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44화 (344/430)

# 344화

“저기요, 얘기 좀…… 끼약!”

담장 너머의 좀비가 목소리에 반응하여 팔을 휘두르고, 한이가 펄쩍 뛰며 뒤로 피했다.

마법봉의 마법의 힘도 통하지 않는데 대화라고 통할 리가.

옆에 있던 준해가 모노크롬의 브레인답게 대피 안내서를 다시 보며 정보를 정리했다.

“좀비들이 시각보다 청각이 예민하다고 쓰여 있거든? 소리에 반응하는 게 맞나 봐. 그러니까 우리는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해.”

“대문으로 나가긴 글렀네.”

대문을 여닫을 땐 철문 소리가 나기에 주변의 좀비들이 모여들 듯했다.

그래서 해랑과 하범도 대문으로 나가지 않고 창고에 있던 사다리를 타고 뒤쪽 담장을 넘어서 나간 참이었다.

좀비의 생태를 연구하던 준해는 멀리에서 뭔가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저기 해랑 형이 응원봉 흔드는 것 같은데?”

“보급소까지 가면 일단 괜찮은가 보다.”

결국 출연진들은 응원봉을 봉화처럼 사용하기로 했다.

컬러즈의 공식 색상은 색의 3원색인 시안, 마젠타, 옐로.

따라서 모노크롬 공식 응원봉도 불빛을 그 세 가지 색상으로 변경할 수 있었다. 색상 조절이 가능한 무드등과 같은 원리였다.

안전하면 파란색, 위험하면 빨간색, 알았다는 신호는 노란색으로 해서 멀리서 의사소통을 하자고 미리 정해뒀는데 착실히 파란색 신호가 돌아왔다.

보급소는 좀비가 들어오지 못하는 안전지대라는 것을 확인한 나머지 8명은 다시 회의에 들어갔다.

“골인 지점, 대피소에 가면 30분 동안 효과가 생기는 임시 백신이 있다고 하잖아. 그럼 먼저 도착한 사람이 백신 맞고 나와서 보디가드 해 주면 되겠다.”

준해의 정리에 이담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가다가 좀비한테 물린 사람은요……?”

“물리고 완전히 좀비 되기까지 하루가 걸린다고 했으니까……. 옆구리에 표식 생기는 게 그것 때문이었나 보다. 사람인지 좀비인지 구별하라고.”

밖에 나가면 응원봉 봉화 외에는 서로 연락도 안 되고, 루트가 갈라져 있어서 다른 루트에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대피소로 향하다가 다른 출연진과 마주치면 그 사람이 안전한 사람인지 좀비화 진행 중인 사람인지 알 수 없으니 심리전을 펼칠 필요가 있었다.

공포 방 탈출보다 복잡해진 게임에 각자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몰래 좀비랑 손잡는 사람 나오는 거 아니야? 배신자 이미지 있는 사람 자진해서 나와 봐.”

“형부터…….”

배신자를 추려내려던 우형은 게스트들의 시선을 받고 자진해서 한 발짝 앞으로 나가야 했다.

곡과 고기 대신 좀비를 선물한 죗값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한이 너도 나와.”

“아니, 난 회개했지.”

한이는 안 움직이고 버티려 했으나 작년 공포 컨텐츠에서 한이에게 뒤통수를 맞았던 준해가 그를 떠밀었다.

유아이TV의 공포 컨텐츠에 출연한 적 있는 그룹은 마피아 시스템이 한이 때문에 생겼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8명의 시선이 이리저리 얽히며 서로를 살폈다.

류현은 다른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렀다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긴장했다.

‘나 착하게 살진 않았나 봐…….’

<쉰셋돌> 촬영 당시 베터 엔터테인먼트에서 나온 곡을 몰래 밀어주려 했던 것.

그리고 제오를 붙잡고 모노크롬에 관해 뒷말을 하려다가 도한, 주인에게 들켰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지금 도한의 얼굴을 보니 그때 일은 완전히 잊은 듯했지만 류현은 혼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내 우형의 손가락이 한 명을 가리켰다.

“그리고 종훈이 너도. 작년에 너희가 나 물에 빠트리고 도망갔잖아.”

“형 뒤끝 너무 강한 거 아니에요?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이 형은 원래 쪼잔해.”

한이가 우형의 앞담을 하다가 우형의 날카로운 시선을 받고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생각해 봐, 형. 밖에 있는 좀비분들은 대화가 안 통해서 딜을 못 해요. 그리고 제작진이 개입한다고 해도 보통 배신자 이미지가 있는 사람한테는 이런 역할 또 안 맡기지.”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 역으로…….”

“벌써부터 배신이냐?”

한이가 열심히 본인의 무해함을 어필했으나 종훈이 옆에서 찬물을 끼얹었다.

배신 위험이 있는 사람을 추려내려던 대화는 ‘힘을 합쳐 인류 평화를 달성하고 다 같이 고기 먹자’라는 건전한 결론에 이르렀다.

이미 해랑과 하범이 본인들만 살겠다고 최강 무기인 총을 싹쓸이했다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나눌 수 있는 대화였다.

***

보급소에서 가져갈 수 있는 아이템은 인당 두 개. 해랑과 하범은 총 세 개에 손전등을 골랐다.

상황실이 보급소 바로 옆이라 창문 너머로도 두 사람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총 세 개나 들고 간 거 들키면 뭐라고 하겠지?”

하범의 질문에 해랑이 잠시 생각하더니 모노크롬 공식 응원봉의 스위치를 몇 번 딸깍딸깍 눌렀다.

“우리 있는 쪽으로 못 오게 신호 보내면 되지 않을까.”

“너 의외로 배신이 능숙하다?”

하범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더니 웃었다. 거짓 신호 작전을 세운 그들은 바로 첫 번째 루트로 출발했다.

이들의 선택을 지켜보던 나는 작가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총만 저렇게 많이 들고 가는 게 유용할까요? 지금은 쓸모없어 보여도 미션에 도움 주는 아이템들도 있는데.”

총 하나쯤은 포기하고 다른 아이템을 더 골라도 좋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런 경우도 예상했는지 작가는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미션 수행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도 결국은 좀비한테만 안 물리면 장땡이잖아요. 게다가 총이 세 개면 60발……. 미션 시간이 끝나도 총을 쓰면 여유 시간을 더 벌 수 있으니까요.”

대피소까지 가는 길에는 중간중간 문으로 가로막힌 미션 장소가 설치되어 있다.

미션 장소에 돌입하는 순간 일정 시간 동안은 좀비가 다가오지 못한다.

시간 안에 미션에 성공해서 비밀번호를 알아내 문을 열고 다음 장소로 향하면 되는 것이다.

한번 열린 문은 다시 닫히지 않으니 후발주자는 바로 통과할 수 있어서 유리하다.

‘그런데 미리 출발한 사람이 좀비가 되었으면 다음 사람이 못 지나가게 방해할 테니까 난도가 높아지고.’

그러니 후발대는 좀비가 적고 미션이 많이 해결된 루트를 골라야 한다.

총을 세 개나 가져간 해랑과 하범 콤비가 길을 뚫어주는 것이 최선이지만 이들은 이미 뒷사람들은 안중에 없었다.

마침 해랑이 첫 미션 장소에서 응원봉의 색상을 빨강으로 바꿔 흔드는 것이 보였다. 이쪽은 위험하니 오지 말라는 신호였다.

‘예능 레벨 2인 해랑이가 이렇게나 빠르게 성장하다니.’

하범의 예능 레벨이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7년 차 아이돌에 솔로 활동까지 해 왔으니 낮지는 않을 터.

동갑 친구 덕분에 멤버들과 있을 때와는 또 다른 시너지 효과가 일어난 걸까.

누구보다 차분하고 성실해 보이던 해랑이 초장부터 배신 루트를 탈 줄은 몰랐기에 내심 놀랐다.

‘이번엔 정말 예능 레벨 오르는 거 아냐?’

그러나 항상 ‘얼굴이 유잼’이라며 재미보다는 매력도가 주목받는 일이 반복됐으니 이번에도 그렇게 넘어갈 가능성이 크겠지.

아무튼 나는 시청자가 된 기분으로 두 사람이 미션을 진행해나가는 것을 상황실 모니터로 지켜봤다.

이번 컨텐츠의 좀비들은 시각보다 청각이 발달했다는 설정이 붙어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발소리를 가감 없이 내며 달리기로 좀비를 제쳐 나갔다.

‘아직 그 정보를 몰라서인지, 정면돌파가 빠르다고 생각한 건지…….’

두 사람 다음으로 나온 도한이 살금살금 움직이는 것을 보니, 다행히 몬클하우스에 있는 인원은 큰 소리를 내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아낸 듯했다.

목숨을 걸고 쫓고 쫓기는 것도 스릴 있지만, 들키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 움직이는 모습도 보는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했다.

***

해랑과 하범 다음으로 항체가 없다고 발표된 도한은 현관을 나가기 전에 뒤돌아섰다.

“저희 팬분들…… 코더한테 다른 멤버들을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세요.”

“크윽. 그런 말 하지 마……!”

재민이 비통한 듯이 미간을 짚으며 그를 배웅했다.

노을이 지기 시작하며 바깥 풍경이 서정적으로 바뀌어서인지, 다들 좀비 아포칼립스 상황에 몰입하여 감성이 충만해졌다.

종훈은 이미 SNS에 ‘내가 좀비가 되어도 좋아해 줄래?’라는 글을 올린 상태였다.

엔피버의 팬덤인 엔러브는 ‘종훈아, 좀비 영화 봤니?’ 하면서 다른 영화도 재밌다며 신나게 댓글로 추천을 남겼다.

우형은 불안한 눈빛으로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봤다.

“지금보다 더 어두워지면 나가기 무서워질 것 같아. 그냥 먼저 나가는 게 나은가?”

“오케이. 형 먼저 보내 버리고.”

한이의 정 없는 소리에 우형은 다시 그에게 눈을 흘겼다.

이내 ‘널 먼저 좀비한테 떠밀겠다’, ‘힘으로 겨루면 누가 유리할까’ 하면서 투닥이던 두 사람은 밖에서 들려오는 고음의 비명에 싸움을 멈췄다.

고라니 소리가 아니었다. 메인 보컬쯤은 되어야 낼 수 있는 고음이었다.

“전에 도한이가 준비했다던 초음파 고음 개인기가 이거였나 봐…….”

<쉰셋돌> 촬영 때 도한이 신셋의 메인 보컬 자리를 따내기 위해 개인기를 준비했다고 했었는데.

그 개인기를 이제야 확인하게 된 준해가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더 전망이 좋은 2층 창문을 통해 바깥을 살피던 류현이 내려와 상황을 전달했다.

“도한 형은 중간 루트로 간 것 같은데 비명 이후로 응원봉 빛이 안 보이는 거 보니 아마도…….”

도한의 생사를 전달받은 남은 이들은 그에게 애도를 표했다.

***

몬클하우스에서 가장 먼 루트로 이동한 해랑과 하범은 이제 응원봉 신호를 보내지 않고 미션을 돌파해 나갔다.

앞에 좀비가 있어도 총으로 쏘면 5초 정지. 5초면 발이 빠른 두 사람이 달려나가기에는 충분했다.

“아후. 빨리 오는 건 좋은데 너무 숨 차는데?”

“대피소 가서 쉬어.”

하범은 해랑의 말에 한숨을 쉬었다. 잠은 죽어서 자라는 말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미션은 대피소와 가까워질수록 어려워졌다. 이번엔 알파벳을 정해진 숫자로 치환하여 계산하는 연산 퀴즈였다.

방전되어가는 하범은 자신들을 따라온 좀비의 위치를 확인하고 잠시 쪼그려 앉아 쉬었다.

해랑이 자물쇠를 풀자마자 미션 시간이 종료되고, 다시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던 하범은 누군가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악!”

사각지대에 있던 좀비가 튀어나와 하범을 덮친 것이었다.

이들이 너무 피지컬로 밀고 나간 탓에 위기감을 느낀 좀비들이 머리를 쓰기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하범의 비명을 들은 해랑은 곧바로 총을 두 발 쐈다.

“이하범 너도 지금 총 맞았어.”

“뭐? 왜 날 쏴?”

“너 이제 좀비잖아.”

이미 예능에 물든 해랑이 상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범이 좀비에게 물리는 것을 보고 해랑은 지체 없이 그를 손절한 것이었다.

그 현장을 직관한 좀비 배우가 옆에서 “큭.” 하고 웃음 참는 소리를 냈다. 좀비는 하범의 옆구리에 빨간색 스티커를 붙였다.

“야! 내가 너 대신 희생해 준 건데!”

그러나 해랑은 5초가 지나기 전에 하범이 든 총까지 빼앗아 도망가 버렸다.

좀비화가 시작된 하범은 좀비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범 씨도 이제 좀비가 되었으니 다른 분들이 대피소로 못 가도록 방해하시면 됩니다. 여기 스티커도 드릴게요.”

“한 명만 쫓아다녀도 돼요?”

“네. 돕지만 않으면요.”

하범은 이글이글 눈을 불태웠다.

“인정머리 없는 자식. 넌 내가 꼭 좀비로 만든다…….”

원래 예전부터 해랑에게 자주 승부를 걸던 하범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그들만의 싸움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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