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0화
연습실을 나온 나는 평소에 우형과 해랑이 자주 쓰는 작업실로 향했다.
우형이 연습실에 오래 죽치고 있었다면 한이도 작업실에 오래 틀어박혀 있다는 뜻.
작업실에 달린 창으로 빼꼼 안쪽을 확인해 보니 역시나 한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 이게 아니야.”
열중해서 작업실에 있는 전자 키보드를 치던 한이는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자신에게 성을 내고 있었다.
‘예술에 고뇌하는 젊은 음악인 같아.’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 말대로지. 고뇌하는 중이고, 젊기도 하고, 음악인인 것도 맞다.
가끔 한이가 까칠해질 때면 멤버들이 ‘옛날 한이를 보는 것 같다.’라고 표현하고는 했다.
나는 옛날 한이를 만난 적은 없지만 지금 모습을 보니 그게 무슨 뜻인지 확실히 이해되었다.
한숨을 쉬며 머리를 벅벅 긁는 것을 보니 연습이 잘 안 풀려서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었다.
나는 똑똑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다.
“바람 좀 쐬면서 해.”
“아, 두목님.”
한이는 연습하느라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었는지, 내가 말을 걸자 어깨에서 힘이 빠져 축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몰입을 깨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중간중간 적당히 쉬어주지 않으면 몸에 무리가 간다.
누가 옆에서 휴식 시간을 정해주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그 상태로 연습을 속행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흐름을 끊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뒤로 물러나자, 한이는 잠시 걸으며 기분 전환을 하려는 건지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컵을 들고 따라 나왔다.
“연습이 잘 안 돼?”
“하아. 손이 제 손이 아닌 것 같아요.”
한이가 제 손을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이의 솔로곡은 재즈풍의 알앤비. 후반부라도 직접 피아노를 치며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면서 최근 맹연습 중이었다.
성악을 배운 것도 공중파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공개되었으니 피아노를 배웠다는 사실을 굳이 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오랫동안 거의 안 쳤더니. 손이 이렇게 굳었을 줄은 몰랐네요.”
“내가 보기엔 잘 치는 것 같던데. 우형이도 잘한다고 하고.”
“으음. 그런데 아직 마음에 안 들어요. 좀 더 잘하고 싶은데.”
한이는 피아노를 오래 쉬었다는 사람치고는 꽤나 빠르게 악보를 숙지했다.
그런데 뭔가가 만족스럽지가 않은지 오늘처럼 계속 작업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곤 했다.
‘예전에 자기는 배우다가 말아서 피아노를 못 친다고 했는데 그게 그 뜻이 아니었어.’
배운 것을 다 까먹었다는 게 아니라, 잘 치는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못 친다는 뜻이었다.
몇 년간 제대로 피아노를 쳐 본 적이 없다던 한이는 몸이 기억하는지 빠른 속도로 피아노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피아니스트 가족 두 명을 둔 그는 기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컬러즈는 한이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포즈만 취해도 좋아할 텐데.’
그렇다고 한이에게 적당히 타협하라고 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집념이 있으니까 그간 배워왔던 성악 스타일을 버리면서까지 보컬 실력을 이만큼 키워온 거겠지.
피아노와 관련해서는 내가 조언하거나 의견을 보탤 수가 없었기에 그냥 소소한 이야기나 하기로 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부모님께 초대권 드릴 거야? 전에 어머니가 방송 보고 좋아하셨다며.”
방금 우형과 시연을 초대하는 이야기를 하고 와서인지 한이를 보자 초대권 생각이 났다.
<송투유> 방송 이후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와 형은 아이돌이란 직업을 그리 싫어하지 않는 듯하던데.
“네. 그렇긴 한데 시끄러운 곳을 안 좋아하는 건 여전하셔서요. 오셔도 길게는 못 보실 것 같아요. 차라리 영상이나 DVD로 보여드리는 게 나을지도요.”
역시 음악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좀 다른가.
클래식 공연과 달리 아이돌 콘서트는 몇 시간 내내 몸이 울릴 정도의 큰 소리가 쿵쿵 울려대니까 청각이 예민한 사람은 힘들지도 모르겠다.
그런 거라면 DVD용 촬영 영상을 따로 챙겨드리는 게 나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이는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갑자기 멈춰 섰다.
“이번엔 형을 초대해 봐야겠어요.”
“형은 콘서트에도 오신대?”
“시끄러운 곳을 좋아하는 건 아닌데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니까. 그리고 형수님도 저희 앨범 사서 들어준다고 했거든요. 같이 오라고 하면 올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한이는 씨익 입꼬리를 늘였다.
“뭔가 부족한 것 같았는데, 목표의식이 부족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목표의식?”
“피아노 치는 건 형이 더 잘하겠지만, 피아노 치면서 노래 부르는 건 제가 더 잘할 테니까. 이 기회에 그걸 보여주는 것도 좋겠네요.”
형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었나.
한이는 반쯤 남은 아메리카노를 원샷하더니 한결 상쾌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이 기분으로 연습하면 좀 더 잘될 것 같아요. 전 다시 작업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 그래.”
그렇게 한이는 표정만큼이나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기분을 전환할 겸 주의를 돌릴 생각으로 꺼낸 화제였는데, 어쩌다 보니 다른 쪽으로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잘된 일인가……? 스트레스받는 표정보다 훨씬 낫긴 한데.’
열심히 하겠다는데 굳이 막을 필요는 없기도 하고…….
또 무리해서 골몰하는 것 같으면 가끔 이렇게 밖으로 꺼내오면 되겠지.
나는 민형에게 한이의 상태를 잘 지켜봐 달라고 부탁할 생각을 하며 모노크롬 정찰을 마쳤다.
***
최근 나는 아이리스와 뉴레인의 동향을 상세히 알게 되었다.
아이리스 매니저도 최 비서를 통해 연락이 되고, 퇴사자 포지션이라 뉴레인과 미묘한 거리감이 있던 송 피디도 아이리스 싱글 프로젝트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이전 부하 직원들과 자주 연락을 하는 듯했다.
내부에서 정보를 빼 오려면 빼 올 수 있는 상황이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당사자들이 알아서 내게 먼저 연락을 하거든.
[최근에 기획실에선 후배들 데뷔 전 컨텐츠를 만들려는 것 같더라고요.]
“아이리스 다음 활동은?”
[아직 명확하게 계획이 나온 건 없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 너머로 레드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근 뉴레인 기획실의 집중은 신인 그룹 쪽으로 몰려 있는 듯했다. 아마 대표가 그렇게 지시했기 때문이겠지.
‘고집불통…….’
를 통해 아이리스가 여전히 건재하며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음을 증명해냈는데도 대표는 ‘안 들리는데~ 아닌데~’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자기가 지금까지 회사 성장을 위해 해 온 일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느껴졌다.
[사실 기획실에서 를 영어 버전으로 재녹음해서 내자는 이야기를 꺼내긴 했는데…… 그럼 다음 단계는 또 해외 활동이 될 것 같아서요.]
“……그렇지. 의도가 보이네.”
[해외 팬분들도 중요하지만 지금 집중할 건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레드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형이나 레드나, 평소에는 몰라도 리더로서 나설 땐 확실히 하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레드는 최근 회사와 의견을 조율하는 데에 사활을 걸고 있기에 더욱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이리스 멤버들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편하게 하라고 개인 번호를 알려준 후에 어느 날 옐로가 내게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었는데.
‘레드 언니가 점점 주인님을 닮아가는 것 같아요.’라고.
‘주인님 호칭이 정착한 건 둘째 치고, 날 닮아간다니…… 어떻게 되었다는 의미야?’
어쩌다 보니 효자가 다섯 명이나 생겼는데 이제 날 닮은 딸까지 생기는 건가.
아무튼 레드 말대로 지금은 해외 시장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재계약을 고려할 시기를 앞두고 또 글로벌 진출의 야망을 보이다니. 핀트가 어긋난 것은 여전했다.
역시 대표 라인을 타던 사람들이라 대표의 사고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낙하산에 업계 초짜였던 내가 이런 소리를 하기엔 좀 그렇지만…… 일을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내가 플레이어일 적에 뉴마가 이 사람들을 데리고 좋은 성적을 냈던 건 게임 보정이었나?
대표의 말만 듣던 사람들이라지만, 게임 보정이 사라지고 주체적으로 움직이자마자 이렇게 한숨 나오는 일 처리만 보여줄 수가 있나.
플레이어 재량대로 마음껏 운영할 수 있도록 준비된 직원들이었던 걸까.
그쪽 기획실장이 은근히 귀가 얇던 것도 그렇고, 정말 대표 말만 듣고 휩쓸릴 만한 스타일이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강해졌다.
‘아니, 오히려 마이 엔터가 현실 반영을 해서 이런 사람들이 모인 걸 수도 있어.’
그런 얘기 많잖아. 젊은 디자이너가 혁신적인 디자인을 만들어내도 윗선에서 막히는 바람에 결국 밖으로 나오는 건 고리타분한 디자인들뿐이라는 얘기.
대표와 윗선 몇 명으로도 뉴레인은 충분히 X소가 될 수 있었다.
애초에 대형 기획사조차 비싼 인력들을 데리고 뻔한 악수를 두고는 하는데, 중소인 뉴마가 일을 못하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소규모여도 일 잘하는 기획사는 있다지만…… 그게 뉴레인은 아니었다.
“대표님한테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어.”
[제가요?]
“아, 아니. 내가 한번 얘기를 해 볼게.”
레드는 지금도 대표를 잘 압박하고 있는데, 압박 강도를 더 올렸다간 대표도 참지 못하고 차단을 해 버릴지도 모른다.
대표의 반응이 없으면 레드가 번호를 바꿔가며 연락하는 통에 지금은 이따금 메시지 확인이 되고 있다고 한다. 답장이 없는 건 여전하지만.
‘슬슬 나도 읽씹 모드를 전환해야겠어.’
내가 대화에 잘 응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내 메시지를 좀 더 소중하게 여기고 기다릴 거 아니야?
그걸 알려주기 위해 대표의 메시지를 계속 씹어왔으나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었다.
대표가 여전히 요지부동인 이상, 옆에서 계속 설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마침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엔 그린의 연락이었다.
[QBC에서요. 섭외 연락이 왔어요.]
“혹시 <아이돌부 방학캠프>야?”
[그것도 잠깐 이야기가 나오긴 했는데, 그것보다 먼저 촬영에 들어갈 방송이 있대요. <쉰셋돌> 시즌2라나?]
<아이돌부 방학캠프> 특별 게스트로 촬영하러 갔을 때 손영식 PD가 기획 중이라고 말했던 방송이었다.
손 PD가 내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해 준 모양이었다. 안 좋은데 좋은 사람이라니까.
[시즌2는 예전에 걸그룹으로 활동했던 선배님을 중심으로 프로젝트 그룹을 꾸릴 예정이래요. 그룹 해체 후에 소식이 거의 없었는데 이름 듣고 깜짝 놀란 거 있죠. 다시 방송 나오신다니까 설레서……!]
흥분조로 설명을 이어나가는 그린의 목소리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분명 전에도 이렇게 열변을 토한 적이 있었는데…….
“혹시 팬이었니?”
[네?! 아, 그게…… 맞아요.]
저번에 아이리스 덕후냐고 물었을 땐 아니라고 했는데 이번엔 순순히 수긍했다.
그린에게 덕후란 공식 팬클럽 가입이 기준이었나 보다.
‘그린이는 걸그룹 덕후였나 봐.’
아이리스가 되기 전부터 훌륭한 걸그룹의 떡잎이었던 거지.
[그런데 다음 활동 일정이 안 잡혀서 회사에서는 섭외를 수락해도 될지 고민하는 것 같아요…….]
방송에 나가고 싶은데 회사가 미적지근해서 내게 직접 연락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좋은 선택이었다.
“잘했어. 내가 한번 말해볼게.”
[감사합니다!]
나는 그린과의 통화를 마치고, 바로 대표와의 대화창을 열었다.
그간 내게 씹힌 메시지들이 쌓인 것은 무시하고, 나는 대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린 방송 내보내.]
내게는 대표의 메시지를 씹을 동안 생각해 둔, 반협박조의 멘트가 준비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