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62화 (362/430)

# 362화

뉴레인에도 당연히 대표실이 있었다.

대표가 해외로 나가기 전에도, 한국에 들어온 후에도 한 번도 출근하지 않았기에 내내 비어 있던 대표의 자리.

그 자리에 나는 당당히 앉았다.

“여기 앉으니까 진짜 대표가 된 기분이야.”

익숙한 공간이 편하리라고 생각한 것인지 뉴레인 대표실의 구조는 뉴마의 대표실과 비슷했다.

내가 플레이어일 적 대표실의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대표 자리에 앉은 신주인이란 점은 같으니까.

“최 비서는 이 구도가 익숙하겠네? 대표가 계속 이렇게 앉아 있었을 거 아냐.”

“이사님은 대표님과 분위기가 다르셔서요.”

최 비서는 예전에도 대표 이야기가 언뜻 나왔을 때 ‘많이 다르십니다.’라고 한 적이 있었다.

새로 부임한 이사가 대표인 걸 알아봤으면서 적응이 빨랐던 건 은연중에 나와 대표를 다르게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도 기왕 대표 자리에 앉았는데 대표 느낌이 나는 게 낫지 않나?’

허용석 실장은 대표와 같은 권력자 앞에선 약한 것 같으니까 말이야.

내가 게임을 플레이할 당시에 대표는 최 비서와만 소통했다고 하지만, 다른 직원들도 대표의 존재를 두루뭉술하게 기억하긴 했다.

지금의 나보다는 그때의 모습이 더 권력자에 어울리는 모습이 아닐까.

나는 예전 대표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무표정하게 모니터를 응시했다.

“내가 이렇게 표정 없이 앉아있으면? 약간 대표랑 비슷한가?”

“……역시 많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내가 바로 대표였는데 대표를 흉내 낼 수가 없다니.

최 비서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하는 표정으로 머쓱하게 웃었다.

나도 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위압감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서 뉴마를 휘어잡던 독재자의 그림자라도 빌려볼 참이었는데, 그다지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최 비서가 지금 대표를 보면 나랑 많이 다르다고는 못 할 것 같은데.’

최 비서도 플레이어의 분신이었던 대표만 많이 봐 왔지, 지금 대표는 못 봤잖아? 대표가 ‘기분 나빠’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나버렸으니.

지금의 대표는 플레이어의 자아를 버리기 시작했고 신주인화가 많이 진행된 상태다.

대표는 자신이 이 세계의 신주인이 되면 연예계와 상관없는 새 삶을 살 생각인 것 같지만, 이 좁은 세상에서 다시 볼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겠지.

재민은 대표를 보고 거리감을 느꼈지만, 최 비서라면 대표가 나와 비슷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대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최 비서는 가져온 서류들을 깔끔하게 책상 위에 올려놓고 물러섰다.

“그럼 전 대화 중엔 밖에서…….”

“아니. 여기 앉아 있어.”

평소에도 최 비서의 자리는 이사실의 앞.

누군가 대화를 하겠다고 찾아오면 내게 알려주거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이고 내가 따로 부른 게 아니면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최 비서가 같이 있는 게 나았다. 머릿수가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허 실장님이 최 비서의 자리를 부러워했던 것 같거든.”

“네……?”

“최 비서가 있으면 좀 더 눈치를 볼 것 같다는 이야기야.”

허 실장은 대표가 최 비서 대신 자기를 찾으니까 기세등등해진 것 같단 말이지.

호가호위라는 말이 딱 맞았다. 호랑이의 위세를 빌린 여우.

그러나 지금 호랑이의 위세는 내가 빌려왔으니 허 실장은 귀여운 동물 친구1에 불과하다.

대표 빽에 혈연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강력한데, 대표의 최측근이었던 최 비서까지 붙어 있으면 위축되겠지.

이것도 기선제압의 일환이었다. 그래야 나와 대표가 원하는 바를 관철하기가 쉬울 테니까.

‘아니, 대표는 허 실장을 자르려고 했으니까 대표가 원하던 상황이랑은 조금 다르지…….’

따지자면 내가 허 실장의 생명줄을 연장해주고 있는 거 아닌가.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자 곧이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지시한 대로 기획서를 들고 온 허용석 실장과 진명희 팀장은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 그러니까 방금 가져오신 위임장이라는 게…….”

“네. 지금 제가 대표 대리예요.”

허 실장을 오래 봐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본인이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건 알아챘겠지.

난 상대가 정신이 없을 때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실장님이 아이리스 전담팀을 이끄시겠다고요?”

“그게, 오래 맡아왔던 사람이 전체적인 지휘를 해 주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허 실장도 나름의 이유는 가지고 있었다. 뉴마에 있을 적부터 아티스트 기획 업무를 담당해 왔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해석에 따라 부정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뉴마에서 아티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팀은 매니지먼트팀과 프로듀스팀, 이렇게 두 개지.’

허용석 실장이 몸담았던 기획실을 빼놓은 이유는, 뉴마의 기획실은 ‘사업기획실’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아티스트의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가 아니라 ‘아티스트를 어떻게 세일즈할 것인가.’였다.

아티스트와 함께 대중에게 보여줄 모습을 고민하는 것은 프로듀스팀의 일.

반대로 기획실의 중점은 아티스트가 아니라 회사에 있다.

나는 허 실장에게 아주 중요한 질문을 건넸다.

“아이리스라는 그룹의 컨셉이 뭔지 아세요?”

“무지개 아닙니까……?”

이럴 줄 알았어. ‘신’은 어디다 빼먹은 거야?

‘무지개의 신’과 그냥 ‘무지개’는 매우 다르다. 뉴레인도 ‘아이돌 기획사’지, ‘아이돌’은 아니잖아?

무지개는 아이리스의 팬덤 이름인데 아이리스를 무지개라고 하면 안 되지.

“무지개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지개의 신. 신이 빠지면 반쪽짜리밖에 안 되거든요. 대표님도 아시는 사항을 기획실에서만 오해하고 있는데 아이리스 전담팀을 맡길 수 있겠어요?”

이런 기본적인 것부터 잘못 인지하고 있어서야.

진명희 팀장도 내 눈을 피하는 것을 보면 허 실장과 같은 답을 떠올렸던 모양이다.

“아이리스 전담팀을 만드는 건, 아이리스가 연차도 찼고 자리를 잡았으니까 앞으로는 그룹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예요. 사내 권력을 분산시키려는 게 아니라요. 실장님과 팀장님은 기획실을 오래 맡아오셨으니 계속 기획실에 집중해주셨으면 좋겠네요.”

내가 겸임에 회의적인 의견을 내놓자 반쪽짜리 정답밖에 꺼내지 못한 허 실장은 할 말이 없는지 어물어물했다.

내가 대표의 대리인이라서일까, ‘신주인 이사’를 대할 때와는 다르게 제대로 기를 못 펴는 모습이었다.

‘불복하거나 반항적으로 나오면 대표의 해고 의사를 전달해주려고 했는데…….’

그 강력한 패는 나중을 위해 킵해둬도 되겠어.

허 실장이 맞받아치지 않는다면 질책은 이쯤 해도 될 듯했다. 필요 이상으로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서 좋을 건 없으니까.

나는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돌아왔다.

“기획실을 무시하려는 게 아니에요. 아이리스 전담팀은 기획실에서 올린 최종 기획서를 따라서 구성할 생각이거든요. 다만 대표님이 보시기에도 납득할 만한 인선으로 잘 정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예, 알겠습니다.”

기획실의 의견을 따른다는 건 당근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획실이 나중에 딴말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책이었다.

또 이런 숟가락 얹는 기획서를 들고 오면 내가 오늘처럼 다시 찾아올 테니까.

결론적으로는 기획실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따르게 될 것이다.

협상보다는 통보에 가까운 대화를 마친 뒤, 나는 허 실장과 진 팀장을 보내고 다른 이들과도 차례차례로 면담에 나섰다.

미래의 전담팀 직원들, 그다음은 회사에 나와 있다는 아이리스.

“주인 님!”

‘주인 님’ 창시자 재민은 비행기를 타고 싱가포르로 향하는 중인데 여기에도 나를 주인 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옐로를 선두로 아이리스 멤버들이 대표실로 들어와 앉았다.

“노, 놀랐어요. 갑자기 이사님이 오셨다고 해서. 그것도 여기…….”

레드가 처음 들어와 보는 대표실의 광경을 눈으로 훑었다.

“대표님이 보내셨거든. 괜히 쓸데없는 권력 싸움으로 시간 낭비하는 건 싫다고 하시면서.”

반쯤은 내 자의로 온 거지만.

내 말을 들은 레드가 옆에 앉은 오렌지를 보며 눈으로 웃었다. 뭔가 둘이서 미리 얘기한 게 있었던 모양이다.

“너희를 불러온 건…… 대표님이 너희를 신경 쓴다는 걸 보여주려고. 그러니까 잠깐 얘기나 나누고 있자. 우리가 대화를 오래 할수록 직원들은 너희 눈치를 볼걸.”

내가 아이리스를 불러온 용건을 말하자 아이리스 멤버들은 일말의 긴장을 풀고 편한 표정이 되었다.

싱글 프로젝트를 함께한 덕분에 아이리스는 내 앞에서 편한 모습도 보일 줄 알았다.

“그럼 모인 김에 정규 앨범 컨셉 회의라도 할까? 나중에 정식으로 다시 하게 되겠지만. 대표님이랑 얘기해서 조금 정리해온 게 있거든.”

“정말요?!”

이 말에 아이리스 덕후 그린이 눈을 반짝였다.

알기 쉬운 그 모습에 멤버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

아이리스와 즐거운 대화를 마치고 그다음으로 내가 불러온 것은 보현이었다.

아이리스는 마침 우연히 회사에 있어서 불러온 것이었지만, 후배 신인 그룹은 데뷔 준비로 회사에 상주해 있었기에 찾기가 쉬웠다.

“안녕하세요!”

“응. 네가 데뷔조 리더 됐다면서? 얼마 전에 전해 들었어.”

“네!”

모노크롬과 아이리스는 연장자인 우형과 레드가 자연스레 리더를 맡았다.

그러나 보현은 연장자 라인이 아니었다.

“저는 형들 중 한 명이 맡을 줄 알았는데. 다들 제가 잘할 것 같다고 추천해 주더라고요.”

“으응. 내가 봐도 네가 잘할 것 같긴 해.”

데뷔조 멤버들이 보현을 리더로 추천한 이유를 왠지 알 것 같았다.

서바이벌 프로그램 촬영 때, 에이펙트 연습생들이 보현을 또라이 같다고 표현한 것이 기억났다.

‘남들은 상대하기 힘든 사람이 같은 편이면 그 누구보다 든든하지.’

일개 멤버가 또라이다? ‘너희도 힘들겠다.’라는 시선을 받을 게 뻔했다.

그런데 리더가 또라이? ‘저 그룹은 건들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겠지.

그런 점에선 보현만 한 인재가 없었다.

뉴마의 배우 지망생으로 있다가 자진해서 뉴레인으로 넘어왔고, 내정으로 떨어질 뻔했는데 위기를 딛고 리더 자리까지 꿰차다니, 그야말로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아이리스의 일로 온 내가 보현까지 불러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아이리스 전담팀을 만드느라 잠깐 회사가 어수선할 예정이거든. 그런데 빠르게 정리할 거니까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려고. 전담팀 구성이 끝나면 이제 다른 직원들이 너희한테 집중할 테니까 불편하진 않을 거야.”

“넵!”

“그리고 혹시라도, 뭔가 부당한 이야기를 듣거나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일러. 아니면 대표님이랑 상의해본다고 해. 대표님이 시키셨다고.”

“정말로 이르나요?”

“응. 만일 나나 대표님한테 말하기 곤란한 상황이면 선배들 전담팀에 도움을 구해도 돼. 미리 말해둘 테니까.”

신인 그룹이 데뷔한 후에는 나와 대표가 어떤 상황일지 모르니 그것까지 생각해 둬야지.

이렇게 말해두면 보현이라면 알아서 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정도면 일차적인 뉴레인 교통정리는 끝났겠지.’

이다음은 뭔가 다른 일이 생기면 생각하도록 하자.

나는 긴 면담을 마치고 다시 뉴마의 이사실로 돌아왔다.

‘대표실에서 권력을 맛보는 것도 좋긴 한데 역시 익숙한 공간이 편하네.’

오늘의 정신력은 다 소진해서 뭔가를 더 하고 싶지가 않았다.

나는 영혼 없는 표정으로 마우스를 딸깍거리다가 퇴근 시간이 되어 빠르게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대표가 또 들어와 있었다.

오늘 뉴레인을 뒤엎으러 간다고 했으니까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했겠지.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려는데, 업무용 태블릿에서 메일 도착 알림음이 들려왔다.

‘아티스트팀은 다 퇴근시켰는데 누가 이 시간까지 일하는 거야?’

야근이야 엔터사에서는 흔한 일이긴 하지만.

모노크롬과 함께 출장을 간 직원들이라면 메일이 아니라 메신저로 연락할 테니 그들은 아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태블릿을 확인했다가 놀랐다.

“……뭐야? 갑자기 흠잡을 데 없는 기획서를 만들어놨네.”

“내가 그랬잖아. 말 잘 듣는다고.”

기획실이 말을 잘 듣는다던 대표의 말은, 기획실의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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