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40화 (340/430)

# 340화

촬영이 시작하기 전, 멤버들의 표정엔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한이가 <송투유> 촬영할 때 천상식 때문에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는데 원흉이었던 천상식이 첫 게스트라니.

면접을 앞둔 사람처럼 긴장한 얼굴이던 우형은 한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뭐 조심해야 하는 건 없지?”

“음……. 아니, 딱히? 트로트만 건드리지 않으면.”

“그거야 당연하지.”

한이는 가볍게 주먹을 쥐고는 제 가슴께를 툭툭 두드렸다.

“괜찮아. 나만 믿어.”

“뭘 하려고?”

한이의 믿으라는 말과 달리, 해랑은 못 믿겠다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너무 당당하니 오히려 신뢰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한이가 이렇게 자신이 넘치는 이유가 있었다.

“나 유한이잖아.”

성악가 할아버지와 성악가 아버지를 둔 유씨 집안의 아들.

한이가 성씨까지 걸고 말하면 멤버들도 그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촬영.

천상식이 카페 중앙의 테이블에 앉고, 아르바이트생 1호 우형은 메뉴판을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모노크롬 멤버들이 열심히 연구한 메뉴를 배명희가 시식하고 평가하여 완성한 것이었다.

“메뉴판 드릴까요?”

“메뉴판도 있어?”

상냥하게 응대하는 우형과 달리 천상식은 툴툴대는 투로 대답했다.

같은 말도 ‘후배들이 기특하게 메뉴도 준비했어?’라는 자상한 말투로 해 주면 좋으련만.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뭐 이런 가게에 메뉴까지 있어?’라는 뉘앙스였다.

‘그런데 이 카페의 사장님이 바로 배명희 씨인데.’

배명희는 바 안쪽에 있고 홀에는 아르바이트생인 멤버들만 나와 있으니 천상식은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촬영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 벌써 한이가 나설 타이밍인가?

그러나 우형이 한이를 찾기 전에 바 안쪽에 있던 배명희가 먼저 나섰다.

“손님, 주문을 하셔야 내드리죠? 우리가 독심술가는 아니니깐.”

배명희와 눈이 마주친 천상식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아마 그도 선배가 있는 자리는 익숙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죠. 제 말은 메뉴판까지 직접 준비했냐는……. 아무튼 커피나 줘.”

“오늘의 커피로 드릴까요?”

“그래. 그걸로.”

성의 없는 주문이었지만 무사히 주문을 받아낸 우형은 안심한 표정이었다.

상상 카페의 메뉴판은 어느 카페에나 있을 법한 기본 메뉴 몇 가지, 그리고 오늘의 커피, 오늘의 차, 오늘의 티푸드였다.

손님들이 본인의 마음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카페이니 그날그날 손님에 맞춰서 다른 메뉴를 내오는 게 좋겠다는 취지였으나…….

‘실은 멤버들이 자유롭게 만들었던 음료들이 너무 예능에 치중되어 있어서 웃겼던 거겠지…….’

메뉴 선정 과정에서 멤버들은 기발한 모양새와 맛의 결과물을 많이 만들어냈다. 제작진은 이들의 창의성을 몇 가지 메뉴로 제한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따라서 ‘오늘의’가 붙은 메뉴들은 실상 맞춤 메뉴라기보다는 성공 확률 50%의 랜덤 메뉴에 가까웠다.

“어떠세요? 저희가 직접 만들었는데.”

우형이 주문받는 모습을 봐서인지, 커피를 내온 것은 한이였다.

상상 카페의 ‘오늘의 커피’는 우유 거품이 듬뿍 올라간 카푸치노였다.

‘우유 거품처럼 부드럽게 말해달라는 의미인가?’

스팀 우유로 모양을 내려고 시도했는지 카푸치노 위에는 찌그러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천상식은 그 커피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더니 작게 한 모금 마셨다.

“뭐가 이렇게 밍밍해? 커피 맛은 하나도 안 느껴지고.”

천상식은 한이의 집안을 알고 친절한 척을 했을 뿐, 정말로 친절해진 것은 아니었다.

<송투유> 때의 약발이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그는 한이를 앞에 두고도 다시 툴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상식을 뛰어넘는’ 타이틀을 얻어낸 한이가 아니던가.

한이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면서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커피는 선배님이 내리셨는데…….”

“크흠, 어험.”

천상식은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던 잔을 다시 들어 호로록 마시더니 배명희에게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향이 참 좋습니다, 선배님.”

원두 선택은 멤버들이 했고 배명희는 커피 머신의 버튼만 눌렀을 뿐이었다.

눈에 빤히 보이는 태도 변화에 배명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본인에게 아무리 깍듯하더라도 ‘상식아’라고 부를 정도면 친분이 있다는 뜻. 배명희도 천상식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탈룰라를 몇 번 경험한 천상식은 한결 신중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드세요. 오늘의 티푸드예요.”

티푸드 서빙은 준해가 맡았다.

상상 카페는 메뉴값을 받지 않는 카페였기에 주문하지 않은 메뉴도 이렇게 임의로 내올 수가 있었다.

그가 들고 온 귀여운 접시에는 쿠키 세 개가 올라가 있었다.

게스트가 도착하기 전, 작가가 말한 ‘쿡방’을 위해 카페 오픈 준비를 먼저 촬영했다.

그때 제작진이 준비해둔 베이킹 레시피가 몇 개 있었다.

[우리 이거 만들자!]

재민이 고른 것은 아몬드를 껴안고 있는 곰 모양 쿠키였다.

반죽 성형을 하고 오븐 안에 들어갈 때만 해도 분명 그런 모양의 쿠키였다.

오븐 밖으로 나왔을 땐 어째서인지 전부 만세 하는 곰이 되었지만.

[팔이 안 풀리게 잘 붙여야 하는데 너무 약하게 붙였나 봐.]

곰이 손을 맞잡은 상태 그대로 구워져야 하는데, 반죽이 팽창하면서 붙였던 부분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래도 맛에는 이상이 없어서 이 쿠키가 그대로 오늘의 티푸드가 되었다.

[이거 이름이 ‘아몬드를 품은 곰’이었는데 이름도 바꿔야겠네?]

[아몬드처럼 고소한 심장을 지닌 곰?]

[아몬드 위치가 심장보다는 위장 같은데.]

[으…… 위장이라고 생각하니까 이상해. 심장도 이상하지만.]

해랑이 논리적인 이유를 대며 위장으로 정정하자 준해가 피커피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쿠키를 먹을 때마다 곰의 내장을 떠올리게 만드는 유쾌하지 못한 네이밍.

멤버들은 곡 제목은 잘 붙이면서 이상하게 요리에는 이렇게 입맛 떨어지는 이름을 붙이곤 했다.

결국 오늘의 티푸드 이름은 ‘아몬드 폭탄을 맞은 곰’이 되었다.

‘폭탄을 맞으면서 웃고 있는 게 더 기괴하지 않나……?’

천상식은 그런 긴 사연이 담긴 쿠키를 보며 잠시 고민했다.

이것도 배명희가 손을 댔는지, 좋은 평을 해줘야 하는지 눈치를 보는 듯했다.

“뭐, 맛은 괜찮…….”

“다행이다. 제가 만들었는데!”

오늘의 베이킹을 주도한 재민이 웃으면서 천상식의 호평을 주워갔다.

천상식은 결국 눈치 싸움에 실패하고 말았다.

놀림 받는 기분이 들었는지, 그는 촬영 내내 쿠키에 다시는 손을 대지 않았다.

***

순탄치 않았던 메뉴 주문 시간이 끝나고, 출연진들은 천상식을 중심으로 앉아 토크 시간을 가졌다.

한이가 옆에 있어 든든했는지 우형은 주문을 받을 때보다 자신이 생긴 목소리로 멘트를 이어나갔다.

“선배님은 가수가 아닌 자신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꼭 그런 걸 상상해야 하나?”

“여기가 상상을 파는 카페거든요.”

“하긴 뭐, 이런 장난감 같은 쿠키나 팔면 가게도 금방…….”

툴툴거림을 멈추지 않던 천상식은 배명희가 “상식아.” 하고 부르자 다시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첫 게스트가 이렇게나 비협조적이라니.

나는 카메라 뒤에서 임주미 PD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무리 봐도 자발적으로 나오신 것 같지가 않은데요.”

“후후. 그런가요?”

내가 어떻게 섭외했냐고 물었을 때 임주미 PD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는데.

역시나 배명희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반협박으로 끌고 나온 듯했다.

‘그러니까 토크에 협조적이지가 않지.’

이렇게 비협조적인 게스트를 기어이 행차하게 만든 것도 실력으로 봐야 하나.

그래도 천상식이 성질을 부렸다 죽였다 하는 모습을 보며 한이가 즐거워하고 있었다.

제작진들의 표정도 나쁘지 않은 것을 보니 이런 비협조적인 게스트도 썩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많은 장르 중에서도 트로트 가수가 되기로 하신 이유가 궁금해요. 선배님도 성악을 배우셨잖아요.”

이번엔 한이가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천상식은 성악을 전공했고, 성악에 자부심도 있다고 했는데.

‘자부심이 넘친 게 문제였지만.’

왜 성악가가 아니라 트로트 가수가 된 걸까?

천상식은 본인이 좋아하는 트로트 이야기가 나오자 그나마 고분고분해졌다.

“성악은 역사가 깊으니 이미 잘하는 분들이 전 세계에 깔렸고. 트로트는 내가 잘하고 이끌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자기 실력에 관한 확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활발하게 활동해 오면서 황제라는 타이틀을 얻은 그였으니 이유 있는 자신감이었다.

한번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토크는 생각보다 잘 진행되었다.

“그럼 너는 언젠가는 쉬어야겠다 생각해 본 적은 없니?”

민감한 주제는 배명희가 먼저 꺼냈다.

그녀를 아는 사람은 그녀가 가수 활동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기에 이런 질문을 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테니까.

“만일 제가 쉰다면…… 믿음직한 후배한테 맡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겠죠.”

“저처럼 예쁜 후배요?”

“트로트는 뭐 아무나 하는 줄 알아?!”

한이가 끼어들자 천상식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한이는 또 특유의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배명희를 바라봤다.

“저는 선배님이 저한테 마음을 조금 여신 줄 알았는데-.”

“상식아. 내가 예전에 성질 좀 죽이라고 하지 않았니.”

연예계에 얼마 없는 가수 선배 배명희, 그리고 유일하게 천상식을 잡을 수 있는 후배인 한이.

이 두 사람 사이에 낀 천상식은 수세에 몰렸다.

***

결국 천상식은 성질을 죽이지 못했다.

“은퇴 안 해! 나 죽을 때까지 괜찮은 놈이 한 놈이라도 나오면 몰라. 이놈이고 저놈이고 마음에 차는 놈이 없어. 징하게 해 먹는다고 욕먹어도 이러면 못 놓는다, 못 놔!”

호스트들과 심오한 대화를 이어나간 그는 트로트 가수라는 직업을 평생 이어나가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런 결론도 나름대로 괜찮네요. 지금으로서는 은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마음 깊숙한 데에 있던 진심을 깨닫게 되신 거잖아요. 꼭 다른 길을 고려해 볼 필요는 없죠.”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실 줄 아시네요.”

나는 의외라는 얼굴로 임주미 PD를 바라봤다.

천상식이 본인의 속마음을 깨닫게 되어서 잘됐다기보다는 방송이 잘 나올 것 같아서 흡족해 보이는 표정인데.

천상식은 이제 더 할 이야기는 없다는 듯이 남은 커피를 원샷했다.

그가 자리를 뜨려는 기색을 보이자 계산에 자신이 있던 재민이 카운터로 향했다.

“그럼 오늘 상상한 내용대로 계산하셔야…….”

“안 내!”

“으에?”

첫 게스트는 그렇게 계산도 안 하고 떠나버렸다.

‘이렇게 첫 게스트부터 형식을 파괴해도 괜찮은 거야?’

스태프 일부는 서둘러 그를 따라 나가 오늘 와 주셔서 감사하다며 인사를 건넸다. 떠나간 천상식을 다시 붙잡아와서 자리에 앉히지는 않았다.

천상식을 부리는 배명희와 한이 덕분에 촬영 분량이 제법 나온 덕분이었다.

상상 카페의 사장님인 배명희는 진상 손님이 사라져서 순식간에 조용해진 현장을 둘러보더니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휴. 얘들아, 오늘 장사 공쳤다. 문 앞에 소금 뿌려라.”

“네.”

모노크롬은 말 잘 듣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준해는 주방에서 바로 베이킹용으로 준비된 소금을 들고 나갔다.

그러나 멤버들은 문밖에 소금을 뿌리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소금 통을 든 준해는 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옆에 선 재민을 바라보고 물었다.

“소금 얼마나 뿌려?”

“재료 낭비하기 좀 그러니까 조금만 뿌리자.”

결국 두 사람은 스테이크에 간을 하듯이 문 앞에 소금 두 꼬집을 솔솔 뿌리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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