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7화
항체 보유자인 이담이 무사히 대피소에 도착한 덕분에 인류는 좀비 바이러스의 치료제를 개발했고, 평화를 되돌릴 수 있었다.
치료제는 항체 보유자의 피……를 닮은 빨간색 비타민 음료였다.
약국에서 파는 앰플만 한 작은 병에 담기니 치료제보다는 포션을 닮았다.
이제는 생존자 다섯 명이 좀비가 된 다섯 명에게 치료제를 먹이기 위해 다시 대피소를 나가는 에필로그가 남아 있었다.
“류현아!”
재민은 완성된 치료제를 받자마자 서둘러 뛰어나갔다.
바로 몇 분 전에 헤어진 사이였지만,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가족과 재회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류현은 머쓱한 얼굴로 걸어왔다.
“저 아까 너무 오버하지 않았나요……?”
류현은 아포칼립스 상황에 몰입하여 무의식적으로 몸을 날려 희생했으나, 재민과 이담이 떠난 후 좀비들과 남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좀비 배우들과.
죽을 각오를 하고 호랑이 굴에 들어갔는데 그 호랑이가 손님이라며 차를 대접해주는 상황.
의외로 친절한 좀비 배우들과 대화하다 보니 류현은 몰입 상태에서 벗어나 빠르게 현실 감각을 되찾았고, 뒤늦게 민망함이 올라왔다.
그러나 재민은 진심이 담긴 표정으로 류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아냐. 너 진짜 멋있었어.”
대본을 짠 것도 아닌데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해 움직였다.
재민이 기대하던 좀비 서바이벌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재민은 오늘 촬영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옆에서 이담도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하며 그의 활약을 칭찬했다.
‘정말로 나 좀 괜찮았나?’
이렇게 두 사람이 칭찬해주니 류현도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소속사에서도 꼭 배우로서 연기하지 않더라도 다양한 상황에 필요하다면서 연기를 가르쳐주기도 했으니, 이런 컨텐츠에 배우처럼 몰입한 것도 나쁘지는 않은 듯했다.
의리 넘치는 세 사람과 다르게, 배신자 클럽은 에필로그조차 예능이었다.
“자, 치료제.”
“안 마셔.”
비뚤어진 하범이 거부하자 해랑은 또 총을 꺼내 들었다.
“아! 쏘지 마. 따가운 것도 아니고 툭툭 날라와서 맞으면 뭔가 힘 빠져.”
“치료제 마시면 인간 되니까 못 쏘잖아.”
“아니, 총알을 왜 나한테 소진하냐고-.”
오늘 준비된 총은 안전을 위해 발사력을 약하게 개조한 것이었다.
매가리 없이 발사되는 총에, 종이로 만든 듯한 매가리 없는 총알.
하범은 좀비가 총을 맞고 5초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이런 맥 빠지는 공격을 받은 게 어이가 없어서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결국 해랑은 하범이 총에 맞고 5초간 행동불능이 된 사이에 그에게 치료제 포션을 먹였다.
같이 배신도 하고, 버리고 가고, 동료를 인질로 끌어들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치료제를 들고 친구를 구하러 온 평화로운 엔딩이었다.
반대로 평화롭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내가 이 치료제를 주면 너희는 뭘 줄래.”
“형 진짜 쪼잔하다. 저 그냥 인간 안 될래요.”
준해가 우형의 딜을 거부했다.
그 옆에서 도한에게 귓속말로 뭔가 작전을 전해 들은 한이가 씩 웃으며 우형을 붙잡았다.
“형 30분 무적 풀리면 다시 좀비 되는 거 아니야? 형은 우리랑 같이 좀비 엔딩이야.”
“아! 지금 누가 때렸냐. 악!”
세 명이 우형을 둘러싸고 인디언밥을 하듯이 신나게 등을 마구 두드렸다.
힘으로 치료제를 얻어낸 준해는 ‘다 같이 좀비’ 엔딩보다 더 비극적인 ‘우형만 좀비’ 엔딩을 제시했다.
“형만 좀비 만든 후에 우리는 빠르게 치료제 마시고 대피소로 들어가자.”
“야, 종훈아! 얘들 좀……!”
“저도 좀비는 되기 싫어서. 먼저 가 볼게요!”
우형과 함께 나왔던 종훈은 아까부터 거리를 두고 서 있더니, 덩달아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도망가 버렸다.
오늘 컨텐츠의 마지막 배신이었다.
***
스태프들은 간이로 세운 그물 울타리와 소품들을 빠르게 정리해나갔다.
상황실에서 나오니 대피소에 있던 오늘의 출연진들이 다들 각기 다른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우형이는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애들이 대피소 안 들여보내 준다고 막아서 씨름하느라요…….”
“그러니까 마음을 곱게 써야지.”
우형을 막은 장본인인 한이가 그의 등을 툭툭 쳤다.
결국 우형은 치료제로 거래를 요구한 죄로 대피소 바로 앞에서 마지막 좀비가 되었다.
좀비의 옆구리에 붙어야 할 빨간색 스티커가 티셔츠 이곳저곳과 정수리에 붙어 있었다.
“너희 다 두고 봐.”
“헉. 형 작년 일도 기억하던데.”
작년에 우형을 물에 던졌다가 오늘도 배신자 캐릭터로 몰린 종훈이 소름이 돋는다는 듯 팔을 감싸 안았다.
오늘 일로 우형의 뒤끝이 향후 2년은 발동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무사히 인간으로 복귀한 출연자들을 보고 있는데 류현과 눈이 마주쳤다.
멋진 연출을 보여준 류현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흠칫하며 고개를 꾸벅하고는 재민의 뒤로 숨었다.
내가 류현에게 뭔가 무서운 짓을 한 기억은 없는데 날 볼 때마다 항상 저렇게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예전에 뒷말하다 걸린 것 때문에 그런가?’
상당히 오래전 일인데. 게다가 그런 것치고는 도한과는 편하게 잘 대화하는 듯했다.
그냥 회사의 높은 사람이라 불편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넘어가기로 했다.
그리고 내 마음속 MVP인 해랑은 하범과 어깨동무를 하며 걸어왔다. 다행히도 하범은 뒤끝이 없는 듯했다.
하범도 SPID 완전체로 유아이TV의 컨텐츠에 출연한 적이 있어서 작가를 바로 알아보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나중에 이거 2편 하면 안 돼요? 백해랑이 악마인 설정으로.”
“그럴까요? 사제와 악마의 대립 같은 거 팬분들이 좋아하실 것 같은데.”
예전에 준해가 우형을 보고 마음속에 악마가 산다고 한 적이 있는데. 2대 악마의 탄생인가.
아이와 동물에게 잘 통하지 않는 매력도가 제법 악마와 잘 어울리긴 했다. 악마는 인간이 매혹될 만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설정도 많이 쓰이니까.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정화 능력이 탁월하지 않나?’
컬러즈의 심신을 안정시키고 혈압을 낮춰주는 등 한약재나 아로마 향 같은 효과가 있는데.
아무튼 오늘은 해랑의 색다른 면모를 발굴해낼 수 있어서 굉장히 좋은 시간이 되었다.
‘예능 레벨이 낮은데도 이렇게 활약했다는 건…… 예능보다 서바이벌이나 생존 능력이 높은 게 아닐까?’
비록 작년 공포 컨텐츠 촬영 땐 멤버들에게 몰려서 가장 먼저 탈락하고 말았지만.
오늘은 그때와 다르게 개인전에 가까워서 그런 특성이 더욱 잘 드러난 걸지도 모르지.
게다가 하범과 대화하는 것을 보며 알게 되었는데 해랑은 의외로 어그로력이 탁월했다.
특별히 뭘 안 해도 옆에서 더 열을 내는 느낌이었다.
‘혹시 태풍의 눈 특성이 이거랑 연관되었나?’
하범도 자꾸 해랑을 이기려고 들던데. 경쟁심이 강한 사람에겐 넘어서고 싶은 벽처럼 느껴지는 걸까. 일단 벽처럼 키가 크긴 한데.
그리고 한이 외의 다른 멤버들도 배신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촬영을 지켜보며 멤버들의 예능 감각이 작년보다 많이 성장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오늘의 촬영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아니었다. 출연진들의 일정은 남아 있었다.
“이제 고기 먹으러 가야지.”
“고기!”
멍하니 걷던 도한이 귀를 쫑긋 세우듯이 자세를 바로 하며 눈을 반짝였다.
웰컴 드링크에, 토마토에, 점심에, 간식까지. 이것저것 먹이긴 했지만 칼로리 섭취가 필요한 20대 젊은이들을 저녁 시간에 너무 달리게 해 버렸지.
정리하는 스태프들로 어수선한 현장 속, 다시 몬클하우스로 복귀하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아지, 강아지 아직 있는데요?”
아직도 복실이를 품에 안고 있던 이담이었다.
“아! 너무 자연스러워서 복실이도 원래 우리랑 같이 다니는 줄 알았어.”
복실이를 동료로 만든 장본인인 재민도 이제야 복실이는 따로 집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냈다.
이담이 말하지 않았으면 자연스럽게 몬클하우스로 데려가서 함께 회포를 풀 뻔했다.
이웃 할머님이 알아서 두면 집으로 돌아온다고 했지만 우리가 데리고 있는 바람에 복실이의 귀가 시간이 늦어져서 걱정하고 계실지도 모른다.
이웃집과 안면을 튼 내가 가서 설명하는 편이 좋을 듯했다.
“내가 데려다주고 올게.”
내가 복실이를 데려가려고 손을 뻗자 이담은 복실이를 더욱 꼭 안았다.
복실이는 이담의 품이 편안한지 그의 팔에 고개를 기대고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다.
“어…… 그냥 제가 안고 따라갈게요.”
“저도 갈래요. 복실이 지나가는데 제가 불러왔으니까.”
재민도 이담의 옆으로 와서 섰다.
방금까지 열심히 뛰어다녔으니 피곤할 것 같아서 내가 대신 데려가려고 했는데.
두 사람은 오늘 함께한 강아지 동료를 손수 배웅하고 싶은 마음인 듯했다.
“그래. 남은 촬영은 조금 쉬었다가 한다고 했으니까 같이 가자.”
복실이의 초상권도 있으니까, 영상에 얼굴이 나와도 되냐고 허락은 받아야지.
그렇게 우리는 잠시 일행을 벗어나 이웃집으로 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가로등이 없어서 천천히 걷느라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재민이 모노크롬과 더클랜의 응원봉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 길을 비췄으나 응원봉의 발광력은 역시 손전등에 비할 것은 못 되었다.
“그런데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또 하고 싶다.”
재민은 별점 5점에 재주문 의사까지 있는 듯하지만, 촬영 종료 후 에너지가 소진되어 터덜터덜 걸어오던 배신자 클럽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른…… 멤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왜요? 진짜 영화 같고 좋았는데.”
“다른 쪽은 완전히 예능이었거든.”
재민은 이담, 류현과 함께 계속 몬클하우스에 있다가 마지막까지 좀비 서바이벌에 충실했지.
대피소에서 다른 생존자들과 합류하긴 했지만, 다른 이들이 무슨 배신극을 펼쳤는지까지는 아직 모르는 듯했다.
계속 재민과 함께 있었던 이담도 오늘 컨텐츠 촬영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을 열었다.
“이런 거…… 더클랜도 했으면 좋겠어요. 재밌을 것 같은데.”
밖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집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먹여주고 싶어 하는 가장의 마음 같아서 짠한 마음이 들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전에 언뜻 보기로는…… 더클랜의 자체 컨텐츠가 그리 풍족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더클랜이 몬클하우스에 놀러 온 영상을 공개했을 때 그들의 팬덤이 소중한 컨텐츠라고 댓글을 달았던 것이 생각났다.
‘왠지 과거의 모노크롬과 대화하면 이런 느낌일 것 같아…….’
그러나 내가 더클랜의 소속사 직원이 아니니 내가 뭘 어떻게 해주겠다고 말해줄 순 없고.
유아이TV 스태프들한테 슬쩍 말해줘야지. 다양한 아이돌 컨텐츠를 만드니까 더클랜이 컴백하면 불러주지 않을까.
오늘 이담이 마지막에 활약을 많이 했으니 스태프들의 눈에 이미 들었을 수도 있고.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복실이를 마저 배웅해주었다.
***
몬클하우스의 마당, 식탁처럼 긴 테이블이 깔리고 10명의 출연진이 둘러앉았다.
다들 피곤할 테지만 오늘의 상품 수여식이 남아 있었다.
“항체 보유자를 무사히 골인시킨 공로를 인정해서 저희에게 상품이 있다는데 뭐죠?”
이담과 함께 다닌 재민과 류현을 제외하고는 공로가 있다고 말하기 어려웠지만, 예능으로 분량을 뽑은 것도 공로라면 공로지.
한이가 준비된 멘트를 하고 아직도 좀비 아포칼립스 세계관의 여운에 빠져 있는 재민이 “인류의 평화?” 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유아이TV 측에서 준비한 상품은 인류의 평화 같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셰프님이 직접 구워주시는 철판 코스 요리입니다!”
“오오오……!”
체력이 떨어지고 배고픈 이들에게는 최고의 상품이었다.
고기, 그것도 남이 구워주는 고기. 그냥 앉아서 받아먹으면 되니 이보다 더 편할 수는 없었다.
“만약 실패했으면 저희 굶는 거였어요?”
“아니요. 실패하셨으면 그냥 마트에서 산 고기를 직접 구워 드시게 되셨을 거예요.”
“앗…….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원래 다른 이들에게는 저녁엔 바비큐를 해 먹을 것이라고 전달했다.
그걸 기대하고 온 출연진도 있는 듯한데, 상품이 고급 코스 요리라 비교가 되었다.
그렇게 출연진들이 맛있는 철판 요리를 즐기며 힐링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좀비 소리 아니야? 서바이벌 아직 안 끝났어요?”
별생각 없이 고기와 해산물을 즐기던 출연진들이 어깨를 움츠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나 모노크롬은 이 상황이 익숙하다는 듯 여전히 느긋했다.
“고라니 울음소리야.”
“고라니가 저렇게 울어요?!”
이렇게 좀비 아포칼립스는 고라니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