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5화
해랑과 하범을 먼저 내보낸 것은 어찌 보면 패착이었다.
두 사람이 초장부터 재빠르게 좀비들을 제치고 나가자, 좀비들은 두 사람의 운동 능력이 평균치라고 생각해 버린 것이다.
컨텐츠를 위해서는 적당히 난이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좀비들은 출연진들을 전력으로 쫓아가기 시작했다.
“악! 잠깐만요, 잠깐만요! 까악!”
귀신은 무서워하지 않던 한이도 좀비가 전력으로 쫓아오면 반사적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위기감보다는 예능감이 앞섰기에 그는 특유의 목청으로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도한의 초음파 고음 개인기 다음으로 한이의 비명이 들려오자 몬클하우스에 있던 출연진들은 더욱 긴장했다.
“와, 엄청 무섭나 봐…….”
“놀이공원 귀신의 집 앞에 줄 서 있는 기분이야.”
재민이 적절한 비유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해냈다.
그러나 재민은 좀비 서바이벌에 관심이 있었고, 무서움만큼이나 기대도 크기에 ‘놀이공원 귀신의 집’이라는 신나는 이미지로 비유한 것이었다.
그저 무서움밖에 없는 이들에겐 귀신의 집이 아니라 세계의 종말을 앞둔 기분이었다.
우형은 불안한 눈으로 남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쳐다봤다.
“그런데 해랑이랑 하범이는 뭐 하는데 빨간 불 흔든 이후로 반응이 없어?”
간의 크기는 우형과 비슷한 준해도 그 옆에 서서 같은 얼굴로 밖을 내다봤다.
“다 좀비한테 당한 거 아니야?”
“걔네가 에이스인데 이렇게 바로 당하면 우리는 어떡하냐…….”
“어쩌면 조심히 다니느라 조용한 걸 수도 있지. 형이 맏형이니까 나가서 찾아보면 어때?”
평상시에는 맏형이라고 크게 대우해주지 않던 준해는 갑자기 장유유서 정신이 투철해졌다.
무섭기는 해도 동생들이 걱정되었던 우형이었으나, 나가란 소리에 걱정은 쏙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다른 이들의 반쪽짜리 걱정을 받고 있는 해랑과 하범은 대피소 앞에서 1차 대치를 마쳤다.
“너 여기 선 못 넘어와.”
“하, 잡을 수 있었는데.”
좀비가 된 하범은 전력 질주로 해랑을 따라갔고, 해랑도 전력으로 도망쳤다.
다른 좀비 배우들은 차마 둘의 속도를 따라가기 어려웠는지 쫓아오지 않았다. 덕분에 둘만의 경주가 펼쳐졌다.
하범은 하필이면 작년과 올해 <아이돌 대운동회>에서 해랑에게 달리기 승부를 걸었다가 이기지 못한 경험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그 설움을 갚아주려 했건만. 붙잡기 직전에 해랑이 대피소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멈춰 서야만 했다.
“백해랑, 너 다시 나올 거지? 어느 쪽 루트로 나올 거야?”
“그걸 말해주면 소용이 없지.”
“쳇.”
좀비는 대피소 주변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른 루트로 이동하려면 다시 갈림길이 있는 보급소 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버린 하범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그러다가 다음 순서로 나온 준해와 마주쳤다.
‘백해랑…… 동생들한테는 약한 편이었지.’
해랑이 에이펙트 엔터의 연습생일 시절, 같은 동갑 라인에게는 냉정한 주제에 연습생 동생들이 뭔가를 부탁하면 잘 거절하지 못했던 것을 떠올렸다.
그리고 지금 해랑이 친동생처럼 귀여워하는 대상이 바로 모노크롬의 막내, 준해였다.
곧이어 준해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맹렬하게 달려오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 아직 복근이 준비가 안 됐어요!”
누가 봐도 사람을 노리는 좀비의 기세였기에 도망치려 했으나 준해는 금방 붙잡히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을 붙잡은 사람이 초반에 나간 이후로 소식이 없던 하범임을 알아봤다.
“형 좀비야?”
“응. 그런데 난 백해랑만 잡으면 되거든?”
분명 나갈 땐 같은 편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적이 되어버린 걸까.
잘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도 모르는 좀비보다는 아는 좀비가 나았다. 준해는 긴장을 풀고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럼 나는 놔주면 안 돼……?”
“안 돼. 백해랑 잡는 데에 네가 협조 좀 해줘야겠어.”
***
“아, 깜짝! 이야…….”
“쉿, 쉿.”
해랑과 하범 이후로는 항체 미보유자의 이름이 전부 한 명씩 발표되었다.
한 루트로 돌입한 우형은 먼저 출발한 종훈을 발견하고 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보급소에서 멀지 않은 미션 장소의 벽 뒤에 숨어 문 너머를 살피는 중이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저기 멀리 좀비 있는데 도저히 혼자선 뚫고 지나갈 용기가 안 나서요.”
“잘 됐다. 같이 다니자.”
동생들은 우형이 겁이 많다며 놀리곤 했다. 심지어 똑같이 겁쟁이인 준해도.
그런데 지금 이런 모습을 보니 종훈도 같은 타입인 듯해서 우형은 왠지 안심되었다.
두 사람은 머지않아 다른 출연자와도 마주쳤다. 종훈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 한이 형…….”
분명 나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비명을 지르지 않았나?
그 이후로는 비명 없이 조용해서 한이도 좀비가 된 줄로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지금 한이는 좀비에게 들키지 않으려는 듯 자세를 낮추고 조심히 다가오고 있었다.
“두 사람 여기서 뭐 해?”
“유한이 너 아까 좀비 된 거 아니야?”
“아니, 나 사람이지.”
“거짓말이지?”
“응. 나 좀비야.”
“왜 그것도 거짓말 같냐…….”
“그러니까 안 믿을 거면서 왜 물어봤어.”
한이는 작년 유아이TV의 공포 컨텐츠에서 귀신과 한패였던 전적이 있었기에 쉽게 믿으면 안 되는 요주의인물이었다.
한이라면 아까도 다른 이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려고 일부러 비명을 지른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좀비인지 사람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우형은 “그냥 물어보지 말걸.”이라며 후회했다. 한이의 오락가락하는 대답을 들은 탓에 괜한 혼란만 가중되었다.
그러나 좀비인지를 확인할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옆구리 보여줘 봐.”
“남의 옆구리를 왜 보려고 그래요.”
“저 형 의심스러운데요?”
한이가 옆구리 공개를 거부하자 종훈도 우형처럼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너 좀비 맞지? 방금 비명 지르는 거 들었어.”
“좀비가 청각이 예민하다고 했잖아. 그래서 오히려 큰 소리로 공격하면 치명적이지 않을까 해서 질러봤던 거고. 그랬더니 멀리서도 듣고 엄청 쫓아오더라. 그래서 지금은 살금살금 다니잖아.”
대답이 너무 술술 나오고 그럴싸했다.
이곳이 면접장이었으면 한이는 분명 현장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이라면 처음부터 남을 속일 생각으로 그럴싸한 변명만 구상했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불신이 오가는 분위기 속, 한이가 불화의 불씨를 던졌다.
“내가 배를 안 보여주려는 이유는 그거야. 아까 도한이랑 만났는데 자긴 사람이라고, 나보고 옆구리 보여달라고 하면서 공격하더라니까? 어두워서 잘 안 보인다면서 가까이 와서는 갑자기 확!”
한이가 ‘확!’에 강조를 줘서 말하자 마치 생생한 괴담 재현극 같았다.
분위기에 압도된 우형과 종훈은 한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좀비화가 하루 걸린댔지? 그러면 좀비들도 머리를 쓸 수 있단 소리야. 두 사람은 서로 확인했어? 사람인 거 확실해?”
“형……?”
“너 왜 날 그렇게 봐?”
한이의 말에 꼭 붙어 있던 우형과 종훈은 슬금슬금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세 사람은 일정 거리를 두고 대치하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아까 배신자로 꼽혔던 세 명이었다. 이들 사이에 신뢰란 없었다.
누구 한 명이라도 움직이면 깨질 균형. 팽팽한 긴장감 속에 있는 이들의 귓가에, 또 다른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어! 형님들 여기 왜 다 모여 있어요?”
나타난 것은 긴장감 없는 목소리의 도한, 그리고 그의 앞에 있는 해랑이었다.
도한도 분명 좀비가 된 줄 알았는데, 해랑이 같이 있다는 것은 둘 다 좀비라는 뜻인가?
배신자 클럽은 두 사람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그런데 해랑의 꼬락서니가 이상했다.
“너 그 총은 뭐야?”
해랑의 양손에는 총이 하나씩 들려있고, 가방에도 총이 하나 더 삐져나와 있었다.
손이 부족한 탓에 그는 셀프 카메라도 가방 속에 넣어둔 상태였다. 대신 도한이 자신의 셀프 카메라로 해랑과 자신을 촬영 중이었다.
“좀비……한테서 가져왔어.”
“좀비를 파밍한 거야?”
“저는 총 같은 거 있는 줄도 몰랐는데…….”
도한과 한이 다음으로 출발했던 종훈은 총이 초면이라고 한다. 앞 사람들이 총을 전부 가져갔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이는 총 없이 나타났고 도한은 해랑과 함께 나타났다. 그렇다면 해랑에게 털린 좀비가 바로 도한이란 말인가.
해랑과 하범이 총을 한두 개 가져가고 도한이 남은 것을 가져갔다면 맞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어……. 저도 총은 안 가져갔어요.”
다른 이들의 시선을 받은 도한은 눈치를 보며 해랑을 손절했다.
도한 전에 출발한 사람은 해랑과 하범뿐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은 보급소를 같이 갔다.
두 사람이 뒷사람은 생각 안 하고 총을 싹쓸이했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들통나고 말았다.
“백해랑 실망이다…….”
“와. 형 예능인 다 됐네.”
“아니, 이하범이…….”
“결국 형도 공범인 거야.”
한이도 이것은 예상외였다는 듯 그를 비난했다.
해랑은 더 할 말이 없는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그럼 파밍했다는 좀비가 하범 형이에요?”
“같이 출발했는데 한 사람 좀비 되니까 버리고 총도 털어간 거야?”
“백해랑 무서운 애였네…….”
하범을 버렸다는 말은 반쯤 사실이었기에 해랑은 여기에도 할 말이 없었다.
배신자 클럽 앞에 나타난 거대 배신자. 그렇게 해랑의 평판은 점점 떨어져만 갔다.
우형은 이번엔 해랑의 가방끈에 달린 작은 기기를 가리켰다.
“그건 또 뭐야? 시한폭탄……?”
“어쩜 그렇게 발상이 파괴적이에요?”
종훈이 감탄인지 비난인지 모를 표현을 하며 입을 떡 벌렸다.
이것은 시한폭탄이 아니라 30분간 적용되는 임시 백신의 시한을 표시하는 타이머였다.
대피소를 나올 때부터 해랑은 30분간 무적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도한은 좀비가 되었음에도 그를 물지 못했다.
그렇다고 혼자 돌아다니기엔 심심해서 해랑을 졸졸 쫓아다니고 있던 것이었다.
“그럼 유한이가 아까 도한이 만났다는 얘기도 다 뻥이었네.”
“형도 좀비예요?”
도한은 반가운 동기를 만난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한이는 변함없이 연기를 속행했다.
“아냐. 나 인간이라서 사람 말고 에너지바를 먹고 있잖아.”
한이는 길가에 쓰레기를 버릴 순 없어서 주머니에 넣어놨던 에너지바의 빈 포장지를 꺼내 보여줬다.
이는 보급소에 있던 아이템이었다.
한이는 네 번째로 출발했으니 보급소에 고를 아이템이 꽤 많이 남아있었을 텐데 그 와중에 에너지바를 고른 것이었다.
“그건 그냥 네가 먹고 싶어서 먹은 거 아니야?”
“옆구리 확인 안 하고 확인할 방법 있어.”
황당해하는 우형 옆에서 해랑이 끼어들었다.
“총으로 쏴 보면 돼.”
“세상에.”
졸지에 피격당할 처지에 놓인 한이가 무슨 그런 잔인한 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해랑을 바라봤다.
총을 맞아서 죽으면 사람이고 움직이면 좀비란 소리였다.
“형은 멀쩡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종훈도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해랑을 바라보며 경악했다.
***
“왜 다 조용하지?”
일곱 명이 밖으로 나갔고, 세 명은 아직 몬클하우스에 남았다.
재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미어캣처럼 창밖을 내다봤다.
어두워져서 응원봉으로 신호를 주면 바로 보일 텐데, 밖으로 나간 출연자들은 배신자 특집을 펼치느라 몬클하우스에 남은 생존자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밖에서 출연진들이 예능 분량을 충실하게 뽑고 있다면, 몬클하우스는 아포칼립스 영화 속이었다.
영화 마니아, 과몰입 장인 재민 덕분에 분위기에 휩쓸린 이담과 류현도 매우 긴장된 얼굴로 바깥을 살폈다.
그러다, 재민의 시야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복실이!”
재민은 그 존재를 확인하고 눈을 반짝였다.
그가 발견한 것은, 몬클하우스 앞을 유유히 산책하는 작은 강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