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63화 (363/430)

# 363화

받는 사람은 대표. 참조는 나.

깔끔한 메일 내용에 딱히 손볼 구석이 없는 기획서 파일까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메일이 지금 도착했다는 게 놀라웠다.

나도 오늘은 칼퇴근했고 집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퇴근 시간으로부터 많이 지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일 보내도 될 메일을 굳이 지금 보냈다는 점에서 어떻게든 빨리 처리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내가 아침 일찍부터 기획서 다시 올리라고 하긴 했지만, 설마 당일에 보낼 줄이야.’

하긴 아이리스가 원하던 전담팀 구성이 있었을 테니까 불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기획실의 의견을 싹 걷어내고 그걸 따르면 될 일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빨리 태도를 바꿔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 처리를 할 줄은 몰랐다.

“몇 번 더 뉴레인에 찾아갈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그냥 이 내용대로 바로 진행하라고 맡겨도 되겠는데?”

대표도 자신의 태블릿으로 메일을 확인하고는 나쁘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일단 안 자르고 지켜봐도 되겠네.”

“해고는 보류한 거였어……?”

나는 오히려 일 처리 속도를 보고 ‘이래서 실장, 팀장까지 올라갔구나.’ 하고 다시 봤는데.

대표는 믿고 있다가 한번 실망해서인지 가차 없었다.

‘기획실 직원들은 괜히 뻗댔다가 얻는 것도 없이 대표의 신뢰만 잃었네.’

대표 앞에선 항상 이렇게 말을 잘 들었을 테니 평소처럼 있었으면 문제가 생길 일이 없었을 것이다.

이번 아이리스 전담팀 일도 대표가 기획실에 직접 말했다면 고분고분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상대에 따라 태도를 손바닥 뒤집듯이 바꾼 게 문제였으니까 업보라고 해야 하나?’

예전에도 모노크롬의 컴백일을 빼앗으려고 통보하듯이 말하고 간 사람들이잖아. 오늘은 내 앞에선 제대로 말도 못 하길래 황당하긴 했어.

일 처리는 다시 봤지만, 지금까지 그들에게 ‘신주인 이사’도 만만한 상대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어서 동정심은 들지 않았다.

‘어쨌든 기획실이 직접 작성한 기획서니까 이대로 진행하면 나중에 딴소리는 안 하겠지.’

대표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주기도 전에 전담팀 건은 깔끔히 정리되어 버렸다.

사실 허 실장, 진 팀장과는 대화를 길게 하지도 않아서 자세히 말해줄 것도 없었다. 나는 그보다 더 재밌는 화제를 꺼냈다.

“아이리스 멤버들이 네가 짠 컨셉이 마음에 든대. 오늘 잠깐 얘기해줬거든.”

오늘은 뉴레인 기획실을 뒤엎기도 했지만 아이리스 멤버들과 대화를 나눈 시간이 더 길었다.

정규 앨범 이야기가 나오니까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지. 그린은 또 뮤직비디오에 추가할 요소를 생각해 보겠다며 투지를 불태웠고.

이 이야기를 전해주자 대표가 나를 홱 돌아봤다.

“뭐? 그걸 말했어?”

“어차피 말할 거였잖아?”

조금 일찍 말했다고 이렇게 놀랄 일인가.

어차피 그 컨셉을 소화하는 건 아이리스다. 대표가 혼자 마음에 두고 있어봤자 아무 일도 진행되지 않는다.

혹시 미리 얘기했던 것과 다른 컨셉을 준비 중이었나?

의아해하며 대표를 바라봤더니 대표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직 완벽하게 준비된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좋아하는 사람한테 잘 보이고 싶은 소녀 같은 대사야.

마이 엔터에선 적당히 컨셉 키워드를 선택해서 제작 버튼만 누르면 끝났는데, 열심히 고민해서 짠 컨셉을 실제 인물이 듣고 평가했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만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거겠지.

“그렇게 신경 쓰고 있으면 잘하고 있다고 칭찬도 해 주고 그래. 이런 일이 생기는데 너는 회사에 없으니까 멤버들이 불안해하잖아. 평상시부터 믿음을 줘야지.”

“너는 모노크롬한테 칭찬해주고 그래?”

“당연하지.”

처음 봤을 때 모노크롬이 얼마나 자존감이 떨어진 상태였는데.

거울 앞에 딱 붙어서 혼자 자신을 격려하던 우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레드 말고 다른 멤버들이랑도 가끔 소통하는 게 좋지 않을까? 다른 멤버들은 항상 레드한테 전해 듣기만 하니까 네가 아이리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를 거 아니야. 직접 말하기 뭐하면 매니저한테 전달해달라고 하든가.”

내 제안에 대표는 잔소리를 듣는 표정이더니 입을 열었다.

“다른 애들은 아직 거리감이 느껴져서 잘 모르겠어. 특히 오렌지.”

“오렌지……는 안 친하면 조금 그럴 순 있지.”

모노크롬의 둘째인 해랑도 냉하지만, 아이리스의 둘째인 오렌지는 더 냉했다.

해랑이 주변에 관심이 없어 보여서 거리감이 느껴지는 타입이라면, 오렌지는 사람을 빤히 바라봐서 눈치를 보게 되는 타입.

‘괜히 아이리스의 카리스마라고 불리겠어.’

그래서 오렌지는 무지개들에게 ‘아이스 오렌지’라는 별명도 얻었다. 반대로 오렌지가 환하게 웃으면 ‘따끈따끈 귤’이랬던가.

팬들은 그 갭을 즐기지만 오렌지가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지금 대표처럼 쉽게 거리감을 느꼈다.

“얘기를 안 해봐서 그냥 내 추측이긴 한데, 걔는 왠지 나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단 말이야.”

“으음. 무슨 느낌인지는 알겠는데 오렌지가 마음 여는 데 조금 오래 걸리는 타입이라서 그래.”

오늘 아이리스가 나와 대화를 마치고 대표실을 나설 때, 오렌지가 잠시 멈춰 서서 나를 돌아보며 한 말이 있었다.

“정말 빈말은 안 하시네요.”라고.

그게 무슨 뜻인가 생각했는데, 오렌지는 예전에 자신이 내게 한 말을 아직 마음에 두고 있었던 듯했다.

내가 아이리스의 싱글 제작을 담당하겠다고 뉴레인에 갔을 때. 오렌지가 내게 헛바람을 불어넣지 말라고 했고, 나는 ‘내게는 그럴 지위가 있다’라고 대답했었지.

그리고 오늘 일로 그 말을 제대로 증명해냈다.

내게 인사하고 대표실을 나가는 오렌지는 아이스 오렌지보다는 따끈따끈 귤에 가까웠다.

‘왠지 인정받는 기분이었어.’

이래서 사람들이 게임을 하드 모드로 플레이하는 걸까. 클리어하니 더욱 보람이 느껴졌다.

오늘 일을 회상하고 있는데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봐?”

“지금 되게 덕후 같았어.”

“……너도 이렇게 될 수 있으니 조심해.”

이놈의 표정 관리.

나는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표의 시선을 피했다.

***

모노크롬이 출연하는 <가요차트> 싱가포르 공연은 한국에 바로 송출되지 않는다.

오늘 녹화를 하고, 나중에 편집본이 <가요차트> 특집으로 방송될 예정이다.

‘콘서트처럼 진행되니까 전부 보여주기에는 시간 문제, 진행 문제가 있지.’

즉, 한국에 있는 컬러즈는 모노크롬의 무대를 실시간, 풀버전으로 즐길 수가 없다.

컬러즈는 모노크롬을 그리워하며 해외 팬, 혹은 싱가포르로 간 한국 팬들이 올려주는 정보를 수집하며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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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클이들 달의뒷면 했다고??

달의뒷면이라서 우리는 못 보는 거냐?ㅠㅠ아무도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아 slow down..

└우리 달의 뒷면에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 지구 입장이었냐고ㅠㅠㅠ

└녀석들에게 보여준 걸 나에게도 보여줘라!

└아니 근데 오늘 모노드라마 의상이면 수트 입고 달의뒷면 한 거야?

└기절

└직캠 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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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모노크롬은 와 <체크메이트>, 그리고 <궤도>와 <달의 뒷면> 리믹스에 시퀄을 베이스로 한 리믹스까지. 총 6곡을 압축하여 선보였다.

우리 단독 공연이 아니라 곡마다 의상을 갈아입을 수는 없었기에 의상은 에 맞춘 수트 버전.

정장 스타일의 의상에 다크 섹시의 끝판왕인 <달의 뒷면>이 어우러지니 금욕적인 분위기가 더해졌다.

‘……이건 내가 의상을 봐서 아는 내용이고.’

무대를 보지 못한 컬러즈는 어딘가에 사진과 영상이 올라오지 않을까 하며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 세상을 배회했다.

덕분에 나는 직원들에게 전해 듣는 것보다 빠르게 커뮤니티로 모노크롬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컬러즈가 주목한 소식은 세트 리스트나 의상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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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준해가 우형이 대신 인사드릴까요? 둘셋! 했다는데

왜 갑자기 준해가 선창하지??? 뭐 있나???

└오잉? 뭔진 몰라도 귀엽다

└해외 나간 김에 막내 시켜준 거 아닐까? ㄱㅇㅇ

└애기갱얼지 똑부러지게 인사도 잘하고 뿌듯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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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준해 생일까지는 시일이 조금 남았고 준해 생일 컨텐츠는 공개되지 않았다.

컬러즈는 준해가 갑자기 리더 역할을 가져갔다는 소식을 듣고 영문도 모르고 귀여워했다.

‘멤버들은 또 벌점이 몇 점이나 추가되어서 올지…….’

LA에서 준해에게 간판을 읽어달라며 붙어 있던 멤버들의 모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땐 재민이 잠시 팀 미로 일정으로 자리를 비웠지만 이번에 준해는 재민을 포함한 네 명을 상대할 텐데.

해랑이 준해의 간신으로 진화했으니 힘든 일은 없으려나.

준해 리더의 임무도 착실히 수행한다는 흐뭇한 소식 외에도, 커뮤니티에서는 이런 글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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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윤환 모노크롬 전 멤버 아니었나?

가요차트 싱가포르 라인업에 둘 다 있네??ㄷㄷ

└작년에 최고팀메 시청률 부러웠나봄ㅎ

└근데 팀 나가고도 계속 교류하지 않나? 친한 것까진 모르겠는데

└팬들은 뭐 이상할 거 없다고 생각하는 중

└엥 그래? 좋게 나갔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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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의 정보에 빠삭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노크롬과 윤환이 오늘 공연에 같이 출연한다는 것을 특이하게 여겼다.

<최고의 팀메이트>에서 재민과 윤환이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쯤 나는 이런 글을 보면서 쓰린 위를 다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모노크롬과 윤환의 사이가 안 좋게 언급되는 일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사람들 반응은 걱정 없고, 다들 말한 대로 잘 놀고 오려나.’

나는 모노크롬과 윤환의 재회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모니터 화면에 집중했다.

***

<가요차트> 싱가포르 특집 공연이 끝나고 출연진들은 퇴근하여 각자 호텔로 흩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리허설을 하느라 피곤했던 윤환도 호텔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기대앉았다.

방에 혼자 있는 데다가 무대를 끝마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머릿속에는 금방 이런저런 잡념들이 들어찼다.

‘회사에 뭔가 일이 있었다는데.’

윤환과 함께 온 직원들은 ‘걱정할 것 없고 일단 무대에만 집중하면 된다’라면서 자세한 사항은 알려주지 않았다. ‘돌아가면 대충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라고도 했다.

최근 아이리스와 회사의 갈등이 있었던지라 윤환도 회사 분위기를 신경 쓰던 참이었다.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길래 내가 해외에 나와 있는 며칠 사이에 그 상황이 정리된다는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윤환의 머릿속에는 뉴마의 이사인 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가 아이리스의 싱글 제작을 맡았던 것, 그리고 주인과 모노크롬이 뉴레인으로 옮겨 오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윤환의 사고는 자력에 이끌리듯이 금세 모노크롬에게로 옮겨갔다.

‘모노크롬…….’

무대 순서는 다르지만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윤환은 무대 아래에서 모노크롬 멤버들을 마주쳤다.

서로 바쁘게 이동하던 참이라 아주 잠깐 시선만 교환하고 지나쳤지만.

모노크롬을 탈퇴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후회하는 것은 모두에게 실례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모노크롬, 지금의 채윤환으로 좋았다.

그런데도 역시 모노크롬을 보면 싱숭생숭한 기분이 먼저 올라왔다.

몸은 나른한데 정신이 말똥말똥해서 천장만 바라보며 생각을 이어나가고 있는데, 조용한 방에 초인종 소리가 흘렀다.

“누구세요?”

“택배인데요.”

일부러 낮게 깐 목소리.

누가 봐도 수상한 목소리였으나 이곳은 싱가포르고 이 호텔에서 한국말을 할 사람은 한정적이었다.

매니저 형이 장난을 치나 해서 문을 살짝 열었더니, 그곳에는 준해를 업은 재민이 서 있었다.

“형…….”

윤환은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다시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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