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게스트로 나온 정이혁은 자신이 생각하던 바를 담담하게 말했다.
“그땐 갑작스러워서 상황에 휩쓸리는 느낌으로 해체를 맞게 됐는데, 지금은 저도 나이를 더 먹었고 일상이 안정되니까 예전 일을 되돌아볼 시간이 많아지더라고요.”
아이돌로 한창 활동할 땐 주변을 둘러보거나 인생에 관해 생각할 시간이 많이 없었겠지.
게다가 그는 아직도 30대 초반이다. 7년 전이라고 해봤자 고작 20대 중반. 남들 같았으면 아직 학생일 수도 있는 나이였다.
아이돌로서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지만, 그룹의 해체라는 큰 변화를 맞닥뜨리고도 의연하게 마음의 정리를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배명희나 모노크롬 멤버들처럼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당시에는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서, 제 일상을 되돌리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팬분들께는 제가 너무 매정하게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상상 카페>의 기본 주제는 현재와는 다른 삶이나 상황을 상상해보자는 것.
정이혁은 ‘조금 더 어른스럽게 마지막을 맞이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메인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정이혁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멤버들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아마 이야기를 들으면서 계속 모노크롬을 생각했을 거야.’
배명희나 천상식과도 은퇴에 관한 대화를 나눴지만, 보이그룹 선배는 모노크롬이 걷는 길을 앞서서 걸어간 사람. 훨씬 더 이입되는 대상이었다.
정이혁은 동료들과 팬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 지금의 안정된 일상에서도 만족을 얻고 있다는 이야기, 분위기 전환으로 멤버들이 제조한 상상 카페의 메뉴에 대한 감상 등을 말하며 대화를 나눴다.
“나도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런 방향으로 생각할 기회를 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배명희도 방송계에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것은 비슷했다.
물론 배명희가 폐를 다쳐 가수 활동을 쉴 수밖에 없었던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지만.
그러나 이들은 혼자 음악을 즐기고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대중가수였다.
대중의 응원과 관심을 받아 활동했으니, 응원해 준 팬들에게 제대로 인사하는 게 좋다는 생각에는 배명희도 동의했다.
“이렇게 다시 나와준 것만으로도 팬분들은 고맙게 느끼지 않을까요. 계속 좋은 마음으로 떠올려 줬다는 거니까.”
팬이 아닌 사람이 팬들의 마음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나도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명희는 ‘그러니 과거에 크게 부채감을 가지지 말았으면 좋겠다.’라는 말로 토크를 마무리했다.
“그러면 계산을…….”
카운터에 선 멤버들은 고민에 빠졌다.
상상 카페는 상상 값을 앞으로의 활동으로 갚아나가야 하는데.
이 방송 출연으로도 그가 상상하던 ‘어른스러운 작별 인사’는 어느 정도 이뤘으니 값을 받지 말아야 하나?
그런 생각으로 토론을 나누다가, 준해가 화면의 숫자를 찍었다.
“그러면…… 앞으로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시라는 의미로.”
곧이어 정이혁은 행운의 77,777원이 찍힌 영수증을 받고 웃었다.
“차분차만 세 잔 정도 마신 것 같은데.”
“그건 서비스예요.”
차분차 제조 담당 재민은 본인의 메뉴가 잘나가서 뿌듯한 표정이었다.
“그럼, 오늘은 감사했습니다.”
“상상이 필요하시면 또 오세요.”
정이혁은 아이돌로 활동할 당시의 모습이 떠오를 정도로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상상 카페의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카메라가 꺼졌으니 마이크도 빼고 인사도 나눠야 하니까.
“수고하셨습니다.”
“오늘 정말 <상상 카페>에 맞는 이야기를 해 주신 것 같아서 감사해요.”
“그런가요?”
작가의 말에 정이혁은 가볍게 대답했다.
하지만 이건 으레 예의상 하는 빈말이 아니었다.
“저희 첫 게스트가 천상식 선생님이셨거든요.”
“아…….”
정이혁이 방금도 밟고 왔던 땅이 바로 천상식 때문에 소금 간이 된 땅이었지.
그도 오랜만에 나오는 방송이라 미리 첫 화를 시청하고 온 모양이었다.
작가의 말대로 첫 촬영보다는 이번 촬영이 훨씬 <상상 카페>란 방송에 잘 어울리는 내용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 웃겨서 듣고 있는데 내 옆으로 임주미 PD가 다가왔다.
“오늘은 호스트로 모노크롬분들이 계셔서 다행이었어요. 아이돌을 잘 모르는 분들이 앉아 있으면 ‘아, 그래요……?’ 같은 표정밖에 안 나오거든요. 섭외한 보람이 있네요.”
웬일로 좋은 말을 하지?
의심스러웠지만 오는 말이 고우면 가는 말도 고와야 하는 법.
나도 의외라고 느꼈던 점을 그녀에게 말했다.
“어떤 그림을 그리고 정이혁 씨를 섭외하셨나 했는데, 이런 촬영 내용을 기대하셨다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네요. 정말 이 방송에서만 나눌 수 있는 대화 같았어요.”
그녀도 역시나 공중파 방송국의 PD였다.
‘이런 사람이 과연 힐링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던 걸까.
내 칭찬을 듣고 임주미 PD는 씨익 웃었다.
“그렇죠? 제 기획에 의심을 가지시는 것 같아서.”
……내가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느껴졌나.
그래서 의심을 풀라고 굳이 옆으로 와서 이런 말을 한 모양이었다.
“의심은 아니고…… 미지에 대한 경계? 같은 거죠.”
“미지라……. 잘 모른다는 건 더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가 선보는 사이도 아니고 더 알아갈 필요가 있나?
내가 애매하게 웃어 보이자 임주미 PD도 날 더 붙잡을 생각은 없는지 촬영장 정리를 하러 떠났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다가, 시야 한구석에 우형이 주뼛거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시선이 정이혁을 향했다가, 바닥으로 옮겨가기를 반복하는데……. 정이혁에게 말을 붙이고 싶은 걸까?
혼자서는 결단이 안 서는 것 같아서 나는 우형에게 다가갔다.
“정이혁 씨한테 할 말 있어?”
“아, 그게, 번호…… 달라고 부탁드리면 혹시 실례일까요?”
이런 부탁을 해도 될지 고민이 되었던 모양이다.
매니저가 있으면 매니저에게 물어보면 되는데, 정이혁은 지금 연예인이 아니라서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봐야 했다.
“민형 씨한테 한번 조심스럽게 물어봐달라고 할까? 아니, 내가 직접 여쭤보는 게 낫겠다.”
은퇴했다고는 해도 선배인데.
우형도 그래서 아이돌 선배이자 인생 선배인 그에게 번호를 받고 싶어 하는 것 같고.
매니저를 보내는 것보다는 회사의 높은 사람이 물어보는 게 더 낫겠지.
내가 가방을 뒤적여 명함을 찾고 있으니 우형이 작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냥 여쭤봐도 될지 고민돼서 그런 거였어요. 이사님이 가실 거라면 제가 직접 여쭤볼게요.”
남이 갈 거라면 직접 가도 되겠다는 용기를 얻었는지 우형은 작가와 대화를 마친 정이혁에게 다가갔다.
대화를 몇 마디 나누다가 둘 다 스마트폰을 드는 것을 보니 번호 교환은 잘 성사된 듯했다.
***
<상상 카페>를 촬영하고 온 날부터 우형은 생각에 빠진 얼굴일 때가 많았다.
‘다른 보이그룹이 해체한 이야기를 들어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나?’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시간이 지나니 평소대로 돌아왔다. 우형만 아직도 이 상태였다.
리더여서 더욱 책임감을 느꼈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프로듀싱 앨범 작업은 잘 되어가?”
여러 아이돌과의 콜라보 작업. 신경 쓸 부분이 많을 듯하여 나도 상황을 자주 체크하고 있다.
오늘도 작업실에 틀어박힌 우형에게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녹음도 차례대로 진행 중이고 생각했던 일정보다 빨리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다행이네.”
그럼 프로듀싱 앨범 작업이 막혀서 머리를 싸매고 있는 건 아닐 테고.
하지만 우형에게 고민거리가 생긴 것은 확실했다.
‘그 증거가 저 페트병 수.’
작업실 책상 구석에 작은 페트병이 몇 개나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
윤희가 예전에 지나가듯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우형이가 생각이 많아지면 책상 위에 있는 페트병 수도 같이 늘어나더라고요?]
그 이후로 관찰해보니 정말 그랬다.
작업실에 있는 시간이 같더라도 평소엔 책상을 매번 치우고 나오는데, 타이틀곡을 작업할 땐 곡이 나올 때까지 페트병이 늘어선 경우가 많았다.
아마 평소에는 작업을 마치고 후련한 기분으로 주변을 깔끔하게 치우는 듯했다.
그와 반대로 지금은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뇌 활성화를 위해 수분 보충을 한다는 거니까 건강한 습관이지만.’
추측만 해 봤자 우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낼 수는 없으니 나는 직구로 물어보기로 했다.
“요즘 고민 있어?”
“네? 아뇨…….”
아니라고 하면서도 찔린다는 듯 눈이 조금 커진 걸 보니 뭔가 있긴 한 것 같은데.
내가 계속 우형에게 시선을 보내자 우형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입을 열었다.
“저, 이혁 선배님 얘기를 듣고 계속 생각해 봤는데…….”
역시 <상상 카페> 촬영 때문이었군.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계속 생각에 빠져 있었던 걸까.
내가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리자 우형은 뭔가 결심했다는 것처럼 속내를 털어놓았다.
“만일 팬분들이 아직도 기다려 주신다면 말이에요.”
“이터널 팬분들?”
“네.”
7년 전에 응원하는 그룹을 잃은 이터널의 팬들이, 이터널을 계속 기다린다?
나는 얼마 전에 본 커뮤니티 글을 떠올렸다. 그 글에도 이터널의 팬이었던 사람들이 댓글을 달았었지.
그들은 이제 이터널을 ‘구오빠들’이라고 칭했지만, 당시의 즐거웠던 추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듯 보였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예전과 아주 같은 마음이기는 어렵겠지만.’
다시 나와준다면 오히려 더 애틋한 마음으로 반겨줄 수도 있지 않을까.
재민이 정이혁에게 차분차를 대접하며 했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반갑게 맞아줬다고.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떠올랐다고.
“모노크롬이 만일 뿔뿔이 흩어졌으면 지금쯤 어땠을까, 계속 생각을 해 봤거든요. 물론 저희와 선배님들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지만, 선배님도 7년이나 지나서 팬분들께 인사하려고 찾아오신 거잖아요.”
“그렇지. 그만큼 그룹에 애정이 있었다는 뜻이고.”
“네. 저희도 그런 마음으로 헤어졌다면…… 오래 걸리더라도 언제든 다시 한번 모였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요. 어떤 형태로든.”
이제 우형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이터널도 다시 모일 수 있다는 거지? 그룹으로.”
“네. 재결성이나, 그런 거창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고…… 이혁 선배가 제대로 인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분들도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해서요.”
이터널은 5인조였다. 박도박 씨를 빼면 네 명.
그중 두 명이 연예계에 남았는데 현재 한 명은 배우, 한 명은 뮤지컬 배우였다.
그리고 정이혁을 제외한 나머지 한 명은 연예계에서 조금 더 활동하다가 현재는 해외에 있는 본가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우형은 중요한 이야기를 하듯이 상체를 조금 내밀고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만일 다시 모인다면…… 지금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