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4화
“택배, 택배인데!”
재민이 황급하게 문을 콩콩 두드렸다.
윤환도 당황해서 문을 닫아버렸지만 문전박대할 생각은 아니었기에 다시 문을 열었다.
“어떻게 문을 바로 닫을 수가 있어? 이거 벌점 5천 점짜린데.”
“와. 5천 점은 세다.”
문을 다시 열자마자 준해가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나 벌점이 무엇인지보다는 이들이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가 더 궁금했다.
“어, 어쩐 일이야?”
<가요차트> 출연자들이 묵는 호텔은 몇 군데로 나뉘어있었다.
모노크롬은 다른 호텔이었고, 그래서 무대 아래에서 잠시 마주친 이후로 못 만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방 앞으로 직접 찾아오다니.
방 호수를 아무나 알아낼 수는 없으니 아마 뉴레인의 직원과 미리 이야기해 놓은 듯했다.
윤환은 매니저가 ‘오늘은 피곤할 테니 일찍 방에 들어가서 쉬어라.’라며 자신을 빨리 들여보낸 이유를 이제야 알아챘다.
“같이 놀자고 찾아왔지. 옷 갈아입은 거야? 나가자!”
재민이 윤환의 팔을 잡았다.
당장이라도 밖으로 끌고 나가려는 듯한 행동에 윤환은 잠시 뒤로 물러섰다.
“잠깐, 잠깐. 핸드폰이랑 지갑 들고.”
“지갑은 안 들고 나와도 돼. 이사님이 할당량 채우고 오라면서 법카 주셨거든.”
그렇게 말하며 재민과 준해는 윤환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윤환은 핸드폰에서 충전 케이블을 해제하여 주머니에 넣다가 멈춰 섰다.
‘……왜 나가는 거로 확정된 거지?’
분명 방금까지 무슨 용건인지 묻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샌가 자신도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재민과 준해가 웃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다.
“아니,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로 찾아온 거야?”
“그 얘기는 내려가서 자세히 하자고.”
눈치를 보며 찾아와 조심스럽게 같이 나가지 않겠냐고 물었다면 ‘나가도 되나?’라는 고민을 잠깐이라도 했을 텐데.
재민이 윤환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불시에 찾아온 것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재민은 윤환에게 ‘모노크롬 멤버들과 같이 만나자’라고 몇 번 권했으나 윤환은 계속 망설이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 택배라면서 아무도 속지 않을 농담을 한 것, 문을 열자 재민이 준해를 업고 있었던 것, 갑자기 벌점 얘기를 꺼내더니 나가자며 붙잡은 것까지.
하나같이 일반적이지가 않아서 윤환은 재민의 페이스에 완벽히 휘말리고 말았다.
윤환은 그렇게 무슨 상황인지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두 사람에게 이끌려 외출하게 되었다.
***
오늘은 <가요차트> 공연이 있어서 여러 아티스트가 싱가포르로 찾아온 상태다.
퇴근하는 장면이나마 보고 싶어서 호텔 근처로 찾아오는 팬들도 있었지만, 아티스트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간 이후엔 거의 해산했다.
“윤환아!”
윤환이 밖으로 나오니 다른 멤버들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비율 좋은 젊은 남성들의 모임이란 점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긴 했으나 이들끼리 똘똘 뭉쳐있기 때문인지 다가오는 사람이 없어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기 시작한 시각이라 마치 술이나 한잔하자고 친구와 약속하고 만나는 자리 같았다.
“다들, 갑자기 웬일이야.”
“그냥 날도 좋고. 만나기 좋은 날이잖아.”
우형이 반갑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모노크롬과 윤환은 별일이 있어서 만나는 게 더 좋지 않은 관계였다.
만나러 온 데에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점이 윤환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한이도 윤환이 가까이 오자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저기에 가고 싶은 카페가 있는데 여섯 명 이상만 입장할 수 있대. 그래서 같이 가줘야겠어.”
“그런 카페가 어디 있어.”
“싱가포르엔 그런 가게가 있다니까. 무시해? 내기할래?”
멤버들은 이내 윤환을 중심으로 서서 걷기 시작했다.
카페에 가겠다던 한이의 말과는 달리 다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저건 뭐지? 저기 가 볼까?’ 하며 갈 곳을 즉석에서 정했다.
여섯 명이 함께 평범하게 관광하며 거리를 걷고 있는 상황이 윤환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다른 현실적인 생각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준해야. 저기 간판 읽어줘.”
“저건 영어도 아니잖아!”
“대신 때려줄까?”
자꾸 준해를 성가시게 하며 걷는 멤버들에, 준해의 보디가드처럼 붙어 있는 해랑까지.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여전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또 간판 물어보면 물어볼 때마다 벌점 천 점이야.”
“그런데 벌점이 뭐야?”
이전과 변함없는 멤버들 덕분에 윤환도 어색함 없이 이들 사이에 끼게 됐지만, 벌점 얘기가 나올 때마다 어리둥절했다.
모노크롬 멤버들은 벌점제가 우형이 만든 제멋대로 시스템이라는 것, 준해가 생일 기획으로 벌점 부여 권한을 가져갔다는 것들을 설명했다.
“윤환이 형도 방금 5천 점 받았거든?”
지금은 준해 리더의 권한이 발동하지 않았지만 준해는 멋대로 윤환에게 벌점을 줬다.
“와……. 그럼 좀 있으면 한 5만 점 되겠는데? 오늘 커피 네가 쏴야겠다.”
한이의 말에 윤환은 그에게 가벼운 주머니를 털어 보여줬다.
“나 지갑을 안 들고 왔어. 재민이가 가져오지 말라고 해서.”
“그럼 한국 돌아가서 사.”
해랑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투로 가볍게 말했다.
준해의 벌점 징수를 돕는 말 같지만 돌아가서 또 만나자는 약속이기도 했다.
배려가 녹아있는 말에 윤환이 “그래.”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모노크롬으로 있던 시절이 본인의 인생에서 매우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좋은 사람들을 어디서 만날 수 있었을까.
특별한 목적지 없이 걸으며 해외 분위기를 즐기다가, 카페에 앉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가. 오랜만에 만난 동창처럼 이야기꽃을 피우고 다시 돌아가는 길.
걷다 보니 윤환은 자연스레 멤버들의 뒤에서 우형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형 프로듀싱 앨범 작업한 거 나도 들었는데. 노래 좋더라. 아, 물론 모노크롬 앨범에 들어간 노래도 좋고. 모노크롬 말고 다른 가수 목소리로 형이 만든 노래를 들으니까 신기해서.”
원래는 윤환도 함께 부를 예정이었던 <기다림의 끝>이 발매되었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활동하면서 언제 그렇게 곡을 많이 만드나 궁금하기도 해. 쓰러지는 거 아냐?”
“프로듀싱 앨범은 나 혼자 작곡하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예전엔 내가 작업한 걸 계속 쌓아뒀었잖아. 거기서도 모티브를 얻고, 어울리겠다 싶은 부분은 활용하기도 하고.”
주인이 오기 전까지는 자작곡을 공개한 적이 없으니 쌓인 작업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지. 한이 형이랑 준해가 가이드 안 해준다고 나한테 들고 온 적도 많았잖아.”
“지금 생각해도 네가 말은 제일 잘 들었다. 너도 말을 아주 잘 듣는 건 아니었지만.”
“그때 벌점제가 있었으면 큰일 났겠네.”
“야, 아냐. 다들 준해 리더를 겪어보고 내가 얼마나 좋은 리더였는지 깨달았다고 했어.”
한이가 비슷한 말을 했다가 취소한 적은 있었지만 우형은 당당하게 왜곡된 사실을 전했다.
“그나저나 너도 계속 작곡 공부해?”
“응. 나중에 기타로 자작곡 공개해 보고 싶어서. 당분간은 댄스곡으로 활동할 것 같아서 기타 칠 일이 많이 없긴 한데.”
두 사람은 잠시 작곡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윤환이 우형과 작곡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윤환도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할 땐 싱어송라이터가 꿈이었다.
도중에 아이돌로 데뷔하게 되어서 우선순위가 낮아지긴 했지만 작곡 공부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모노크롬 멤버일 적에도 우형과 곡 작업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있었다.
앞서 걷던 다른 멤버들도 무슨 대화 중이냐며 끼어들고, 화제도 바꿔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윤환이 묵는 호텔이 가까워졌다.
밤에 혼자 걸으면 외롭고 위험하니 배웅을 해주겠다며 윤환의 호텔로 먼저 온 참이었다.
호텔 입구 앞에서, 우형은 큰맘을 먹은 듯이 잠시 발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곡을 주면…… 좀 그런가?”
모노크롬의 곡뿐만 아니라 프로듀싱 앨범의 곡을 만들며 우형은 기존의 작업물을 많이 찾아봤다.
그중엔 모노크롬, 혹은 멤버들이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만든 미완성곡들도 많이 섞여 있었다. 그 멤버에는 윤환도 포함되어 있었다.
윤환은 뒤를 돌아 우형을 바라봤다. 남을 위해서 곡을 주겠다는 사람이 왜 저렇게 부탁하는 표정인지.
하지만 윤환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 역시 그것까진 좀 어렵겠…….”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멤버들과 다니며 예전 기억들을 새록새록 떠올리던 윤환은 또다시 묻혀 있던 기억을 발굴했다.
아, 이런 모습도 있었지.
우형의 ‘내가 부족한 거겠지.’ 하는 표정을 다시 보게 될 줄 몰랐던 윤환은 아까보다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모노크롬으로 가수를 데뷔해서 계속 도움을 받았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혼자서 걸어가는 연습이 더 필요한 것 같아.”
우형도 그런 윤환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러나 윤환은 계속 마음이 쓰이는 존재였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운 마음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윤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더 유명해지고 돈도 더 많이 벌게 되면.”
윤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우형을 바라봤다.
“그때 내가 정식으로 작곡 의뢰할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당당한 선언에 우형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번엔 환하게 웃었다.
우형은 윤환의 머리카락을 마구 흩트렸다.
“이렇게 자신감 넘치는 거 보니까 넌 잘될 거야.”
“모노크롬도.”
“너도 우리도 다 원하는 대로 될 거야. 내가 운이 좋아서 은근히 소원이 잘 이뤄지거든.”
천천히 앞서가던 멤버들은 우형과 윤환이 멈춰 선 것을 알아채고 뒤돌아섰다.
“형, 왜 윤환이 형 괴롭히고 있어?”
앞서가느라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한 멤버들은 우형이 윤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준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묻고 해랑이 행동의 의미를 분석했다.
“윤환이보다 커지려고 머리 누르고 있는 거 아냐?”
우형과 윤환은 키가 같고 체형이 비슷하여 가끔 의상이 뒤바뀌어도 늦게 알아채는 경우가 있었다.
가끔 누가 0.1cm가 크다느니 하는, 해랑의 기준에선 의미 없어 보이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해랑의 말을 들은 재민은 “머리 누르면 키 작아져?!” 하며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냐. 윤환이 쑥쑥 크라고 기 불어넣어 준 거야.”
“그런 능력이 있으면 형한테 쓰지?”
한이가 키를 놀리자 우형은 그에게 달려들어 에어 니킥을 날렸다.
윤환은 그 모습을 보며 즐겁게 웃다가 멈칫했다.
“……지금 내 키도 놀린 거 아니야?”
“형, 알아채는 거 되게 늦다.”
준해가 남 일 보듯이 말하자 윤환은 준해를 빤히 바라봤다.
해랑과 한이의 장신 라인에 끼지 못한 것은 준해도 마찬가지였다.
“나, 나는 아직 어려서 성장판이 가능성이 있어.”
준해는 “더 물어보면 벌점 만 점.”이라는 말로 윤환의 반론을 사전 차단했다.
준해 리더의 폭정까지 알뜰살뜰하게 체험한 윤환은 다시 웃었다.
***
모노크롬과 윤환이 한국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 윤환은 메일을 하나 받았다.
회사 직원들과 곡 파일 등을 공유하는 용도로 사용하느라 개인적인 메일은 오지 않는 계정이었다.
아무 멘트도 없이 ‘demo_YH’이란 이름의 오디오 파일만 첨부된 메일.
스팸 메일이라면 바로 삭제하면 되었지만, YH는 윤환의 이니셜이었다.
의아해하면서도 파일을 내려받아 재생한 윤환은 이내 픽 웃었다.
‘진짜 좋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