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3화
나는 임주미 PD의 차를 얻어 타고 가수 배명희의 자택으로 향했다.
“이미 일정도 잡아놨다고 하셨으면서 섭외가 안 됐으면…….”
“아이. 저 그렇게 생각 없는 사람 아니에요. 다, 수가 있습니다.”
당당한 목소리였지만 왜인지 말만 번드르르한 것 같아서 나는 그녀에게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임 PD는 운전 중인데도 내 표정을 흘끔 봤는지 더 자세히 설명했다.
“제작이야 어떻게든 할 수 있어요. 예란 씨 아시죠? <송투유>에서 배명희 씨랑 같이 팀으로 출연했던.”
“네. 저도 방송 봤어요.”
배명희는 원로 가수였고, 그녀의 절친한 후배인 가수 예란도 이미 중년에 들어선 중견 가수였다.
임주미 PD가 배명희를 기획의 메인으로 내세우겠다고 해서 나도 그녀의 <송투유> 출연분을 찾아봤다.
이십 년도 더 지난 과거의 일이었다. 가수로 한창 활동하던 배명희는 화재 사고를 겪고 폐를 다쳐 활동을 접어야 했다.
폐가 약해서 노래 부르기가 힘들다고 십여 년이나 해랑을 괴롭혔던 연찬이 생각났지만 넘어가고.
‘그만큼 가수에게는 치명적인 사고였다는 거지…….’
배명희는 치료 후에 일상으로 돌아왔고 노래도 부를 수 있었지만, 마음의 문제로 노래를 부르지 못했다.
잘하고 싶은 일에서 좌절을 겪으면 더 크게 와닿기도 하니까.
몸에 문제가 없어도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바로 앞에 있는 무대에 올라가지 못하던 재민을 본 적이 있으니 나도 잘 안다.
그녀의 후배인 예란이 긴 설득 끝에 그런 그녀를 다시 세상 밖으로 꺼내온 것이, 바로 현재 <송투유> 자체 순위 1위에 랭크된 두 사람의 무대였다.
‘그런데 그게 복귀 무대라고 하기에는…… 배명희 씨의 활동이 더 없었지.’
시청자들은 다시 무대에 선 그녀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고 그녀를 응원했지만 가수 배명희의 활동이 이어질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임주미 PD의 말대로 사람들은 그녀가 다시 가수로 복귀하는지, 아니면 <송투유>의 무대는 그저 특별 무대였을 뿐이고 은퇴한 채로 남는지를 궁금해했다.
“예란 씨가 선배를 꼭 좀 설득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정 안 되면 본인이 출연하겠다고. 배명희 씨도 호스트가 아니라 게스트로는 더 편하게 나오실지도 모르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섭외에 진척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임주미 PD가 대책 없이 일만 저지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예란도 굵직하게 활동해 온 중견 가수이니 방송의 메인 호스트로 출연하기에는 충분했다.
배명희 정도의 화제성은 아니지만 예란 또한 <송투유>에 출연하여 많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았다.
‘이 정도로 열성인 걸 보면 예란 씨한테는 배명희 씨가 정말 은인 같은 사람인가 봐.’
나도 방송으로는 봐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뒤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알게 되니 그 사실이 더욱 실감이 났다.
배명희는 가수라는 직업을 정말 사랑했고, 후배인 예란이 가수 일을 그만두려고 했을 때도 소중한 조언을 해 줬다고 한다.
배명희가 <송투유>에 나오도록 오랫동안 설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본인이 가수의 꿈을 접지 않도록 도와준 사람이니 이번엔 자신이 그 보답을 하고 싶다고.
어떤 시청자들은 ‘그렇게 오래 노래를 안 했으면 이제 가수 생활을 포기한 게 아니냐, 무대에 오르기 싫어하는 거 아니냐’라는 의문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수 배명희가 얼마나 노래를 사랑하는지 아는 예란은 포기하지 않았고, 그녀 덕분에 이제는 많은 사람이 배명희가 가수로 복귀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
도심을 조금 벗어나니 창밖의 풍경은 바로 푸릇푸릇해졌다.
몬클하우스를 오가며 비슷한 풍경을 봤던지라 내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습기를 머금은 나뭇잎들이 더 짙은 녹음을 만들어냈고 지금이 한여름인 것을 상기하게 했다.
나는 창밖을 보며 남은 계절을 세어보다가 임주미 PD의 목소리에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임주미 PD는 말이 많은 타입인지 가수 배명희의 자택으로 향하는 동안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들을 많이 말해줬다.
“사실은 라솔 씨를 섭외해 볼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쉰셋돌> 시즌2에서 섭외하려다가 말았다는 소식을 들어서요. 제가 채가서 시청률을 더 잘 뽑으면 분한 마음이 들지 않겠어요?”
안 그래도 얼마 전 라솔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정말로 라솔이 물망에만 오르고 그 자리에 박형주가 들어갔나 보네.
“결국 라솔 씨한테는 연락 안 하신 거예요?”
“모노크롬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요. 인원이 더 많이 필요했던 것도 있고.”
라솔을 넣으려던 자리에 모노크롬을 넣었다는 건가.
이유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갔다. 그녀가 모노크롬을 섭외한 이유는 은퇴에 가까운 그룹이어서.
라솔도 예전엔 가수를 은퇴하려 했다고 내게 말해준 적이 있다.
‘그런데 라솔 씨는 은퇴를 극복해냈고 우리는 앞두고 있다고 생각한 거지.’
정말 줏대 있게 지독한 사람이야.
“그런데 PD님은 안지택 PD님을 왜 그렇게 방해하려고 하시는 거예요?”
“지금도 제가 나이가 많은 건 아니지만 더 어렸을 때, 신입에 가까웠을 때요. 어떤 후배가 괜찮은 기획을 내놓으면 그 선배가 공동 기획으로 채가거나 아이디어를 더 디벨롭해서 가져가는 게 그렇게 얄밉더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해서 잘나가기는 또 잘나가데요?”
부하 사원들이 만든 서류를 자기 이름으로 올리는 상사 스타일인가.
나는 머릿속으로 <쉰셋돌>에서 봤던 안지택 PD의 얼굴을 떠올렸다.
‘여느 회사에나 있는 부장님 느낌이 있긴 해.’
원만호를 위해서는 방송 기획까지 해 줄 정도인데, 신셋의 다른 어린 멤버들이 기 싸움을 하는 건 크게 신경 쓰지 않던 것도 그렇고.
부하 직원 입장에서 보면 상사들은 아랫사람들은 안중에도 없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만 일인 것처럼 보이잖아.
회사로 비유해 보니 임주미 PD가 안지택 PD를 바라보는 시선이 더 확실히 이해 갔다.
“성과가 좋았던 건 인정하지만. 그게 다 본인이 쌓았느냐, 하면 아닌 것 같다는 거죠. 그걸 좀 알려주고 싶었어요.”
“으음…… 그렇군요.”
‘그것 때문에 이렇게까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더 있을 수도 있으니 굳이 캐묻지는 말자.
중대한 이유가 없더라도, 사람은 가끔 가문의 원수보다 내 5천 원을 빼앗아 간 사람에게 더 집요하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는 법이다.
“이사님도 그 선배한테 아이디어 뺏기신 적 있지 않았어요? 그런 비슷한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빼앗겼다기보다는…… 그냥 촬영할 만한 소재를 제안한 적은 있는데요.”
“네, 그거. 방송에 ‘모노크롬 소속사에서 아이디어 제공’이라는 문구 한 줄이라도 나왔어요? 아니잖아요. 이사님도 아이디어를 고이 가져다 바친 거예요.”
그게…… 그렇게 되나?
우리가 쓰지 않을 컨텐츠 소재들을 귀 기울여 청취하길래 생각보다 잘 수용해 준다고만 생각했지.
‘생각해 보니까 안지택 PD님이 의견을 구하는 것처럼 먼저 물어보긴 했어. 아이돌 그룹이 할 만한 컨텐츠가 뭐가 있냐고.’
그런데 실제 아이돌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알려주는 게 우리 역할이었고 컨텐츠 아이디어 제공은 그 일환으로 볼 수도 있었다.
사진이나 영상 자료 같았으면 제공자 표기를 할 텐데, 아이디어 제공까지 방송에서 일일이 다 표기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이미 다 지난 일인데 갖다 바쳤다고 표현하니까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혹시 일부러 화술에 걸려들게 하려는 거 아니야?’
공공의 적을 강화해서 우리를 더 아군으로 끌어들일 속셈인 거지.
왠지 말려드는 기분이라 나는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런데 제가 같이 간다고 뭐가 크게 달라질까요? 전 그냥 모노크롬 소속사 임원인데.”
나도 이 기획에 관여하게 되었고, 임 PD만큼이나 방송이 성공적으로 제작되길 바라는 사람이다.
내가 같이 가는 게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굳이?’라는 생각은 조금 들었다.
‘얼굴이 알려진 모노크롬이 직접 가는 것도 아니고. 나는 일반인인데.’
같은 방송에 출연하게 될 수도 있는 이들의 소속 회사 임원으로서 출연 예정자를 설득하러 가다니.
친구의 가족의 상사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임주미 PD는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배명희 씨가 젊은 여성분한테 약하시거든요.”
“무슨 의미예요……?”
대답을 듣기 전에 차가 감속하여 한 집 앞에 멈춰 섰다.
주택이 일정 거리를 두고 드문드문 위치한 한적한 마을.
차에서 내린 임주미 PD는 익숙한 태도로 대문 옆의 초인종을 눌렀다.
“선생님!”
처음엔 대답이 없었으나 임주미 PD가 초인종을 누르며 몇 번 더 부르자 안쪽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휴! 지긋지긋해. 내가 방범 업체를 불러야지, 원!”
지긋지긋하다며 불평하는 목소리조차 가수처럼 깨끗한 것을 보면 배명희의 목소리인 듯했다.
그런데 내용을 들어보니 임주미 PD를 돌려보낸 게 한두 번이 아닌 듯한데…….
“대체 몇 번을 찾아오신 거예요……?”
“삼고초려라는 말이 있잖아요.”
삼고초려도 말이 좋아서 삼고초려지.
요즘 시대엔 원하지 않는 사람 집에 자꾸 찾아가면 법의 철퇴를 맞을 수 있다.
‘이건 아직 출연 확답을 못 받은 게 아니라 계속 거절하는데 달라붙은 거 아니야?’
그것도 방범 업체까지 부르고 싶을 정도로.
이내 대문이 열리고, 방송으로만 봤던 가수 배명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임주미 PD 혼자일 줄 알았는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나오더니, 나를 보고는 다시 임 PD에게 눈을 흘겼다.
“PD님! 정말로 끈질기시네. 이번엔 다른 분까지 데려오시고.”
지금 가만히 있으면 인사도 못 하고 쫓겨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뉴마 엔터테인먼트 신주인 이사입니다.”
예상치 못한 분위기에 명함을 미리 준비할 타이밍을 놓친 나는 서둘러 가방을 뒤져 명함을 꺼냈다.
다행히 배명희는 내 명함을 별말 없이 받아주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찾아오셨을까.”
“제가 선생님을 찾아뵙는 건 당연히 전에 말씀드린 기획 때문이죠. 예란 씨도 부탁하셨던.”
임주미 PD는 배명희와 막역한 사이인 예란의 이름을 꺼내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이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배명희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이분도?”
이어서 그녀의 시선이 향한 것은 나였다.
나라는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 것 외에는 전부 배명희의 예상 범위 내였던 모양이다.
“이번에 저희 소속 그룹인 모노크롬이 기획에 참여하게 되어서요. 저도 같이 부탁드리고자…….”
배명희는 한숨을 쉬고는 임주미 PD를 한 번 보고, 다시 나를 한 번 봤다.
“이사님이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네요. 잠깐 들어와서 얘기 좀 해요.”
“네? 저만요……?”
배명희가 그렇게 말하며 내 팔을 대문 안쪽으로 이끌었다.
당황하여 뒤를 돌아보니 닫히는 대문 틈 사이로 임주미 PD가 전화하라는 손짓을 하며 씩 웃고 있었다.
***
‘처음부터 나를 설득 역으로 보낼 생각으로 데려온 거였냐고.’
임주미 PD가 같이 설득하러 가자고 했던 말은 ‘같이 설득하자’가 아니라 ‘같이 가서 나 대신 설득해달라’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임주미 PD처럼 쫓겨나지는 않아서 다행인가.
배명희는 나를 손님으로 대우해주려는 듯 커피를 내려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커피가 담긴 잔이 몬클하우스에 있는 꽃무늬 머그잔과 같은 디자인이라 눈길이 갔다.
“아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얼마나 성가신지 몰라. PD님은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으니까 이사님이 대신 안 나간다고 말 좀 전해 주세요.”
“저, 그게…… 저도 출연을 부탁드리러 온 거였는데요…….”
배명희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내 맞은편에 앉았다.
“제가 왜 노래를 안 하는 줄 아세요?”
“저도 방송으로 봤는데 사고로 폐를 다치신 적이 있다고…….”
방송에 나온 이유는 화재 사고로 폐가 상하여 노래가 뜻대로 나오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노래를 부르기가 힘겨웠다고.
“방송에선 말을 안 했는데.”
그런데 그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배명희는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려 했다.
사고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보다 더 치명적인 이유가 있었나?
말없이 귀를 기울이자 그녀는 길게 뜸을 들이고는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사고 때문에 딸을 먼저 보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