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25화 (325/430)

# 325화

내가 두 번째로 배명희의 자택으로 찾아갔을 땐 예란과 함께였다.

아무래도 임주미 PD를 데려가는 것은 그리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꾸 찾아가다가 임 PD님 꼴이 되는 게 아닌가 싶지만…….’

일단 만나야 대화라도 하지. 설득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직진뿐이다.

내가 또다시 찾아온 것을 본 배명희의 눈빛은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내가 찾아올 이유야 뻔했으니까.

배명희는 나를 보자마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이 통하는 분인 줄 알았더니. 이사님도 PD님한테 물이 드셨네.”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머쓱한 마음에 사과하며 작게 웃기는 했으나, 나도 나를 환영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 자꾸 찾아오는 게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오늘은 날 도와줄 사람이 있었다.

나와 함께 온 예란은 일 얘기를 하러 온 게 아니라는 느낌을 내고 싶었는지 친근하게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아니에요, 선배. 내가 같이 오자고 했는데.”

“너는 또 무슨 생각이니? 하여튼…… 오셨으니 들어오세요.”

대문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배명희의 공간이다.

임주미 PD는 그녀의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당했지만 나는 예란의 서포트로 무사히 배명희의 자택에 다시 진입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배명희는 자신의 공간 안에 들어온 사람에게는 조금 더 열린 태도를 보여줬다.

“임주미 PD님이 제가 담당하는 모노크롬을 섭외한 게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거든요.”

“어머나. 그분도 참……. 한창인 후배들을 두고 무슨 소리람.”

나는 임주미 PD가 내게 했던 말을 두 사람에게 들려주었다.

은퇴를 언급하며 섭외했다는 말에는 배명희도 그렇지만 예란 또한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그런데 그 말이 사실이기도 해요. 아이돌 그룹이 재계약을 기점으로 활동 양상이 크게 변하곤 하거든요. 회사와 조율이 잘 안 되면 정말 해체까지 가는 경우도 있고요…….”

“맞아요, 선배. 우리도 회사랑 어긋나서 활동 못 하는 선후배들 종종 봐왔잖아요.”

두 사람은 아이돌 그룹이란 개념이 없을 때부터 가수 활동을 해 왔다.

같은 가수라도 아이돌 시스템은 이해하기 어려울 듯해서 최대한 풀어서 설명하려 했는데, 두 사람은 비슷한 사례들을 봐왔는지 잘 공감해주었다.

“어휴. 그런 말을 듣고도 방송에 나갈 생각을 했어요?”

“저도 출연을 고민했는데, 지금이 불안한 시기인 게 사실이거든요. 특히 아이돌은 음악 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방송으로 계속 대중들에게 얼굴을 비쳐야 오래 활동을 할 수가 있고…….”

“임 PD님도 참. 절박한 마음을 그렇게 이용하시나.”

공동의 적을 만들면 든든한 아군이 된다. 임주미 PD를 보고 잘 알았지.

나는 그녀를 팔아 배명희에게 조금이나마 비슷한 처지임을 어필했다.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했는지 배명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방송국 사람들 참 무서워. 지금은 덜한데 예전엔 방송국 말이 아주 하나님 말씀이었어.”

“요즘이라고 뭐 다른가. 섭외할 땐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하다가 끝나면 휑하니 돌아서 버린다니까. 우리야 그나마 연식이 있으니까 망정이지, 어린 친구들은 얼마나 쩔쩔매겠어요.”

배명희와 예란은 지금까지 봐온 것들이 있는지 방송계의 어두운 면을 두고 한탄했다.

공감해 주는 것은 고마웠으나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방송 출연에 괜한 거부감이 생겨나면 역효과였다. 나는 서둘러 끼어들어 화제를 전환했다.

“그래서 저희가 방송 출연이 절실한 상황인데…….”

인정에 호소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가 내놓을 카드가 얼마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방송 출연으로 얻는 이득 같은 것은 임주미 PD가 전부 말했을 테니까 나는 다른 것을 꺼내 들 수밖에 없다.

“당장 결정해 달라고 무리하게 부탁은 안 드릴게요. 그냥 후배들과도 한번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

예란이 말하기로 배명희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지금까지 나는 모노크롬이 쉽지 않은 상황에 있다는 것을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 위기에 봉착한 후배들을 직접 만나보면 마음이 조금이나마 긍정적인 쪽으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안 되면 미움받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 삼고초려라는 걸 해야겠지만…….’

긴장된 마음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녀는 모노크롬을 만나는 것보다는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이는 듯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도시는 시끄럽고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도시 아니에요! 숙소 주변에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보다 더 허허벌판이에요. 차도 안 다니고요.”

“후배들이 그런 데에서 지내요?”

싫다는 요소를 사전차단하려고 몬클하우스가 시골에 있음을 어필하자 배명희는 의아하다는 얼굴이었다.

‘모노크롬을 아무도 못 만나게 시골에 가둬놓고 일만 시키는 줄 아시는 건 아니겠지.’

나는 혹시 모를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몬클하우스가 생긴 배경을 설명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배명희는 시골집이라는 데에 흥미가 생겼는지 멤버들이 몬클하우스에 모인 날 잠시 방문하기로 했다.

***

몬클하우스에 놀러 온 아이돌 지인들은 도시를 벗어나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모노크롬과 놀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니 집이 어떤 상태이든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초대할 게스트는 시연, 그리고 한이와 웹드라마 촬영을 함께 했던 아역 배우 몇 명이었다.

‘아이들과 심오한 업계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으니까…….’

우리가 초대했으니 그만큼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 줘야겠지.

그래서 아이들이 흥미 있어 할 공간을 꾸미기 위해 몬클하우스를 조금 정리, 단장할 필요가 있었다.

재민의 생일 컨텐츠 때 선물로 최종 선택받지 못한 물품들도 아직 자리를 찾지 못하고 창고에 많이 쌓여 있었다.

다행히 아이들에게는 재밌을 만한 물건들이라 조금 난잡하더라도 전부 풀어놓기로 했다.

‘활동이랑 콘서트 때문에 한 달 정도는 집이 거의 비어 있었으니 먼지도 쌓였을 테고…….’

간단한 청소는 촬영 준비 겸 스태프들이 해도 되지만 모노크롬도 손을 보탰다.

콘서트라는 큰일을 마치고 나니 다들 마음이 여유로워진 걸까.

대청소와 새 단장이라는 공식 활동 외 노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배명희와 함께 몬클하우스에 도착했을 땐 청소는 끝났는지 한창 단장 중이었다.

“여기 달면 아기자기하고 분위기가 좋잖아. 어때. 네 눈에도 괜찮아 보이지?”

“……꼭 나한테 하나하나 다 검사를 받아야 해?”

몬클하우스 첫 방문 겸 쇼핑 날에 우형이 사 왔던 가렌더는 시골집 분위기에 안 어울린다는 이유로 거실에 걸리지 못하고 2층 작업실 구석으로 밀려났다.

우형은 그 가렌더를 다시 가져와 현관문 앞에 달고는 미적 감각이 좋은 해랑에게 괜찮은지 묻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배명희와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다들 예의 바르게 선배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다들 얼굴이 하얀 거 보니까 도시 사는 거 맞네요.”

“네. 전 멤버들을 가둬놓지 않았어요.”

“가둬요?”

이상한 대화로 들렸는지 준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희 이런 데서 지내냐고 물어보셔서. 여기 있으면 매번 어디로 오가는 데도 시간 걸리고 힘드니까…….”

“아……. 저희 집에 간 지 좀 오래되긴 했는데 괜찮아요.”

한이가 장난이 치고 싶은지 가련한 표정을 지으며 오해가 생길 만한 말을 내뱉었다.

그 옆에서 우형이 “야! 손님도 오셨는데 뭐라는 거야.”라면서 눈치를 보며 입막음을 하는 게 상황을 더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멤버들 잡고 다닌다는 소문이 이렇게 또 진화하는 건가.’

다행히 배명희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지 집으로 관심을 돌렸다.

“작게 텃밭도 있네. 이건 직접 관리하는 거예요?”

“네! 구경하실래요?”

자신의 미니 온실에 큰 자부심을 지닌 재민이 그녀를 온실로 이끌었다.

재민의 온실 속 식물들은 모노크롬이 자리를 비운 사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식용이 아니게 된 상추는 허리춤까지 자라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추의 모습이 아니었다.

미니 온실은 봄, 여름의 햇살을 받아 미니 밀림으로 진화해 있었다.

“이건 이렇게 자라기 전에 먼저 가지를 잘라 줬어야 하는데.”

“그냥 싹 나는 대로 두면 안 돼요?”

“이렇게 키우면 꽃이 많이 안 피고 열매가 안 달리지. 여기서 영양분을 다 가져가 버리니까.”

재민은 전문가의 도움 없이 나름대로 혼자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방법이 잘못되었는지 지적을 받았다.

자택 주변에 자그마한 밭을 두고 관리한다는 배명희의 눈에는 부족한 부분이 바로 눈에 띈 듯했다.

그러나 재민은 무슨 일이든 항상 자신만의 지론을 지니고 있었다.

“꽃이나 열매 많이 안 나도 그냥 이 상태로도 멋진 것 같아요. 얘 입장에선 열심히 뻗은 가지잖아요.”

“그 말도 맞네. 인간이 그래. 다 인간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다니까.”

배명희는 재민의 엉뚱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으며 온실을 그 자체로 구경했다.

‘좋아.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어.’

착한 후배들을 보여드릴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밭일이라는 공통점이 생겨났다.

나는 흐뭇한 마음으로 몬클하우스를 둘러보며 멤버들과 대화를 나누는 배명희의 뒤를 졸졸 쫓았다.

***

“시대가 너무 빨리 바뀌다 보니 요즘 젊은 사람들이 아주 별세계 사람들 같았는데, 이 후배들은 친근한 느낌이 있네요.”

“그렇죠?”

몬클하우스에 초대한 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집뿐만 아니라 동네 풍경에도 관심이 있는지 배명희는 몬클하우스의 주변을 잠시 걸었다.

여름 볕이 뜨거울까 봐 나는 매니저처럼 양산을 들고 그녀를 계속 따라다녔고, 어쩌다 보니 같이 산책하는 그림이 되었다.

“딸이 어릴 땐 할머니 댁에 가면 항상 이렇게 시골길 걸으면서 구경하곤 했거든요.”

배명희가 딸 얘기를 먼저 꺼낼 줄은 몰랐기에 나는 말없이 놀랐다.

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는 줄 알았는데, 떠올려도 마음이 아프지 않은 추억도 있었던 모양이다.

“저, 사실 예란 씨에게 들었는데 따님이 선생님 노래를 많이 좋아하셨다고……. 그러면 노래 부르실 때도 그런 좋은 기억이 떠오르진 않으세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가수 생활이 멈춘 거랑 딸이 떠난 게 같은 시기여서 그런지. 자꾸 연결이 되더라고요.”

기억 간에 연결고리가 한번 생기면 끊기 어렵긴 하지. 안 좋은 기억이라면 더더욱.

나도 이해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배명희가 그것 또한 극복해내기를 바라기에 오늘 이곳에 초대한 것이었다.

“주제넘은 말 같지만 따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어머니가 계속 슬퍼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배명희와 단둘이 남아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저절로 그녀, 그리고 내 상황에 이입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좋은 일이 있을 때 자기를 떠올려주는 게 더 안심되고 좋지 않을까요? 어머니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은 딸은 없으니까. 떠올릴 때마다 아픈 존재가 되면 저는 너무 죄스럽고 슬플 것 같아요.”

“…….”

내가 정말 그녀의 딸도 아닌데 너무 내 개인적인 생각을 말했나.

인생의 경험도 많지 않은 내가 오지랖을 부린 것처럼 느껴질까 봐 나는 조금이나마 변명을 추가했다.

“사실 저도 사정이 있어서 어머니랑 만나기 어려운 상황인데, 만나지 못하는 기간이 생각보다 많이 길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만일 그렇게 되면 혼자 계시는 어머니가 제 걱정을 많이 안 하고 괜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자신이 없어져서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꼬리를 흐리고 있는데, 갑자기 내 손에 무언가가 닿아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배명희가 양산을 들지 않은 쪽의 내 손을 잡고 안타까움이 담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어머니 입장에서 말하자면.”

내 손등을 쓰다듬는 배명희의 손이 마치 엄마의 손길을 대신하는 것 같아서 나는 가만히 그녀가 하는 대로 지켜봤다.

“내 걱정 하지 말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기 마음을 따라갔으면 좋겠어. 훨훨 날아가는데 내가 방해되고 싶지는 않아요.”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상대가 걱정에 발목을 잡히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같았다.

배명희도 나와 비슷한 마음이었는지 그녀가 다녀가고 얼마 후, 임주미 PD는 내게 무슨 요술을 부렸냐며 연락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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