑을 포함한 여섯 명이 두 명씩 한 곡을 맡았다.
여기서 우형이 가장 고민이 많았던 것은 ‘류현을 누구와 붙이느냐.’였다.
“하범이는 해랑이 피처링으로 곡을 내기로 했으니까 예외고, 아무래도 이담이는 <쉰셋돌> 때 일이 조금…… 있었잖아요.”
“그렇지…….”
신셋의 메인 보컬을 누가 맡느냐는 문제로,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가장 인지도가 떨어지던 이담이 무시당하는 일이 있었다.
그중 유독 목소리가 컸던 것이 러너스하이의 팬덤이었고.
‘그런데 이담이랑 류현이한테 노래를 같이 부르게 하면 그때의 일이 되풀이될 위험이 있지.’
결국 신셋 타이틀곡의 가장 임팩트 있는 보컬 파트는 류현이 아니라 이담이 차지했다.
그 일에 뒤끝이 남은 팬들이 ‘지금 들어도 류현이 노래를 더 잘 부른다’ 같은 반응을 보이는 일은 피해야 했다.
하범에 이어서 이담을 제외하면, 남은 것은 종훈과 도한인데.
두 사람 역시 엔피버와 이코드의 메인 보컬이었다.
‘그래서 고민이 많았는데…… 이런 해결법이.’
음원이 공개되고, 류현이 참여한 곡은 유독 커뮤니티의 시선을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