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33화 (333/430)

# 333화

방송의 틀이 잡히고, 나는 방송국으로 찾아와 임주미 PD에게 완성된 기획서를 전달받았다.

배명희와 모노크롬이 출연하게 될 방송은 임주미 PD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멀쩡한 힐링 기획으로 완성되었다.

‘작가님의 힘인가?’

처음에 우리를 섭외하며 별소리를 다 하기에 자극적인 요소를 내세울까 봐 걱정이 컸는데.

방송의 메인이 될 배명희가 임주미 PD보다 우리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덕분에 내게는 꽤 큰 발언권이 생겼다.

배명희를 설득한 책임도 있으니 만일 과한 요소들이 보이면 적극적으로 나서서 조율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기획 자체는 임주미 PD가 처음에 말한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과하다고 생각할 만한 요소는 보이지 않았다.

‘만일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를 생각해 본다…….’

방송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임주미 PD가 처음에 우리를 섭외하며 얘기했던 은퇴 이야기도 이 주제와 연결되었다.

만일 배명희가 공식적으로 은퇴했다면, 만일 모노크롬이 지금까지 이어오지 못했다면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그런 생각할 거리가 있는 방송이었다.

‘모노크롬도 인터뷰할 때 가끔 그런 질문을 받곤 했었지. 아이돌이 아니었다면 무슨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냐는.’

누구나 한번 생각해 볼 만한 주제였다. 그러니 게스트로 누구를 초대해도 심오한 대화를 나눠볼 수 있을 듯했다.

배명희는 기획 자체에는 크게 관여할 마음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의 몫까지 대신하여 대표로 기획서를 꼼꼼히 확인하고 있으니 옆에서 임주미 PD가 설명을 덧붙였다.

“사이코 드라마라는 게 있잖아요.”

“네? 사이코요?”

기획서를 읽는 데에 정신이 팔렸던 내가 귀에 들리는 대로 반문하자 임주미 PD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저한테 은근슬쩍 사이코라고 하고 싶으셨던 건 아니죠?”

“아뇨. 그럴 리가요.”

그럴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왠지 찔리는걸.

광기에 찬 그녀를 표현하기에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왔는지도 모르지.

내가 시치미를 떼자 임주미 PD는 더 캐묻지 않고 다시 본래 하려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사이코 드라마, 심리극이요. 거기에서 영감을 얻은 기획이에요. 다른 삶을 사는 자신을 연기하거나 상상해 보면서, 지금 직업이나 인생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보자는 거죠.”

“그럼 호스트들이 좀 더 전문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저희는 방송이니까 그렇게 깊게 파고 들어가진 않을 거고, 토크쇼에 가깝다고 보시면 돼요. 그냥 다른 인생을 사는 자신을 상상해본다, 정도?”

임주미 PD가 이전에 식당을 컨셉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방송의 배경은 식당이 아니라 카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상상’의 일환인지 배명희는 가수 생활을 마치고 카페를 열었다는 배경 설정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송투유>에 출연하기 전까지 가수 활동은 오래 쉬었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은퇴를 하지는 않았다.

‘원래 연예인은 공식 은퇴 선언을 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더 적긴 하지만…….’

보통은 사람들에게 잊히는 것이 자연스레 은퇴로 이어지는 곳이지.

그러나 배명희는 다시 세상으로 나왔고, 사람들은 그녀의 노래를 더 듣고 싶어 한다.

집 안 곳곳에 장식된 과거 음반을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을 생각하면……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은 게 그녀의 본심이 아닐까.

그러니 배명희도 이 방송을 통해 ‘만일 은퇴했을 경우의 삶’을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사님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시죠? ‘이 직업을 선택 안 했더라면?’ 아니면 ‘이 일을 그만두면 어떤 모습일까?’ 같은 거. 평행세계에선 엔터사가 아니라 다른 쪽에서 일하고 계셨을 수도 있죠.”

“으음…….”

임주미 PD는 상상력을 발휘해보라는 의도로 말했겠지만 나는 평행세계의 내가 어떤지 잘 안다. 평행세계의 나는 백수 신분이었다.

‘아니, 1년 반이나 지났으니 지금쯤이면 다른 데에 취직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평범한 회사에 들어가서 평범하게 직장 생활 중이었겠지.

내게 최악이었던 회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고 해서 극적으로 환경이 좋아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 직업적으로는 지금이 만족스럽네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은 잘 떠오르지 않아서요.”

“하긴 이사님이나 되시는데 다른 일을 고르시기엔 좀 아깝죠.”

직함이 아까운 게 아니라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이 상황을 말한 건데…….

굳이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기에 나는 화제를 그녀에게로 돌렸다.

“PD님은요? PD 말고 다른 직업도 고려해보신 적 있으세요?”

어그로 끄는 실력을 보면 PD가 천직인 것 같은데……. 아니면 기자?

평범한 회사가 담을 그릇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 질문에 임주미 PD도 이런 고민을 한번 해 본 적 있다는 듯이 고개를 작게 끄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만일 잘리면 뭐 할지 고민해 본 적은 있었는데…….”

보통 그만두는 게 아니라 잘리는 것부터 생각하냐고.

어디 가서든 사고 칠 생각만 잔뜩인 거 아니야?

“젊으니까 뭐든 되지 않겠어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네.’

이런 스타일이기에 이 어지러운 방송계에서도 잘 살아남은 걸까.

음악대상 카르텔에 대적할 만한 공중파 방송 출연도 절실했고, 배명희의 과거를 향한 미련 어린 듯한 시선도 차마 잊을 수 없었고.

여러 손익이 맞아서 손을 잡게 되었지만, 여러모로 안 맞는 스타일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

촬영장인 카페는 1층짜리 주택을 개조한 아담한 공간이었다.

카페 대문 옆에는 ‘상상 카페’라는 문구가 음각으로 새겨진 작은 나무 간판이 달려 있었다.

몬클하우스만큼 주변이 허허벌판인 것은 아니지만 이곳도 꽤나 시골에 속했다.

모노크롬은 서울의 메인 숙소에서 오는 것보다 몬클하우스에서 출근하는 게 빠를 정도.

첫 촬영일이 되어서 처음 와 본 카페는 기획서를 처음 봤을 때만큼이나 신선한 느낌이었다.

‘처음엔 걱정만 많았는데 까보면 까볼수록 참 멀쩡해…….’

스태프들이 이리저리 돌아다니느라 어수선하기는 했지만 외견이나 내부 인테리어나 정말 ‘힐링’만을 겨냥한 느낌이었다.

도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세련된 카페 느낌과는 정반대였다.

나무 가구나 곳곳에 비치된 작은 화분, 찻잔 아래 깔린 레이스 도일리 등 소품 하나하나가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용한 곳이 좋다는 배명희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분위기가 딱 잔잔한 힐링 영화 촬영장으로 쓰일 것 같아요.”

내가 감상을 말하자 임주미 PD와는 다르게 순한 인상인 작가가 설명했다.

“요즘 힐링 예능은 영상미도 중요하거든요. 지금 인생에서 한 발짝 물러서 보자는 게 방송 컨셉이니까 배경도 일상에서 벗어난 느낌을 살려 봤어요. 이런 전원주택, 다들 한 번쯤은 꿈꿔 보잖아요.”

나는 그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도시인들의 이런 전원주택을 향한 로망, 나도 잘 알지.

몬클하우스를 구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영상미보다는 귀촌 느낌에만 충실하긴 했지만.

“방송이 잘되면 철거 안 하고 그대로 카페로 영업해도 괜찮을걸요? 물론 저희는 방송 일 해야 하니까 못 하겠지만 인수한다는 곳이 있으면 적당히…….”

아니, 그런 어른들의 사정까지 듣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방송 촬영 때만 잠깐 사용하고 없애기에는 아까운 공간이란 점에는 동감하지만 너무 환상이 깨지는 이야기잖아.

작가도 임주미 PD와 같이 일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사람이란 것을 인지하며 나는 시선을 돌렸다.

촬영 내내 오게 될 곳이라 출연진들은 공간에 익숙해지기 위해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구경 중이었다.

‘실제로 영업하는 카페도 아닌데 커피 향이 난다 싶더니…….’

커피 향기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배명희가 바 안쪽에서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임주미 PD가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듯이 웃으며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란 씨가 선생님이 커피를 참 좋아하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배경을 카페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여기 준비된 원두들도 보이시죠? 원하시면 얼마든 가져가셔도 돼요.”

“혼자 사는데 뭐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퉁명스럽게 대답한 배명희는 커피 서버에 담긴 커피를 두 잔에 나눠 따르더니 한 잔을 자신의 앞에, 한 잔을 임주미 PD……가 아니라 거리를 두고 구경하던 내게 내밀었다.

“따뜻할 때 마셔요.”

“가, 감사합니다.”

임주미 PD를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른 상냥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임주미 PD는 “저한테 냉정하시다니까요-.”라며 영혼 없이 우는 소리를 냈다.

집에서 밥까지 얻어먹어 놓고 할 소리는 아니지…….

나는 커피를 호록거리며 멤버들은 뭘 하고 있는지를 살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모노크롬은 카운터 앞에서 스태프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있었다.

“게스트분들이 가실 때 여기서 계산하고 가시는 거예요?”

“그럼요. 카페 컨셉이잖아요. 물론 진짜 돈을 받는 건 아니고, 영수증을 뽑아드리는 거죠.”

스태프가 이 ‘상상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될 멤버들에게 계산법을 설명했다.

이곳에 온 손님들은 음료나 디저트 등의 메뉴 값을 지불하고 가는 것이 아니다.

이곳에서 자신의 현재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후에, 음료 값이 아니라 생각 값을 본인의 마음대로 책정한다.

이곳에서 나눈 대화가 뜻 깊었고 앞으로의 삶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면 그만큼 많이 지불하겠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값은 현금이 아니라 의미 있는 활동을 하면서 갚아나간다.

‘문제 일으킨 가수들이 항상 좋은 음악으로 갚겠다고 하던데…….’

……그거랑은 좀 경우가 다른가.

아무튼 가수라면 좋은 음악 활동으로, 배우라면 좋은 연기 활동으로, 혹은 본인의 삶을 변화시킬 만한 새로운 도전으로 그 값을 지불해 나가면 되는 것이다.

“제대로 계산 끝낼 때까지 저희가 일일이 쫓아다니는 건 아니고…… 시청자분들이 공증인이 되어주시는 거죠. 앞으로 열심히 활동을 해 주시는지, 아닌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스태프의 설명을 듣던 한이가 이번엔 다른 질문을 했다.

“그럼 저희가 계산할 때 잘못해서 금액에 0을 몇 개 더 붙이면 그만큼 좋은 활동을 더 많이 볼 수 있겠네요?”

“그건 바가지…….”

“농담이었어요.”

소비자보호원에 신고당할 만한 한이의 발언에 우형이 그를 물러서게 했다.

“유한이한테는 계산대 맡기면 안 되겠다. 누구 계산 잘하는 사람?”

“나 이거 잘해!”

그러자 재민이 자신 있게 손을 들고 나섰다.

계산이라는 소리에 모노크롬의 브레인인 준해를 쳐다보던 해랑이 고개를 갸웃했다.

“준해가 아니라?”

“아냐. 숫자 계산은 기계가 다 해주니까, 사람은 버튼만 잘 누르면 돼.”

“그런데 네가 계산을 잘한다고?”

“나 이거 많이 해 봤으니까.”

재민의 말에 우형이 기습 공격이라도 받은 듯이 가슴에 손을 얹었다.

‘……아. 재민이 편의점 알바 했었지.’

재민이 편의점 매대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본 건 우형과 나뿐이다.

우형은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안타까움이 섞인 얼굴로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재민을 데리러 같이 갔던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때의 기억이 아프게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나도 이해한다는 의미로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자 우형은 다시 앞에 있는 재민에게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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