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9화
“방금 말씀하신 선배란 분이 <쉰셋돌>의 안지택 PD님이란 이야기인가요?”
“이사님도 의심은 하셨나 봐요. 하긴 무슨 일이든 피해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눈치채는 법이죠.”
신셋의 타이틀곡 투표에 안지택 PD가 연관된 것 같다는 심증은 나도 가지고 있었다.
우형과 성운이 작곡가로 내정되어 있던 상황에, 안 PD가 갑자기 말을 바꿔 타이틀곡 후보를 더 받겠다고 했지.
그리고 타이틀곡 후보로 우형과 성운이 만든 데모곡과 비슷한 곡이 나왔다.
‘정체 모를 작곡가가 우리 곡을 따라 한 것까지는 긴가민가했는데, 적어도 안지택 PD가 연관된 건 맞을 거야.’
원만호도 그 일 때문에 ‘기회를 빼앗기지 말라’고 조언해 준 적이 있었고, 지금 임주미 PD가 비슷한 이야기를 또 꺼냈다.
안지택 PD가 특정 작곡가를 밀어줬다면 꽤나 유명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타이틀곡 작곡가가 우형뿐이었다면 안 PD가 말을 바꿨을 때 ‘또 아이돌이라고 무시하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지만 성운은 아니잖아? 라솔이 데려온 작곡가인데.
라솔의 눈치가 보일 텐데도 변명거리를 만들면서까지 말을 바꿨단 말이지.
‘그리고 안지택 PD가 아는 작곡가…….’
내가 안 PD의 인맥을 꿰고 있는 건 아니지만, 한 명만큼은 확실히 안다.
<쉰셋돌> 시즌2의 프로듀서를 맡게 된 박형주.
그는 <쉰셋돌> 뒤풀이 자리에도 나타났었다.
류현의 소속 그룹 프로듀서로서 인사하러 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뭔가가 계속 찝찝하던 차였다.
‘그리고 박형주 그 사람…… 음악대상 후보에 오른 적이 있어.’
그것도 라솔이 대상을 받았던 해에 그가 후보에 같이 있었다.
우형이 출연했던 <미래의 당신을 만난다면> 싱어송라이터 특집에서도 히트곡 메이커로 소개되었던 사람이니까.
결국 대상은 라솔이 수상했고 그는 작곡, 프로듀싱과 관련된 상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에 그가 맡은 러너스하이까지 성공적으로 데뷔했고.
가요계에서 쌓아온 공로가 있으니 그가 대상을 받아도 뜬금없지는 않다.
임주미 PD의 이야기에 이 사실들이 퍼즐 조각처럼 정확히 하나의 결론으로 맞아떨어졌다.
“혹시 <쉰셋돌> 시즌2가…….”
“에이. 아직 같은 편이 아닌데 다 말해드리긴 어렵고요. 전 별말 안 했습니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면 되는데 정확히 말해줄 순 없다는 건 뭐야.
임주미 PD는 아까부터 에둘러 말하기만 하고 직접적인 정보는 꺼내지 않았다.
‘의심의 씨앗만 심어두고 자기는 쏙 빠져나가다니…….’
그녀는 최소한의 미끼만 던지고 듣는 사람이 알아서 해석하게 하는 방식으로 대화를 끌어나갔다.
게다가 아직 같은 편이 아니라니. 더 듣고 싶으면 손을 잡자는 소리잖아?
분명 중요한 정보를 얻었는데 함정에 걸린 듯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면 저와 만나고 싶다고 하셨던 이유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세상 모든 일이 자기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어떻게 할까 좀 고민을 해 봤는데. 모노크롬이 가장 알맞을 것 같더라고요.”
“……대상에요?”
“아뇨. 방송에요.”
임주미 PD는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방금까지 대상 얘기를 하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
방금까지 웃는 상으로 얘기하다가 그렇게 냉정하게 딱 잘라낼 것까지는 없잖아…….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것들을 들어보니 모노크롬에게 좋은 말을 해 줄 것 같진 않았지만 대답이 너무 칼 같아서 괜히 심통이 났다.
“아니, 뭐…… 대상 수상자들과 같이 방송하기에 적절하냐는 질문이었다면 맞을 수도 있겠네요. 이라솔 씨와도 친분이 있는 것 같고, 천상식 씨를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 없으니까.”
임주미 PD는 머릿속에 있는 모노크롬에 관한 정보를 꺼내오는지 팔짱을 끼고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것도 있었죠. 모노크롬 라인.”
“모노크롬 라인이요……?”
“다른 아이돌들 불러와서 컨텐츠 찍으시잖아요. 안 그래도 웹 공개 예능들이 치고 올라오는데 이러다가 아이돌 그룹이랑도 경쟁해야 하는 거 아니냐면서 PD끼리 얘기한 적이 있었거든요. 모노크롬이 특이한 거라고 결론 났지만.”
몬클하우스는 리얼리티를 제작해주는 곳 없는 설움을 직접 풀기 위해서 기획한 컨텐츠였는데 방송국 PD들이 주목했다니.
시청자들의 반응을 시청률 퍼센트가 아니라 조회 수와 댓글로 직접 확인할 수 있으니 더 눈길이 갔을 수도 있다.
PD들은 우리를 시작으로 대형 아이돌 기획사까지 나설까 봐 위기감을 느낀 듯했다.
‘아이돌은 보통 상생 관계보다는 경쟁 관계라서 어렵겠지만.’
그 와중에 다른 아이돌 그룹을 끌어온 모노크롬이 특이 케이스라는 말에는 나도 동의했다.
사업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교류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없지.
그녀는 계속 곰곰이 생각하더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최근 모노크롬 활약이 컸네요? 인맥도 넓고.”
칭찬하는 말 같은데 왜 이렇게 평가하는 것 같지?
마치 지금에야 깨달았다는 듯이 말한다는 건, 이런 요소들 말고 다른 이유로 모노크롬을 찾았다는 소리다.
짧지만 많은 의미가 담긴 대화를 거쳐서 나는 다시 처음 했던 질문으로 돌아왔다.
“그럼 기획하신다는 방송은 어떤 건가요? 그냥 방송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으신 듯한데…….”
“방송으로 누구 한 명을 띄워주려는 걸 막으려면 그것보다 더 화제성 있는 인물을 만들어야겠죠.”
여기서 ‘모노크롬이요?’라고 물으면 또 아까처럼 ‘아뇨.’라고 대답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질문을 참았다.
그리고 역시나 임주미 PD는 다른 사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천상식 씨를 ZBS <송투유>에 빼앗겼으니, 저희는 배명희 씨를 데려오면 균형이 맞겠더라고요.”
“배명희 씨라면…… <송투유>에서 1위를 유지하시는 그 가수분이요?”
“네. 화제성 확실히 끌어올 수 있지, ZBS도 한 방 먹일 수 있지. 일거양득이죠.”
배명희는 병세로 은퇴하여 TV에 얼굴을 비치지 않다가 <송투유>에서 오랜만에 노래 무대에 선 원로가수였다.
그녀가 다시 무대에 서기 위해 보여준 노력에 모두가 감동했고, 그녀는 모두의 응원을 받아 프로그램 자체 랭킹 1위 자리에 올라섰다.
‘그래서 한이네 팀이 2위에 올랐지.’
부동의 1위가 버티고 있으니 2위가 실질적 1위라면서 감탄하던 사람들의 반응도 기억났다.
임주미 PD는 생각 중인 기획의 개요를 내게 알려줬다.
“많은 분이 배명희 씨가 노래를 계속할지 궁금해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저희 방송의 취지는 그겁니다. 또다시 은퇴의 갈림길 앞에 선 가수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그건…… PD님도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상 후보로 밀어주려는 거 아닌가요?”
“아니죠. 전 배명희 씨의 커리어를 끌어올려 주려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걸 방송으로 보여주는 게 PD의 할 일인걸요. 시청자의 니즈를 파악한 거죠.”
참된 PD처럼 말하지만 가능성 있는 다른 후보를 내세워서 경쟁시키겠다는 것 아닌가.
그렇게 되면 QBC의 PD가 밀어주는 음악대상 후보가 두 명이나 생긴다.
‘모노크롬이 음악대상을 받으려면 넘어서야 할 사람이 최소 두 명…….’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이 상태로 두는 것보다는 임주미 PD에게 협조하는 것이 우리에게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그러면 모노크롬은 방송을 보조하는 역할로 쓰시려고요? MC처럼?”
모노크롬이 <쉰셋돌> 시즌1에서 프로듀서 역할이었으니 시즌2의 프로듀서를 견제하기에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며 별 의미 없이 물었는데, 임주미 PD는 눈을 접으며 웃는 얼굴로 잔인한 소리를 내뱉었다.
“가장 은퇴에 가까운 그룹이잖아요.”
***
이사실로 돌아온 나는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은퇴라는 소리에 벌떡 일어날 뻔했지만 열심히 이성을 다스리며 참았다.
지금은 손익을 따질 때지, 기분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제 모노크롬이 뉴마에서 할 활동이 많지 않아……. 하나하나 신중해야 해.’
처음 돌대회 섭외를 받았을 때도 기분이 앞서서 당장 거절하려고 했는데 결국 나갔잖아? 모노크롬에게 도움이 됐고.
임주미 PD는 은퇴 얘기를 한 직후에 진정하고 이야기를 더 들어보라는 듯이 내 팔을 붙잡았다.
[처지가 비슷하잖아요? 재계약 앞두고 있으시죠? 그리고 한번 은퇴했던 멤버도 있고. 은퇴에 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기에 이보다 더 좋은 조합이 어디 있어요.]
아이돌 그룹에게 재계약이란 해체의 위험이 있는 이벤트였다. 아티스트도 민감하고, 팬들도 민감하고, 회사도 민감한 사항.
소속사 임원 앞에서 거침없이 재계약을 언급하는 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내가 황당해하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는 “이사님은 이런 얘기 들어주실 것 같아서요.”라고 덧붙였다.
초면인데도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어디서 나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듯했다.
‘우리가 오는 방송 막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나?’
만일 손영식 PD에게서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억울한데. <최고의 팀메이트> 때는 속아서 나간 거란 말이야.
아무튼 임주미 PD가 직설적으로 나온 덕분에 이리저리 꼬아서 생각할 필요는 없어서 오히려 잘됐을지도 모른다.
모노크롬이 아니라 나를 부른 것도 나름의 배려는 아니었을까. 본인이 꾸미지 않고 말을 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은퇴 소리만 빼면, 그녀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누군가가 음악대상으로 올라가기 위해 밟힌 엑스트라1이 될 뻔한 상황을 타파하자는 것이었으니까.
‘만일 우리가 음악대상 목표를 놓치더라도, 그 자리를 표절범에게 빼앗겨서 실패하고 싶지는 않아!’
이게 임주미 PD가 모노크롬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공공의 적을 두면 강력한 아군이 될 수밖에 없다.
그 방법이란 게 화제성 있는 다른 사람을 내세우는 것이었지만, 옆에 있는 모노크롬도 같이 주목받겠지.
강력한 대상 후보가 늘어나더라도 모노크롬의 가능성을 높일 방법이었다.
나는 혼자 고민해서 결정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먼저 우형을 이사실로 불렀다.
오늘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자 그는 씁쓸한 표정이 되었다.
“은퇴의 갈림길에 선 가수에, 해체 위기가 있던 그룹이요…….”
순화해서 말해 줄 생각이었으나 우형은 무슨 뉘앙스였는지 정확히 파악한 모양이었다.
“으응.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그 PD님이 그것 외에도 이런저런 얘기를 막 하셨거든. 표현법이 그러시더라고.”
“그런 거라면 저도 같이 나갈 걸 그랬어요.”
“아냐. 단둘이 만난 덕분에 진솔한…… 대화를 나눴거든.”
내 대답에 영혼이 없었는지 우형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본론으로 돌아왔다.
“고민되시는 거예요?”
“응. 방송 자체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그런데 재민이나 모노크롬의 상황을 방송으로 써먹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영 내키지가 않네. 악영향이 갈까 봐.”
재민은 주변인들을 생각해서 계속 괜찮아졌다는 표현을 하는데, 그렇다고 ‘이제 아무렇지도 않지?’ 하면서 같은 곳을 다시 쑤실 수는 없잖아.
모노크롬 전원에게 그렇지만, 특히 재민에게는 죄책감이 깊었다.
내 근심을 듣고 우형은 재민을 떠올리는지 잠시 테이블을 바라봤다.
“재민이가 이번에 콘서트에서 그때 일을 얘기했잖아요. 그건 마냥 묻어놓길 바라지는 않아서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번에 어깨 다치고 뷰이라이브로 컬러즈한테 직접 얘기했던 것도 같은 마음이었을 테고.”
나보다는 재민을 훨씬 잘 알 터인 우형이 그렇게 말했다.
재민이 그 정도로 약하지 않은데 내가 죄책감 때문에 너무 걱정이 많은 걸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는데 우형은 다른 생각이 떠오른 듯 아까보단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사님이 하시는 방식 있잖아요.”
“내가 하는 방식?”
“휘둘리는 게 아니라, 정면돌파의 기회로 써보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