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36화 (336/430)

# 336화

“래, 래퍼셨어요?”

“네. 솔로로 전향하고 나서는 주로 보컬로 활동하긴 했는데, 그룹에 있을 땐 래퍼랑 보컬 포지션을 둘 다 맡았어요.”

어쩐지. 라솔의 회사는 보컬 아티스트 전문이었다. 그런데 이 가사는 아무리 봐도 멜로디가 들어가는 일반적인 노래가 아니라 힙합곡에 어울렸다.

래퍼 더씬의 어이없는 행보가 그녀의 잠들었던 힙합 본능을 일깨운 모양이었다.

사연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가련해 보였던 그녀의 표정이 이제는 조금 달라 보였다.

“이런 노래를 냈다가 혹시 제가 미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 해서…….”

“그…… 이런 노래라면 아무도 미련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그런가요?”

“네.”

구차하게 남겨둔 전화번호를 연락처 목록에서 뒤지고, 상황파악 능력도 남들보다 뒤지고…….

상대방이 이것저것 뒤진다는 이런 곡을 듣고 누가 그녀 앞에서 미련이란 단어를 꺼내겠는가.

“누가 봐도 맞디스곡인데요. 남은 감정이라고는 하나도 안 보이는.”

“그러면 다행이고요. 그쪽에서 먼저 건드렸으니까 제가 나서도 정당방위겠죠?”

……내가 판사가 아닌데 정당방위를 인정해 줘도 되나?

나는 이 이야기를 먼저 들었을 라솔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라솔 씨도 이 가사를 보고 본인의 선에서는 도저히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거군요…….’

서림은 이제 이 회사의 소속 아티스트다.

노래를 내려면 이 회사를 통해서 내야 할 텐데 그래도 괜찮은지 망설여져서 내게 도움을 구한 듯했다.

감성 보컬로 유명한 라솔도 이런 감성은 처음이었을 텐데 얼마나 당황했겠어.

나는 라솔을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시선을 바로 했다.

“그런데 이 가사는 실화 반영인가요……?”

“네. 완전히 헤어지기 직전에 제 전화를 남동생이 대신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새, 아니, 사람이 길길이 날뛰는 거 있죠. 몰래 남자 만난다고. 정작 헤어진 이유는 그쪽 이성 문제 때문이었는데, 웃기지도 않죠.”

그래놓고 상처를 힙합으로 달랜다는 둥 랩을 썼다니.

힙합은 만병통치약이나 진통제가 아닌데 말이다. 국가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어떻게, 지금까지 잘 참으셨네요…….”

“제가 거기서 바로 들고 일어서기에도 좀……. 연예인으로서 체면이 있잖아요.”

무슨 일을 하든 남들의 시선이 달라붙는 연예인의 고충이었다.

씁쓸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이 다시 가련해 보였다.

“그 후에 비슷한 곡이 또 나오지 않았으면 저도 이렇게까지는 안 나왔을 거예요.”

“……가사로 써먹은 게 한 번이 아니었군요.”

“네.”

새벽 감성에 빠져 옛 연인이 떠오른다면 일기장이나 SNS에 써도 되련만.

래퍼 더씬은 굳이 가사로 승화시키는 타입이었던 모양이다.

이 정도면 그녀의 맞디스랩도 정당방위 인정을 해 줘도 될 것 같다.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이것만큼 확실한 분위기 반전은 없긴 해.’

이미 그쪽에서 서림을 걸고넘어졌다.

누군가는 정말로 서림의 잘못으로 더씬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본 줄로만 알 텐데.

얌전하게 응수했다가는 이미지 회복도 제대로 못 하고 묻힐 수가 있다.

‘게다가 똑같은 사람이고 똑같은 연예인이지만, 이미지란 게 있잖아.’

전 걸그룹 멤버가 바람을 피웠다? 남들보다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처럼 몰아갔다는 점은 가중처벌감이었다.

그녀가 힙합으로 응수한다는 것도 지금 보니 좋은 방법이었다.

싫어하는 래퍼들도 있다지만 디스도 하나의 문화로 정착된 곳 아니던가.

알앤비나 발라드 곡이라면 몰라도 힙합곡이 이 정도면 어휘도 순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쪽에서 먼저 랩으로 건드렸으니까 같은 방법으로 받아치는 거 괜찮은 것 같은데요? 공중파 가요 심의는 통과 못 할 수도 있지만.”

이 곡을 들고 음악 방송을 나가는 게 아니라면야 상관없겠지.

내 마음은 당혹에서 점점 ‘그럴 수도 있지’로 바뀌어갔다.

내게 합격, 불합격 여부를 통보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서림은 내 말을 듣고 크게 안도한 듯이 웃었다.

“그렇죠? 다행이에요. 래퍼 지인 말고도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는 분이 계셔서.”

보컬 중심의 이 회사에서는 그녀에게 이런 확답을 주는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다.

서림도 속이 터지는 것과는 별개로 맞디스를 해도 될지 자신이 없었는데 내 말에 용기를 얻은 듯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서림 씨를 부추긴 것처럼 되는 거 아니야……?’

괜찮냐는 눈빛으로 라솔을 슬쩍 바라보자 라솔은 내 책임을 덜어주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봐 줄 제삼자의 의견이 필요했는데 도움이 됐어요. 그냥 넘어가기에는 회사 차원에서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이었거든요.”

나는 라솔의 말을 듣고 기획사 직원으로서 공감했다.

소속 아티스트에게 이상한 꼬리표가 달리면 회사도 곤란하지. 그러나 회사가 나서서 할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다.

회사가 ‘서림 씨의 이전 연애 관계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하면서 공식 입장을 내면 서림의 말대로 구차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새 회사와 새로 시작하는 이 타이밍에는 서림 씨가 직접 나서는 게 가장 깔끔할 거야.’

이리저리 생각해 봐도 내가 낼 결론은 이것 하나였다.

한 사람의 아티스트가 활동하는 데에 걸리적거릴 방해물을 치우는 일이다. 잡음이 일어나 봤자 화이트 노이즈 수준이지.

내가 조금 더 확신이 담긴 눈으로 서림을 바라보자 그녀는 마음이 편해졌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기왕 하는 거, 확실히 먹일 방법이 있는데요.”

“완전히 묻어버리시려는 건 아니죠……?”

“제가 한번 들이받았다고 다시 일어서지도 못한다면 그건 자기 그릇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거죠.”

역시 힙합인. 이거야말로 힙합 정신이 아닐까.

당한 만큼은 돌려주겠다는 그녀의 의지가 전해져오는 듯해서 나는 가만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이것도 여쭤보고 싶어서 상의를 드린 건데…….”

“제가 더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있나요?”

“여기로 직접 모셔와 놓고 부담 드리려는 게 아니라, 정말 문의로 들어주세요. 그 사람 성격을 아는 몇몇 래퍼 지인들도 내는 김에 피처링을 넣으면 효과적일 거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피처링을 내게 상의한다는 것은…….

이 정도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예상이 갔다.

서림은 원하는 게 있다는 눈으로 내게 똑바로 시선을 보냈다.

“아이돌 후배가 필요해요.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기왕이면 잘생기고…….”

그녀는 주저하는 듯하더니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강조했다.

“진짜 잘생긴.”

***

서림의 ‘효과적으로 한 방 먹일 방법’이란 것은 이러했다.

[남자 목소리는 남동생이었다고 설명을 해도 안 믿으려고 하더라고요. 저한테 남자 문제가 있으니까 피차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싶은 것 같아요. 그런데 이건 저뿐만 아니라 제 남동생도 억울할 일이잖아요? 바로잡을 건 바로잡아야죠.]

[그래서 가사에…….]

[네. 그런데 저 혼자 주절주절하는 것보다는 다른 후배의 도움을 받는 게 좀 더 생생하게 전달되지 않을까 해서요.]

그러니까 남동생 역할을 맡아 줄 후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콕 집어서 ‘잘생긴 아이돌 후배’라고 말한 이유도 있었다.

[연애 당시에도 그 사람이 TV 같은 데서 아이돌을 보면 겉멋만 들었다느니,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았거든요. 저도 아이돌이었는데 배려가 없었죠.]

이 이야기만 듣고도 래퍼 더씬이 어떤 스타일인지 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래퍼 중에서도 ‘친아이돌’파와 ‘반아이돌’파의 간극이 명확했는데 그는 확실한 반아이돌 부류였다.

‘그런 사람 앞에 매력 레벨 11짜리 아이돌 중의 아이돌을 데려다 놓으면 확실한 도발이 되긴 할 거야.’

우리는 가만히 있었는데 아이돌이 랩 한다고 괜히 시비 거는 래퍼를 접한 적이 있어서 나름 잘 안다. 지오엘이나…… 지오엘 같은.

그래놓고 걸그룹은 좋아한다는 점까지 비슷했다. 더씬도 서림이 걸그룹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며 호감을 느꼈을 거 아냐.

‘지오엘은 웃기기라도 하지.’

해랑의 SNS에 자꾸 좋아요를 눌러서 모르는 척하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지오엘은 생각보다 더 끈질긴 사람이었다.

내가 잠시 아이리스를 맡게 되었을 당시, 뜬금없이 ‘지오엘이란 래퍼분한테서 피처링 제안이 왔는데…….’라며 그의 이름을 다시 들었을 때의 황당함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의 회개힙합 이미지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적당히 무시하라고 말해둔 상태다.

그런데 끈질긴 래퍼는 지오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요즘에도 저한테 피처링 제안하시는 래퍼분들이 계신데…….”

“아직도 그런다고?”

회사에 복귀하자마자 작업실에 있던 해랑에게 찾아가 서림의 이야기를 전하자 해랑은 곤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지오엘도 지금은 이미지가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원래는 힙합 서바이벌의 심사를 맡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래퍼였다.

그리고 지오엘을 거절한 해랑과 함께 작업을 하면 자신이 지오엘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다른 래퍼들에게서 피처링 제안이 쏟아진 적이 있었다.

“이사님이 피처링은 제가 판단하라고 하셔서 전부 거절하고 있었거든요.”

“음. 그건 잘했어.”

마음이 안 내키면 안 하는 게 낫지.

그런데 내 생각보다 끈질김의 정도가 심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듯하다.

마침 작업실에 있다가 옆에서 내 이야기를 같이 전해 들은 준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분들은 형이 넘어야 할 퀘스트 단계처럼 보이나 봐요. 피처링 맡겨둔 것도 아니고.”

“누가 뭐라고 그래?”

“저희도 모르고 있었는데 도한이가.”

원조 힙합인이 또 무슨 일을?

힙합인의 이름이 나와서 잠시 긴장했는데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었고 ‘도한이 이야기를 전해줬다’ 수준의 이야기였다.

“누가 아이돌들은 몸을 사린다느니 하는 가사를 썼다는데 형한테 피처링 제안한 적 있던 분이었고, 내용도 은근히 형 이야기 같더라고요.”

우리가 계속 무시로 일관하자 과거의 지오엘처럼 흑화한 마음을 표출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아이돌 래퍼 디스를 보면 분노하는 도한의 레이더에 그게 딱 걸린 거고.

“괜찮은 분들은 오며 가며 마주쳐도 매너 있게 대해주시는데 그분들은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해랑도 이런 이야기는 피곤하게 느껴지는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피처링이 부담스러우면 내가 방금 한 이야기도 그냥 넘겨도 돼. 서림 씨도 꼭 우리일 필요는 없다고 했거든. 원래 아이돌 쪽으로 인맥이 있으니까.”

서림도 아이돌 기획사의 걸그룹 출신이다.

그녀는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알고 지내는 다른 아이돌 후배들도 있으니 편하게 선택해달라고 했다.

그런데도 내게 먼저 문의한 건, 해랑처럼 한눈에 봐도 임팩트가 강한 사람은 찾기 어려워서겠지.

그러나 이런 일에는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법.

내가 거절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하자 해랑이 진지한 표정으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냥, 한 번에 처리할까요?”

“뭘 처리해……?”

귀찮게 하는 래퍼들을?

어둠의 뒷골목 조직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는데 해랑이 말을 덧붙였다.

“제가 협업하기 껄끄러운 사람이 돼도 그분들이 계속 저한테 피처링을 요청하실지 궁금해서요.”

해랑도 래퍼는 래퍼였는지, 제법 대담한 결정을 내릴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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