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4화
<상상 카페>의 첫 촬영은 배명희와 모노크롬이 호스트이자 게스트였다.
다른 사람들의 삶에 관해 들어보기 전에 먼저 본인들의 삶에 관해서 대화를 나눠 볼 필요가 있었다.
남의 이야기를 들어주더라도 갈팡질팡 휘둘리는 마음으로 듣는 것보다는 중심이 잡힌 상태로 듣는 게 서로에게 좋으니까.
오늘 배명희와 모노크롬이 나눌 대화 주제는 역시나 ‘가수가 아닌 자신의 모습’이었다.
“선배님은 가수가 아닌 자기 모습을 상상해 보신 적 있으세요?”
“가수가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똑같이 살지 않았을까? 한적한 곳에서 밭도 가꾸고, 사람도 만나고. 지금 일상도 참 마음에 들거든.”
우형의 질문에 배명희가 막연한 느낌으로 대답했다.
아직 공식적으로 은퇴하지 않은 배명희는 현재 일상과 은퇴 후의 삶을 크게 구분 짓지 않았다.
그러나 우형이 질문을 달리하자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만일 처음부터 가수가 아니라 다른 직업을 선택했다면요?”
“으음. 그러네. 아예 가수가 된 적이 없었다면…….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봤네.”
그녀는 다른 직업을 염두에 둔 적이 한 번도 없는 듯했다.
그만큼 그녀의 인생에서 노래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게 아닐까.
멤버들도 어릴 때부터 가수를 꿈꿔서 아이돌이 된 이들이었기에 흥미를 갖고 그녀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준해가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배명희에게 질문했다.
“그러면 학생 때부터 가수가 꿈이셨어요?”
“아마 국민학생, 중학생 때는 다른 꿈이 있었던 것 같은데 너무 옛날이라. 그런데 그건 기억이 나. 처음 내 노래를 냈을 때.”
그러면서 배명희는 오래된 옛 기억을 소환해냈다.
“내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재킷에 떡하니 찍혀 있는데. 그땐 레코드판이라 앨범도 이만했어. 그래도 그게 참 기분이 좋더라고.”
아무리 옛일이어도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꿈이 이뤄지는 기쁨은 똑똑히 기억이 나는 듯했다.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우형도 예전 기억이 떠올랐는지 금방 회상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나도 생각나. 정각 될 때까지 음원 사이트 계속 새로고침 하다가 우리 데뷔 앨범이 딱 떴을 때.”
“저희도 처음 재킷 사진 보면 표정이 확실히 어색하더라고요.”
“어디 보여줘 봐. 나만큼 어색했나 보게.”
배명희의 요청에 출연진들은 잠시 스마트폰으로 검색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 한이가 “나는 이때도 안 어색하고 잘생겼는데?” 하며 혼자 빠져나간 탓에 약간 빈축을 사긴 했지만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좋은 기억들도 떠올라서 다행이야.’
배명희가 힘든 기억을 딛고 다시 노래를 부르게 된다면 기쁘겠지만, 은퇴하더라도 그건 그녀의 선택이다.
다만 다른 슬픈 기억 때문에 힘들어서가 아니라, 본인이 정말 할 만큼 했고 여한이 없다고 생각해서 내려놓았으면 했다.
그리고 이런 대화들이 그녀가 마음을 결정하는 데에 좋은 영향을 주리란 생각이 들었다.
‘임주미 PD는 방송 내에서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리기를 원하는 듯하지만.’
나는 그녀가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천천히 결정하기를 바랐다.
“마침 방송 덕분에 카페 임시 주인장이 됐으니까, 촬영하다가 재능을 발견하면 카페를 열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커피는 좋아하니까.”
배명희는 임주미 PD는 마음에 안 들어도 이 카페 배경만큼은 마음에 드는지 카페 창업이라는 다른 선택지도 꺼내 들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지는 건 나쁘지 않지.
그녀는 이번엔 화제를 멤버들에게 돌렸다.
“후배들은 만일 가수가 아니면 뭘 하고 싶었어요?”
“저는 원래 프로듀서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우형은 예전에도 말했었지. 데뷔를 못 하면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다고.
그러나 옆에서 준해가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그런데 형 지금도 프로듀서잖아.”
“그러게……? 그럼 나 뭐 하지?”
아이돌 겸 프로듀서가 되어 버린 우형은 갑자기 진로 고민에 빠져 버렸다.
‘이쪽도 다른 길은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나 보네.’
다른 길로 샐 생각 없이 한 길만을 진득하게 걸어온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었다.
그리고 아이돌 외에 후보군을 두지 않았던 것은 다른 멤버들도 비슷했다.
“진짜 어릴 적엔 장래희망 조사서에 선생님 같은 걸 써냈던 것 같은데…….”
“무슨 선생님?”
“그냥 선생님.”
해랑이 영혼 없는 얼굴로 선생님을 지망했었다고 하자 멤버들이 처음 듣는다는 듯 흥미를 보였다.
그러나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냥 뭐라도 써서 내기 위한 장래희망이었다는 듯하다.
무난하긴 하지. 과학자, 운동선수, 선생님…….
“형도 잠깐 여우 형 옆에 가서 생각하고 있어.”
재민이 해랑에게도 ‘생각하는 의자’ 형을 내리자 배명희가 도움을 주려는 듯이 끼어들었다.
“해랑 후배는 배우 해도 되겠는데, 뭐.”
그 말에 한이가 “네에? 배우요?” 하며 과장되게 놀랐다.
해랑의 연기 실력을 아는 멤버들도 웃음이 터졌다.
여덟 살 시연에게도 ‘발음이 영어 하는 것 같고 말이 너무 빨라요.’라는 평을 들었던 해랑이었다.
멤버들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로 웃는 것을 보고 해랑의 연기 실력을 모르는 배명희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해랑 후배는 연기는 영 소질이 없나?”
“형은 래퍼라서요.”
재민이 해랑의 ‘저 래퍼라서’를 변형한 대답으로 해랑의 배우 가능성을 깔끔하게 넘겨 버렸다.
해랑도 더 생각나는 건 없는지 준해에게 순서를 넘겼다.
“준해는…… 똑똑하니까 뭐든 잘할 것 같은데.”
“그런데 만일 모노크롬 아니었으면 내가 제일 재미없게 살았을 것 같아.”
보통 좋은 대학을 나오면 좋은 회사에 취업하는 것을 다음 목표로 삼기 마련이니까.
아이돌로 지내면서 힘든 일도 많았겠지만 준해는 지금의 삶 외에는 크게 흥미가 없는 듯했다.
그러나 막내의 이런 발언을 형들은 놓치지 않았다.
“준해는 우리를 너무 좋아해.”
“역시 형들이랑 지내는 게 최고로 재밌지?”
“그럼 나는 가수 안 하면 준해 데려다가 키워야지.”
“아, 나를 형이 왜 키워.”
막내에게 효도 받기를 원하는 우형이 은근슬쩍 숟가락을 얹었다가 준해에게 이상한 소리 말라며 핀잔을 들었다.
정해진 진로가 있었던 한이도 이어서 입을 열었다.
“저는 아이돌 아니었으면…… 건물주?”
“야, 희망 사항 말고.”
“농담이고.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따라서 음악을 배웠거든요. 아이돌 아니었으면 아마 성악가가 됐을 거예요.”
한이는 이 말을 하고 잠시 생각에 빠진 얼굴이더니 “아니면 제 마음대로 피아니스트가 됐을 수도 있고.”라는 말을 덧붙였다.
‘한이 아버님은 한이가 아이돌을 선택 안 했더라도 속은 썩으셨을 것 같아…….’
아버지의 말을 고분고분 듣는 자신의 모습은 잘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로는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니까 어쩔 수 없지만.
멤버들이 한 명씩 각자의 다른 인생을 상상해 보고, 남은 것은 실제로 연예계 은퇴 경험이 있었던 재민이었다.
“나는 내가 댄스팀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내가 아이돌이 아니었으면 댄스팀에 들어갈 기회도 없었을 것 같더라고. 그냥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하고 지내지 않았을까.”
우형은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재민의 모습이 또 떠올랐는지 눈썹이 얕게 내려갔다.
그래도 재민은 멤버들을 슬프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어느 평행세계에서 내가 아이돌이자 댄스팀 단원으로 있다는 걸 알게 되면 그 명재민을 엄청나게 부러워했을 것 같아. 그러니까 저는 지금이 제 최고의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다른 평행세계에서 복권 10억에 당첨되었으면?”
재민의 생일 선물로 즉석 복권을 고른 적이 있는 한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재민은 복권에 관해서는 주관이 무척이나 확고했다.
“지금 여기 있는 나도 복권 당첨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아? 그럼 하고 싶은 일 하는 지금이 낫지.”
재민의 확신이 담긴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나까지 안심되는 기분이었다.
우형이 모노크롬은 괜찮으니까 오히려 팬들을 안심시킬 기회로 활용할 수 있지 않겠냐고 했는데. 정말 그 말 그대로였다.
‘컬러즈가 나중에 방송으로 이 말을 들으면 불안한 마음은 어느 정도 가실 것 같아.’
재계약 시기가 다가오면 팬들은 내심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멤버들이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것과 전원이 같은 마음으로 계약을 이어나가는 것은 다른 문제니까.
그런데 멤버들의 이런 확신에 찬 모습, 마음이 통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더 편안한 마음으로 멤버들을 믿고 응원할 수 있겠지.
‘이 시기에 이런 말을 할 기회가 많지 않았는데 잘됐어.’
배명희도 후배들이 본인 직업에 확신이 있는 것이 좋아 보였는지 기특하다는 표정이었다.
걱정이 많았던 방송은 우리의 방식대로 첫걸음을 잘 뗀 것 같아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상상 카페>의 첫 촬영은 아침에 시작하여 늦지 않은 시간에 종료되었다.
민형이 운전하고 모노크롬 멤버들이 탄 퇴근길 차 안.
준해가 창밖의 교외 풍경을 구경하다가 문득 오늘 촬영 내용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게 있는지 운을 뗐다.
“그런데 있잖아. 좀 이상한 거 있어.”
“이상한 게 어딨는데?”
재민이 고개를 내밀어 준해가 바라보는 쪽을 같이 쳐다보자 준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밖에 이상한 게 있다는 게 아니고. 오늘 촬영 주제를 미리 알려주셨잖아? 그래서 요즘 계속 생각해 봤거든.”
생각할 거리가 있는 주제였고 계속 생각해 본 것은 그리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준해의 마음에 걸리는 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되돌아보니까 우리 재계약할 때 왜 그렇게 막막했지? 싶은 거야. 그래도 회사랑 재계약하기로 합의됐으면 조금은 한숨 돌려도 되는데. 그땐 ‘앞으로 뭐 하지?’ 이런 생각까지 했었던 것 같아.”
당시엔 똑같이 불안해할 다른 멤버들 앞에서 꺼낼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묻어뒀던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번 촬영 주제를 생각하며 그때의 기억을 다시 꺼내 보니 이상한 점이 몇 군데 있었다.
당시 뉴마는 재계약을 앞두고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고, 모노크롬은 재계약을 하고도 상황이 좋아지지 않았다.
그래도 재계약은 성사되었고 모노크롬은 법적으로 2년의 유예기간을 벌었다.
그런데 자신은 왜 그룹이 해체되기라도 한 것처럼 진로 고민까지 하며 막막함을 느꼈을까.
“그냥 내가 마음이 불안정해서 그랬나? 생각해 볼수록 이상하더라고. 우리가 잘못되는 꿈이라도 꾼 것처럼.”
준해는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어쩐지 다른 멤버들은 준해가 말하는 바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나도 그때쯤 아버지랑 말다툼 크게 한 적 있었는데. 뭐가 마음대로 안 돼서 되게 억울했던 기분은 기억나거든. 왜 그랬지?”
한이 또한 고개를 갸웃하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이는 원래 아버지 말씀을 잘 따르는 타입이 아니었다. 재계약 문제로 부모님과 말다툼을 했더라도 특별히 속이 상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때만큼은 좌절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더 예민하게 굴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이는 우형도 마찬가지였다.
계약 기간이 끝나는 1월 1일.
자신이 왜 그렇게 다 끝난 것처럼 착잡한 마음으로 음악대상을 시청했는지 정확한 이유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고민한 적이 있었는데…… 우리가 숙소를 처분하려고 한 적은 없었잖아?”
해랑까지 위화감을 느끼고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당시 상황에 비해 과하게 불안한 감정을 느꼈던 것은 확실한데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이상한 분위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재민뿐이었다.
“그때 회사에 무슨 일 있었어? 나는 그때 회사에 없었으니까…….”
재민만이 모른다면 재계약 과정에서 회사에 무슨 일이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멤버들이 다 같이 기억을 뒤져봐도 재민이 모를 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준해는 여전히 아리송한 기분으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뒀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는 진짜로 잘못된 적이 있었고 그때 신 같은 존재가 나타나서 도와준 게 아닌가 싶어.”
준해의 말대로 비현실적인 소리였다.
그러나 그것 외에 그 이유 없는 불안함을 설명할 길은 없었다.
대표가 재계약 없이 모노크롬을 해체시키려고 했던 것, 퀘스트가 발생하면서 대표의 의지와 다르게 모노크롬이 유지된 것은 멤버들은 모르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 촬영을 계기로 멤버들의 마음속에는 이 알 수 없는 위화감에 관한 의문이 싹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