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5화
“언니! 거기서 조금만 더 숙여 봐요.”
“에니야. 넌 어려서 모르겠지만 언니는 그렇게 하면 허리가 아파…….”
“언니가 먼저 나이 얘기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그리고 여기 새민 언니는-.”
“아, 나 눈에 안 띄게 그린이 뒤에 숨어 있었는데.”
<타임스테이지>의 촬영 장소로 제공된 베터 엔터테인먼트의 한 안무 연습실.
홈그라운드인 본인의 소속사로 와서 신난 에니는 특유의 발랄함을 뽐내며 언니들에게 안무 연습을 재촉했다.
‘저걸 잘하고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예전엔 방송 촬영이 익숙지 않은 에니가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박형주를 지켜봤다면, 지금은 박형주가 에니를 지켜보고 있었다.
분명 촬영을 잘하면 좋은 일인데. 에니가 활약한다는 것은 박형주의 비중이 줄어든다는 것.
그러나 에니는 본인이 추천해서 출연시킨 데다가 베터 엔터테인먼트의 차기 걸그룹 멤버였다.
잘되면 회사에도 좋은 일이었기에 무어라 불만을 표하기도 어려웠다.
박형주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안지택 PD를 바라봤다. 그는 스태프와 편집에 관해 논의 중이었다.
“여기, 안무 연습 중간중간 대화하는 장면들은 많이 살려보자고.”
“<쉰셋돌> 때는 안무 연습 하고 나면 다 녹초가 돼서 방송에 쓸 수 있는 게 없었는데. 같은 아이돌인데도 분위기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네요.”
“그땐 다른 데서 분량을 많이 뽑았으니까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좀 살살 해달라고 부탁해야 했을 거야.”
“그래도 만호 씨 춤 배우는 장면은 꽤 재밌었는데 말이에요.”
안지택 PD와 스태프는 당시 신셋 멤버들이 팀 미로식 트레이닝을 받느라 죽을상이었던 것을 추억처럼 떠올렸다.
박형주는 속 편하게 웃는 안지택 PD를 보면서 자신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는 것을 느꼈다.
‘내 분량이 어찌 되었든 안 PD는 시청률이 우선이겠지. 어쨌든 방송이 잘되면 안 PD의 실적이니까.’
그는 머릿속에서 안 PD에 관한 평가를 수정했다.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이익을 따라 이곳저곳 잘 옮겨붙는 사람이었다.
귀가 얇아서 자기 얘기를 잘 들어주는 만큼 남 이야기도 잘 듣는 것이 문제였다.
가만히 믿고만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 챙겨 먹으리란 생각에 박형주는 촬영이 끝나고 슬쩍 안지택 PD에게 다가갔다.
“혹시 출연진 중에서 특별히 밀어주려는 멤버가 있으십니까? 작년에도 원만호 씨가 <쉰셋돌>을 촬영하면서 연예대상 쪽에서 상을 받으신 거로 알고 있는데.”
“예? 아니요. 이런 방송은 시청자들이 예능보다는 가수 리얼리티로 보는 경향이 커서 연예대상 쪽으로 어필하긴 어렵습니다. 원만호 씨야 워낙 유명한 코미디언이시니 예외였고…….”
안지택 PD는 박형주의 뜬금없는 질문을 듣고 의아해했다.
‘베터 소속인 에니를 더 신경 써달라는 말인가?’
아직 데뷔도 안 한 연습생이 예능 신인상부터 받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만 빼면 출연진들과도 잘 어울리고 알아서 잘하고 있었기에 흡족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박형주의 입에서 나온 것은 다른 이의 이름이었다.
“그린이 요즘 반응이 좋던데 혹시 상 하나쯤 노리신다면 저도 파트 분배에 참고할까 했죠. 마침 <쉰셋돌>에도 나왔던 모노크롬과 같은 계열 소속사고 하니. 섭외하실 때부터 띄워볼 생각이 있으셨다거나…….”
저번에 류현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안지택 PD가 뉴마와 따로 연락하는지 은근슬쩍 떠보려는 목적도 있었다.
한배를 탄 이상 다른 목적이 있다면 웬만하면 전부 밝혀줬으면 했다.
그러나 안지택 PD는 평소처럼 남들 말에 귀를 열고 있었을 뿐, 다른 마음이라고는 없었다.
“아, 그린 씨 말이죠. 가장 적극적으로 나와서 섭외했던 건데 저도 이렇게 잘해줄 줄은 몰랐습니다. 출연자들끼리 상성이 잘 맞아서 다행이었죠.”
“그렇군요.”
박형주는 별로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며 싱겁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자리를 떴다.
안지택 PD는 박형주가 다른 이의 수상 가능성까지 신경 쓰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쪽 소속사와 친해 보이기라도 하나?’
따지자면 그쪽은 손영식 PD와 더 친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자신은 <쉰셋돌>에서 한 번 협업했을 뿐이고 그것도 라솔의 추천이었는데 손영식 PD는 자신이 담당하는 방송에 모노크롬을 여러 번 부르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니 아이리스가 국내 활동을 이어갈 거라는 소식도 손 PD가 전해줬었지.’
뉴마와 뉴레인은 소속 그룹이 하나씩밖에 없는, 아이돌 기획사치고는 작은 회사들인데 그렇게 우호적인 태도로 챙겨줄 이유가 있나?
생각하다 보니 신경 쓰이는 점들이 있었다. 최근 그는 방송국에서 견제받는 듯한 느낌을 받고는 했다.
‘특히 임주미.’
천상식을 ZBS에 빼앗긴 후에 몇몇 PD들이 섭외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와중에 임주미 PD가 더 섭외하기 어려운 배명희를 데려온 것이다.
임주미 PD는 배명희가 걸어온 길에 집중하고 싶었을 뿐, 예능 화제성을 노린 게 아니라고는 했지만, 힐링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녀의 괄괄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믿기 어려운 소리였다.
똑같이 중견 가수와 아이돌을 데리고 제작하는 예능. 방영 시기는 임주미 PD 쪽이 더 뒤.
‘이렇게 되면 연말 시상식에 영향이 가는 게 아닌지…….’
이렇게 박형주와 안지택 PD, 두 사람이 임주미 PD와 뉴마의 연계에 의구심을 품으려 할 때였다.
두 사람의 경계심을 자극한 것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뭐? 이라솔 씨가 올해에도 음악대상을 노려?”
박형주는 느닷없이 직원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미간을 찌푸렸다.
“친한 스태프들과 대화하면서 은근히 기대를 보였답니다. 확실히 올해 음원 성적도 준수하고 여러 방송에도 계속 얼굴을 비쳐서…… 연말 시상식을 고려한 행보라고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있어 보입니다.”
박형주는 라솔이 음악대상을 받았던 해에 후보에 같이 오른 전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에게 밀린다면 그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었다.
은근히 거슬리는 뉴마와 확실히 위협이 되는 이라솔. 한쪽만 신경 쓰자면 당연히 후자였다.
덕분에 박형주의 머릿속에선 뉴마에 관한 일은 우선순위 저 멀리로 떠밀려 나갔다.
***
“정말 라솔 씨한테 이런 역할을 맡겨도 괜찮을까요?”
[뭐 어때요. 음악대상 소문 이야기도 제가 먼저 꺼냈는걸요.]
스마트폰 스피커 너머로 라솔의 가벼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음악대상 정도 되는 사람이면 담이 큰가…….’
음악대상 카르텔을 방해하려는 우리의 의도가 들키면 방송에 차질이 생길 것이 뻔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저희는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태도를 고수한다고 해도 남들의 의심을 우리 마음대로 차단할 수는 없는 법.
여기서 나는 위험을 줄일 다른 방법을 고안해 냈다.
이른바 ‘어딜 보시는 거죠? 그건 잔상입니다만.’ 작전.
허상의 라이벌을 내세워서 집중을 분산시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나 내세운다고 라이벌로 여기지는 않을 테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역할에는 라솔만큼 적임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라솔에게 슬쩍 이야기를 꺼냈는데, 라솔은 흔쾌히 내 제안을 수락해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요즘 은근슬쩍 음악대상에 관심이 있는 것처럼 여기저기 말을 흘리고 다녔다.
이건 임주미 PD가 소문을 활용하는 것을 보고 배운 것이었다.
라솔을 탱커로 삼는 것이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는데 그녀는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나를 안심시켰다.
[제가 정말 음악대상을 노리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소문으로만 끝나고 말 거잖아요? 제 이미지가 손상되는 것도 아니고 관계자 사이에서 잠깐 말 돌다 마는 것뿐인데요, 뭐.]
“그런데 라솔 씨가 정말로 대상 후보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노래도, 방송 활동도 반응이 좋았잖아요.”
[재작년은 저한테 의미 있는 해여서 대상도 감사하게 받았는데, 올해는 글쎄요. 제가 대상이라고 하면 저도 수긍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준다고 해도 거절할래요.]
멋있다. 있는 자의 자신감.
라솔은 한 번 받아봤으니 그만큼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낸 게 아니라면 그 정도의 감동을 느끼지 못할 것 같다고 한다.
해랑이 피처링으로 참여한 곡으로 음악 방송에 출연할 때도 혹시나 다른 후배 가수들의 1위 기회를 빼앗을까 봐 특별 출연만 하고 말았던 그녀였다.
‘라솔처럼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만 있으면 이렇게 머리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다시 한번 라솔이 우리를 도와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되새기고 있는데 라솔이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이사님이 신경 쓰이신다면…… 사실 저도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요.]
“무슨 일인데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야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이번에도 저희 회사 일인데, 의견을 좀 듣고 싶어서요.]
라솔은 아티스트의 범위를 벗어난 일을 내게 상담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행히 내 의견을 듣고 일이 어그러진 적은 없지만…… 날 이렇게 의지해도 괜찮은 걸까?
그래도 그녀가 필요하다면 당연히 나서야지.
요즘 특히 밖으로 나돌기 좋아하는 나는 라솔과 약속을 잡고 그녀의 회사로 찾아갔다.
“성운 씨는 작업하느라 바쁘신가 봐요?”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운 색의 후드를 눌러쓰고 헤드폰까지 써서 세상과 단절되었음을 온몸으로 표시하는 성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내가 묻자 라솔이 웃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 회사에 기가 센 분이 한 분 더 들어오셔서요. 말 걸지 말라고 저러네요.”
어쩐지 저번에 봤을 때보다 쪼그라든 느낌이더니.
누나 눈에 띄었다가 괜히 한 소리 들을까 봐 몸을 숨긴 막내 남동생 포지션이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라솔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한 것도, 라솔의 회사에 새로 들어왔다는 그 아티스트 때문이었다.
잠시 앉아서 기다리자 라솔이 그녀를 데리고 다가왔다.
‘라솔 씨가 말한 것처럼 기가 세 보이지는 않는데.’
그녀는 2세대 걸그룹 출신의 ‘주서림’.
그룹 해체 후 솔로 아티스트로 활동했으며 이번에 라솔의 회사와 새로 계약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러나 새 회사와 계약 후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활동을 시작해야 할 그녀에게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제가 작년까지 공개 연애를 했었어요. 래퍼 더씬이란 놈, 아니, 사람인데. 아세요?”
“어, 으음. 이름은 들어봤던 것 같네요.”
서림의 질문에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이름을 들어봤을 정도면 꽤나 이름이 알려진 래퍼라는 뜻이다.
해랑에게 힙합 서바이벌 섭외가 왔던 것과 지오엘 사건도 있어서 어느 정도 유명한 래퍼들은 이름을 숙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공개 연애……. 어려운 길이었을 텐데.’
그런데 공개 연애를 과거형으로 말한다는 건 이미 헤어졌다는 뜻이겠지?
내 궁금증에 대답을 해주듯이 서림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좋게 헤어진 게 아니고 일이 좀 있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그놈, 아니, 그 사람이 앨범을 냈는데 말이에요.”
“설마…….”
“네. 한 곡 가사에 저로 추정되는 얘기를 써 놨더라고요.”
“아니, 저런……!”
라솔이 옆에서 “저희 회사의 기존 소속 가수들은 발라드나 알앤비 메인이다 보니 이런 일은 겪어보지를 못해서요.”라며 내게 상담을 구한 이유를 덧붙였다.
‘우리도 디스 건에 휘말린 적은 있어도 힙합계에는 빠삭하지 못한데.’
하지만 이건 과몰입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래퍼 더씬은 서림과 헤어진 후 ‘상처받은 마음을 힙합으로 달래네’ 같은 랩 가사로 그녀의 과실처럼 은근슬쩍 언플을 했다고 한다.
“저도 이제 새로 시작하려는데 그 이미지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녀서……. 그렇다고 기자를 불러놓고 해명하는 건 너무 구차한 것 같고. 차라리 저도 똑같이 노래로 응수하는 게 낫겠더라고요.”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마음을 담아 고개를 크게 끄덕끄덕했다.
서림은 태블릿으로 메모 파일을 하나 열더니 내 앞에 내밀었다.
“그래서 제가 가사를 미리 좀 써 봤는데…….”
나는 도움이 된다면야 열심히 상담에 응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그녀가 내민 태블릿 화면을 확인했는데.
[굳이 술 마시고 연락처를 뒤져, 구질구질하게 연락하면 뒤져…]
……내가 지금 살해예고장을 보고 있는 건가?
예상치 못한 제2의 힙합인 등장에 내 눈동자는 잠시 갈 길을 잃고 허공을 헤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