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1화
대표에게선 시차를 조금 두고 답장이 왔다.
[내가 네 민원 창구인 줄 알아?]
이런 정확한 비유를 하다니. 새삼 내가 쌓아온 어휘력에 감탄을…… 할 때가 아니지.
대표가 내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확인한다는 걸 알았으니 뭐라 하든 상관은 없었다.
나는 민원인으로서 좀 더 정확한 요구를 꺼냈다.
[내가 피디한테 말해서 따온 기회니까 내보내.]
[싫다면?]
[네 퀘스트가 회사 등급 올리는 거라며. 내가 떨어트릴 수는 있는데.]
나는 미리 준비한 협박 멘트를 읊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대표의 퀘스트 내용은 회사 등급을 올리거나, 회삿돈을 일정 금액 이상으로 모으는 것이라 했다.
대표는 후자를 노리고 아이리스를 계약 파기로 몰 생각을 했지만, 불안하던 아이리스는 퀘스트 성공으로 그룹 해체의 암운에서 벗어났다.
‘대표는 내가 아이리스 퀘스트를 진행해서 보상을 받은 건 모를 테고. 내가 얘기를 안 했으니까.’
분명히 흔들리던 아이리스가 갑자기 기세를 얻어 반대로 대표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은 대표로서는 의외였을 것이다.
물론 레드가 대표를 압박할 목적으로 계속 연락하는 건 아니지만.
계약 파기 위약금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작아지자 대표는 여러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야 했을 터.
그 상황에 내가 ‘회사 등급을 떨어트려서 퀘스트를 방해하겠다.’라고 협박하면 그냥 무시하지는 못하겠지.
[무슨 소리야?]
[너도 본 적 있을 거 아냐? 마이 엔터에서 회사에 관한 안 좋은 소문이 돌아서 회사 등급이 떨어졌다는 글.]
내가 본 기억이 있으니 대표도 알 것이다.
나는 여기에 약간의 거짓말을 첨가했다.
[회사 막 굴리다가 회복도 불가능하게 회사 등급 나락으로 떨어지는 케이스 봤어? 난 봤어.]
대표와 나는 같은 기억을 지니고 있지만, 차이점이 하나 있다.
‘내가 마이 엔터를 조금이나마 더 오래 플레이했지.’
대표는 내 생일에 이 세계로 왔고, 나는 연말까지 계속 마이 엔터를 플레이했다.
대표가 모르는 시기가 있다. 나는 그 점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연말에 패치로 회사 파산 루트가 생겨서 유저들이 연구하겠다고 정보 글을 엄청 올렸었어.]
[거짓말이지?]
[믿든 말든.]
내가 거짓말을 해도 대표는 어차피 확인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난 당당할 수 있었다.
[게임에 회사 등급이란 요소가 왜 있는지 생각해 봤어? 난 이제 좀 알 것 같거든.]
마이 엔터의 유저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게임의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
그런데 여기에 회사 등급이라는 요소가 있을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자본으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회사 이미지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는 등급 말이다.
대표의 퀘스트에 ‘회사 등급 상승’이란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마이 엔터의 세계관이 처음부터 아이돌 친화적인 세계관이라면, 돈만이 궁극적인 목표는 아닐 거야.’
어쩌면 회사 등급이란 요소를 도입해서 아이돌과 좋은 파트너로서 공생하는 그림을 그렸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회사 등급은 회사의 성장 가능성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정말 막장 운영을 하면 등급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착취 플레이가 대세가 되고 회사 등급 하락을 자본으로 커버하는 방법이 많이 공유되었다는 게 무서운 일이지.’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K-유저의 집념은 대단했다.
일단 돈을 많이 버는 아이돌을 보유하면 회사는 잘 고꾸라지지 않는다. 회사나 투자자에게 중요한 건 소속 아티스트의 복지보다는 수익이니까.
그런데 그것도 그룹이 여럿 있을 때의 이야기지. 아이리스의 계약 만료를 앞둔 뉴레인에게 성장 가능성?
신인을 준비 중이라고는 해도 애매하지.
[그래서, 외부에 안 좋은 소문을 내겠다고?]
[안 좋은 얘기가 아이리스 멤버 입에서 직접 나오면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 될 텐데.]
어쨌든 잘못한 건 돈 벌겠다고 아이리스에게 무리한 스케줄을 강요하면서 제대로 지원을 안 해 준 뉴레인이잖아.
아이리스가 대대적으로 뉴레인과 척지게 되면 사람들은 아이리스 편에 서게 될 게 뻔했다.
회사 등급을 건드리는 것은 대표에게만 치명적이다.
어차피 지금 뉴레인이 아이리스에게 잘해주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계약 기간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닌데 회사와 반목한다고 해서 아이리스에게 크게 아쉬울 건 없지.
[회사에 손해 끼치면 내가 고소할 거야.]
[그럼 회사 등급은 회사 이미지랑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지.]
회사 등급이 크게 떨어진다면 대표에겐 퀘스트 진행의 선택지가 하나 없어진다.
회삿돈을 모으는 방향을 고르더라도, 아이리스가 당장 큰 수익을 올리는 활동은 거부하고 있지. 그보다는 장기적으로 안정된 활동을 하고 싶어 하니까.
그런데 대표가 신인에게만 신경 쓰는 것을 보면, 대표는 아마 아이리스가 회사에 남으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듯했다.
[무리한 부탁도 아니잖아. 방송 하나 내보내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그냥 내보내. 공중파 방송 출연이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 줄 알아?]
‘알아?’라고 물었지만 대표는 모르겠지. 아이리스는 꾸준히 공중파 음악 방송을 나갔으니.
‘출연이 뭐야. MC도 맡은 적이 있는걸.’
회사 등급이라느니, 파산이라느니 하며 극단적인 소리를 하다가 결국 결론은 ‘방송 섭외 수락해’라니.
허탈한 감이 있었지만 그래도 장기 스케줄이 잡히면 아이리스를 국내에 붙들어놓을 기회가 될 것이다.
‘권력을 이용해서 어디 꽂아 넣으라는 것도 아니고 기회가 알아서 찾아왔는데 고집은.’
어려운 부탁이 아닌 데다가 ‘그냥 싫어.’ 외엔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어서인지 대표는 말이 없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하고 싶은 말을 덧붙였다.
[아이리스한테 신경 쓸 생각이 없으면 차라리 직원 몇 명 붙여서 알아서 활동하게 해. 방치하는 것보단 그게 더 퀘스트에 도움 되겠다.]
작은 회사도 사소한 일까지 전부 사장에게 결재받지 않는 것처럼, 뉴레인도 모든 일에 대표의 승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윤환이가 그런 케이스지.’
뉴마와 한 계약을 도중에 끊고 뉴레인으로 데려가기 위해서는 더 나은 계약 조건을 제시해야 했다.
그래서인지 윤환은 현재 담당 팀이 따로 있었다.
담당 팀이라고 해도 회사 눈치를 아예 안 보는 건 아니겠지만, 그나마 기획실의 터치가 적고 자율적인 활동이 가능하다고 들었다.
아이리스도 그런 형태로 운영하면 좀 낫지 않을까. 7인조 그룹인 아이리스가 솔로 아티스트인 윤환만큼 자유롭기는 어렵겠지만.
[그리고 레드 이야기도 좀 들어줘. 결국 나갈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잠시 말이 없던 대표는 내 말을 제대로 듣기는 한 건지 생뚱맞은 대답을 내놓았다.
[나갈 거라면 그냥 조용히 나갔으면 좋겠어.]
진짜 고집불통이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건 위약금을 뜯어내겠다는 생각은 접었다고 봐야 하나.
회사 등급으로 협박한 게 통한 건지, 회사 이미지를 깎아 먹지 않고 계약을 종료하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대표는 다른 가능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었다.
[레드가 계속 너한테 연락하는 건 아직 회사에 기대가 남아있어서야. 의견만 잘 맞으면 얼마든지 남아 있을 수도 있다니까.]
[그걸 어떻게 믿어?]
“…….”
난 이 대답을 보고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대표는 인간 불신이 극에 달한 상태로 이 세계에 와 버렸다.
그리고 1년 반이라는 길다면 긴 시간 동안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 짧은 메시지에서 여실히 와닿았다.
[게임이면 내 말을 들어야 하는데 자꾸 나를 부정하잖아. 그런데 내가 거기에 휘둘려야 해?]
대표는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을 자신을 부정한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얘를, 나를 어떡하냐…….’
내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기억 때문에, 대표는 누구나 자신의 말을 들어야만 하는 플레이어 위치를 버리지 못한 게 아닐까.
방금까지 회사 일로 신경전을 펼치던 게 장난이었던 것처럼 어린아이가 투정하는 듯한 말투를 보고 착잡함에 휩싸였다.
대표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적대 관계가 되어버린 나뿐이었다.
대답을 못 하고 있자 대표는 또 잠시 시차를 둔 후 최종 대답을 내놓았다.
[네가 알아서 해.]
[내가 뭘 어떻게 알아서 해?]
되물었으나 대표에게서는 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저번 싱글 제작처럼 마땅한 계획을 들고 오면 거절하지는 않겠다는 건가.
이렇게 되면 아이리스를 내가 간접적으로 맡게 된 것 같은데…….
‘으, 머리 아파.’
싱글 활동 이후로 멤버들의 의욕이 되살아난 데다가 아이리스의 편을 들기 시작한 직원들도 있으니 내가 저번처럼 주도적으로 나설 필요는 없을 듯하지만.
원하던 바에 가까운 대답을 받아냈지만,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표가 마음에 걸려서 나는 잠시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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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인형 있는 사람들 인형 코디 고민되면 여기 참고하면 될 듯
(링크) 지금 실시간으로 업뎃중
└이게 머임?
└몬클 콘서트 인형 포토존 부스 계정ㅋㅋ
└ㅋㅋㅋㅋㅋ재밌는거 하네
└공식 인형 있으면 이런 것도 하는구나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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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크롬 공식 솜인형, 미니크롬은 작년 팬미팅에서 처음 판매되었지만 팬미팅 한정 굿즈는 아니었다.
예약 수량이 차는 대로 2차, 3차…… 몇 번에 걸쳐 판매를 진행해서, 다음 예약 판매를 기다리는 신입 컬러즈를 제외하면 웬만하면 미니크롬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이번에도 우리가 낼 굿즈는 정해져 있지.’
작년에 진행한 팬미팅이 회사원 컨셉이었기에 미니크롬의 기본 의상은 셔츠와 바지. 기본적인 수트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콘서트 굿즈로는 이번 스페셜 앨범 컨셉에 맞춘 인형 옷을 준비했다.
타이와 모자가 포함된 모노크롬호 기관사 복장으로, 멤버들이 뮤직비디오에서 입었던 의상을 모티브로 만든 것이었다.
굿즈보다 빠르게 이번 앨범 의상을 개인 제작한 컬러즈도 있었는데, 그 옷들을 오늘 잔뜩 구경할 수 있었다.
‘귀엽다.’
콘서트 시작 전, 나는 스마트폰 화면에 띄운 한 SNS 계정을 새로고침 하며 올라오는 사진들을 흐뭇하게 감상했다.
이것은 굿즈 판매 부스 옆에 마련한 ‘미니크롬 포토존’ 부스 공식 계정이었다. 이른바 미니크롬 패션쇼.
뮤직비디오의 애니메이션 배경을 활용해 꾸며진 공간에 컬러즈들이 데려온 미니크롬을 두고 설치된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이 계정에 실시간으로 사진이 올라오는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이 사진들로 ‘미니크롬 스타일링 시상식’ 영상을 찍을 예정이었다.
우리가 미니크롬을 제작하고, 컬러즈는 인형을 열심히 꾸며오고, 우리가 그걸로 또 새 컨텐츠를 만들어내고. 컨텐츠 창조의 선순환이었다.
컬러즈의 스타일링 실력을 구경하다 보니 한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그거 아냐? 망한 패션쇼…….’
뮤직비디오를 촬영하러 미국에 갔을 때, 멤버들이 호텔에서 놀면서 찍었던 그 영상.
당시의 최대한 멋없게 입힌 패션을 미니크롬으로 구현해 온 컬러즈가 있었다.
이건 상 하나쯤 받을 수 있겠는걸.
내 의도대로 다들 스타일링의 재미를 마음껏 즐기고 있는 듯했다.
‘스타일링의 재미는 이쪽도…….’
한창 미니크롬 패션쇼를 구경한 나는 고개를 들어 대기실을 둘러보았다.
멤버들은 오프닝 무대 의상으로 이미 환복을 마친 상태였다.
그리고 대기실 구석에서 목을 풀던 우형이, 오늘 입을 의상들이 걸린 옷걸이 앞을 지나다가 문득 멈춰 섰다.
“어?”
자신이 뭔가 잘못 봤나 눈을 의심하는 표정.
우형은 자신의 의상을 모아둔 옷걸이가 맞는지 다른 옷도 뒤적거리더니 스타일리스트를 찾는 듯이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그 모습을 보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 옷은 왜 등이 뚫렸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