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6화
은퇴했던 멤버가 다시 TV에 나올 마음을 먹었다. 연예인으로 복귀한 것은 아니지만, 아예 연예계와 척진 것도 아니었다.
‘졸업하고 한참 지나서 학교에 관해선 잊고 있다가도 동창회 연락이 오면 ‘가 볼까?’ 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더군다나 꼭 와줬으면 좋겠다면서 기다리는 친구가 있으면 만나고 싶지 않을까.
우형의 말대로, 팬들에게 이터널의 모습을 다시 보여주기에는 지금만큼 좋은 타이밍이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는 하지. 당사자들한테 그럴 생각이 있어야 한다는 게 전제가 되겠지만.”
“네. 당연히 선배님들 의견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이터널의 일로 우형이 이렇게 고민한다는 건…….
“이터널이 새로 노래를 내는 걸 생각하는 거야?”
“네. 그런데 지금 활동하시는 선배님들은 배우 활동 위주로 하시고 소속사에서도 따로 음원을 내지는 않는 것 같아서, 만일 곡이 필요하시다면…….”
필요하다면 우형이 프로듀서로서 힘을 보태고 싶다는 소리였다.
아이돌 그룹인 이터널이 다시 모인다면, 아이돌의 모습이 가장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는 나도 동의했다.
당연히 문제를 일으킨 한 명은 빠지겠지만, 예전과 같은 모습에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팬들과 만나는 게 가장 진심이 잘 전달될 듯했다.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한 곡이라…….’
우형이 <기다림의 끝>을 만들었을 때, 비슷한 기분이지 않았을까.
<기다림의 끝>도 이별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했지만 차마 붙잡을 수 없는, 팬들을 향한 자신들의 마음을 담은 곡이었다.
엔피버에게 라는 곡을 선물한 것도 노래로 팬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를 바라서였고.
‘가수는 노래로 말을 한다고들 하지.’
우형은 특히나 곡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을 선호했다.
지금 이런 말을 꺼내는 것도 굉장히 우형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는 눈을 반짝이며 말하던 우형은 갑자기 자신감 없는 얼굴로 바뀌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제가 너무 자만한 걸까 봐……. 애들이 프로듀싱 앨범에 흔쾌히 참여해 주니까 성과에 취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어요.”
계속 고민했던 건 이런 마음 때문이었던 듯하다.
우형의 이렇게 자신감 없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터널이 아니니까 뭐라고 확답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프로듀싱 앨범보다 더 어려울 수도, 더 쉬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일단 방송한 후에 반응이 어떤지 보자. 그때가 되면 팬분들 마음이 어떤지 알 수 있겠지.”
“네. 저도 지금 뭔가를 진행하기엔 너무 섣부르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럼 방송 나올 때까지는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책상 위에 있던 페트병을 몇 개 집어 들었다.
걱정이 많아서 페트병이 쌓였다면, 페트병을 치우면 걱정도 줄어들까 하고.
“앗. 이건 제가 치울게요.”
“나가는 김에 버려주려고 했는데. 그럼 나머지도 마저 들고 나와.”
우형은 머쓱하게 웃으며 나머지 페트병을 들고 따라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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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상상 카페 게스트 누구지?
예고에 나온 거 아이돌인 것 같은데 얼굴을 안 보여주네
└언뜻 얘기 나온 시기로 추정해보자면 한 10년 전 아이돌 같은데
└하씨 내 구오빠일까 봐 지금 심장 떨린다
└지금 반응 보면 이터널이 가장 유력한듯
└설마 도박도박?
└박도박 나와서 무슨 얘기 할 건데ㅋㅋㅋㅋㅋ 도박에 손을 대지 않은 상상?
└ㅋㅋㅋㅋㅋㅋㅋ개웃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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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카페>의 다음 화 예고 영상에선 궁금증을 유발하기 위함인지 정이혁의 뒷모습만 나왔다.
그러나 팬들은 얼굴을 보지 않아도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알아보는 능력을 지녔다.
손만 보고, 발목만 보고, 실루엣만 보고, 혹은 그냥 심장이 반응한다면서.
‘그런 사람들에게 목소리로 알아보는 건 식은 죽 먹기겠지.’
정이혁의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를 수백 수천 번이나 들었을 텐데.
영원이란 뜻의 이터널. 그리고 그들의 팬덤 이름은 항상이라는 뜻을 지닌 ‘에버’였다.
에버들은 아주 잠깐 나온 정이혁의 목소리를 듣고 우르르 커뮤니티로 쏟아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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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혁이 목소리 아니야??
저음이나 말투가 너무 내가 아는 사람인데??
└맞는듯 지금 에버들 동시에 다 뛰쳐나옴
└ㅋㅋㅋㅋ큐ㅠㅠㅠ에버들 다 잘 살고있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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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의외의 출연이었고,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에 긴가민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지만 기억은 쉽사리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다.
‘우형이가 했던 말이 정말인가 봐.’
팬들의 반응을 보니 정이혁이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다’라고 한 게 무슨 뜻이었는지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상황 때문에 강제로 헤어진 탓에 팬들은 마음 한구석에 남은 애틋함을 차마 정리하지 못하고 계속 품고 있었다.
‘다들 정이혁 씨가 다시 TV에 얼굴을 비치는 걸 열렬하게 환영하는 것 같은데, 우형이가 한 말도 정말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다음 날, 모노크롬의 연습실로 찾아가 보니 우형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팬분들 반응을 보셨을 것 같아서 슬쩍 말씀드려 봤는데……. <상상 카페>에 출연하기를 결정했을 때부터 마음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하시네요…….”
“촬영 때도 작별 인사라고 하셨으니까…….”
옆에서 해랑도 어쩔 수 없지만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멤버들도 에버는 아니지만 후배로서 이터널을 좋게 기억하고 있었다.
“나도 좀 기대했는데. 선배님 마음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
“선배님 한 분은 해외에 계시니까 모이려면 부담스러우실 수는 있겠다.”
한마디씩 아쉬움을 표출하는 멤버들 옆에서 재민이 “영수증에 7을 두세 개 더 붙일 걸 그랬나 봐.” 하며 농담을 했다.
우형과 비슷한 표정이던 준해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상상 값 갚으라고 다시 모여달라고 하면 우리가 너무 빚쟁이 같잖아.”
“그만큼 아쉽단 거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싶어 하는 정이혁의 마음도, 아쉬워하는 멤버들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멤버들 표정을 보니까 나도 괜히 더 아쉽네…….’
커뮤 중독인 탓에 지난밤엔 에버들의 반응을 많이 봤단 말이야.
만일 이터널이 다시 모인다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좋아할까 상상했는데.
자기들이 모르는 새에 이터널 모임이 무산된 것을 모르는 에버들은 한껏 기대하며 <상상 카페> 본방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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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진짜 이혁이다
얼굴 왜 예전 그대로야ㅠㅠㅠ나이는 나만 먹었어..
└문 열고 들어오는데 내 머릿속에서 그대로 꺼내온 줄 알았잖어ㅠㅠ
└이터널 해체할 때 중학생이었는데 직장인이 돼서 다시 보네 세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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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반응들…… 기시감이 들어.’
몇 년 만에 재민을 본 컬러즈의 반응이 이랬던 것 같은데.
나는 촬영일에 편집되지 않은 전체 대화를 전부 들었기에 TV 화면보다는 커뮤니티 반응 위주로 모니터링했다.
이터널이 활동할 당시에 에버였던 사람들, 그리고 에버까지는 아니어도 이터널의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다들 각자의 추억을 꺼냈다.
‘누굴 좋아해 본 경험이 있는 팬이라면 이런 이야기에 약할 수밖에 없지.’
과거의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나왔다는데 어떻게 이입이 안 되겠어.
정이혁의 이야기를 듣는 모노크롬을 보며 컬러즈도 남몰래 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방송이 끝난 후에도 여운은 꽤 오래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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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팬은 아니고 해체한 돌덕인데
오늘 상상카페 보니까 생각이 많아지더라
여기 올라오는 글들도 다 공감되고.. 걍 다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하..
└나도ㅠㅠ 그때 행복했던만큼 그냥 행복하게 살면 그걸로 됐다
└정이혁도 잘살고 있다니까 괜히 내가 다 안심되네. 큰맘 먹고 나와줘서 고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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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예전과 같은 아이돌과 팬의 관계는 아니지만, 예전에 좋아했던 연예인이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을 보고 불만스러울 리는 없었다.
정이혁이 방송에 나오는 것을 알고 있던 이터널의 다른 멤버도 SNS에 ‘우리가 하고 싶었던 말을 이혁이가 대표로 해 줘서 고맙다.’라는 글을 올리며 팬들을 다시 한번 울렸다.
이렇게 이터널 멤버와 에버의 재회가 아련하게 마무리되려는데.
상황을 반전시킨 것은 의외로 모두의 안중에 없던 박도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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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
작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리기에 뒤돌아보니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에 도아가 서 있었다.
“도아 씨, 무슨 일이에요?”
“혹시 바쁘세요? 전달 드릴 말이 있어서요.”
지금 배우팀과 아티스트팀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아는 도아는 주변을 살폈다.
스릴러 연기 경험이 풍부한 그녀가 스파이처럼 지령을 전달하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덩달아 긴장했다.
“배, 배우팀에서 뭔가 사고라도 쳤어요?”
“아니요. 회사 얘기가 아니라, 제 동기가 ‘매니지먼트 연’에 있는데요.”
“매니지먼트 연……?”
아이돌 소속사라면 ‘무슨무슨 엔터테인먼트’인 경우가 많고, ‘매니지먼트 뭐뭐’라면 배우 전문 소속사일 확률이 높다.
도아의 동기라면 아마 연기 관련 학과 동기일 테니 배우일 거고.
‘한이랑 관련된 이야기인가?’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예상 밖의 이름이었다.
“의준 씨가 소속된 회사거든요. 이터널의 의준 씨요.”
“……아! 그런데 도아 씨가 왜 그 얘기를……?”
모노크롬 영상을 재밌게 시청하던 것 같은데. 혹시 예전에 이터널의 팬, 에버였던 걸까?
옆으로 튀어 나가는 내 생각을 붙잡듯이 도아는 빠르게 말을 이어나갔다.
“의준 씨가 뉴마 아티스트팀과 잠깐 대화를 나누고 싶대요. 공식적인 일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다고 해서 건너 건너 뉴마 소속인 저한테까지 연락이 닿아서요.”
“으음……. 그러면 이 번호 전달 부탁드릴게요.”
나는 파우치에서 명함을 꺼내 도아에게 건넸다.
비밀 임무를 마친 첩보 요원 도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시크하게 복도로 걸어 나갔다.
굳이 배우팀 직원들을 통하지 않게 하려는 그녀의 배려가 고마웠다.
‘근데 갑자기 왜 우리를 찾지?’
이터널 멤버들끼리 이야기하고 다시 모이지는 않기로 결론을 낸 것 같은데.
그리고 정이혁이 이미 우형의 번호를 알고 있다. 아티스트팀의 연락처를 찾는다는 건 그와는 상의되지 않은 일인 듯했다.
정이혁이 나온 <상상 카페> 회차가 방송된 후로 며칠이 지났는데 혹시 그사이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나는 소식 습득이 빠른 윤희를 찾았다.
“윤희 씨, 최근에 이터널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이터널이요? 아, 그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거요?”
윤희는 태블릿으로 바로 무언가를 찾아 내게 보여줬다.
화면에 떠 있는 것은 한 SNS 페이지. 흑백 풍경 사진 아래 적힌 멘트가 눈에 들어왔다.
[젊은 날의 우리는 많이 빛났고 많이 아팠지. 이제는 모두 어른이 되었네.]
이 글을 올린 이는 소문의 박도박이었다.
‘뭐야, 이 새벽 감성 충만한 글은.’
올린 시간도 마침 새벽 5시였다.
‘우리’라고 칭하는 게 누구일지는 뻔했다. 이터널을 말하는 거겠지.
“어제 올라왔는데, 이것 때문에 다시 모였던 에버들이 한바탕 뒤집혔어요.”
그녀의 말대로 박도박을 검색해보니 분노에 찬 글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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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박도박에게 필요한 사자성어=낄끼빠빠
└분위기 좋은데 찬물을 확 끼얹어버리네
└아픈 젊은날 만든 거 누구? 도박도박
└님은 빛난 게 아니고 빚난 거 아니에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진 올려놓은 거 보니까 지금 잘 사나 보네ㅎ.. 나는 피눈물을 흘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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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에 빠져있던 에버들은 해체의 원흉이 은근슬쩍 숟가락을 들이밀자 분개했다.
나도 황당했으나 곧바로 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박도박은…… 이터널을 탈퇴한 적이 없어.’
이터널은 5명인 상태에서 해체하게 되었다. 마지막까지 박도박이 함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렇게 슬쩍 끼어들 여지가 남아 있었다.
“어? 두목님.”
윤희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우형과 한이가 같이 사무실 층으로 올라왔다.
“왜?”
“저, 상현 선배가 친구한테 연락받았다고…….”
“너도 의준 씨 일로?”
“네. 어떻게 아세요?”
한이는 말을 꺼내려는데 내가 본론을 먼저 알아채자 화들짝 놀랐다.
의준이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뉴마 아티스트팀에 접촉하려 하고 있었다.
박도박의 행태를 보고 심경이 바뀐 것이 틀림없었다.
한이를 뒤따라왔던 우형이 내게 똑바로 시선을 보내왔다.
“의준 선배님이랑 만나신다면 저도 같이 만나도 괜찮을까요?”
우형의 프로듀서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