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300화 (300/430)

# 300화

우리도 ‘소꿉놀이를 즐긴다’ 정도로만 설명을 들어서 자세한 내용은 아직 알지 못했다.

시연은 배우니까 좀 더 생생한 말투를 쓸 수는 있겠지만, 놀 때는 평범하지 않을까? 함께 노는 친구들은 같은 아이일 테니까.

‘그런데 모노크롬이랑 같이 소꿉놀이를 한다?’

모노크롬에는 이미 배우 데뷔를 마친 한이도 있다.

소꿉놀이지만 아예 연기하라고 판을 깔아준다면 본격적인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그리고 이게 바로 그 궁금증을 해소해주는 코너였다.

시연은 어머니에게서 대기실에 있던 그 가방을 받아들더니 안에서 파일을 하나 꺼냈다.

에메랄드 엔터 사업 계획서와 같은 종류의 파일이었으나 커버의 색이 달랐다.

“그게 뭐예요?”

“이건…… 대본이에요!”

“오……!”

우형의 질문에 시연은 대답하면서 파일을 카메라에 보여주고 멤버들에게도 보여줬다.

파일 겉면에는 시연의 글씨체로 <스타가 될 거야!>라는 타이틀까지 적혀 있었다.

‘소꿉놀이라길래 엄마, 아빠 역할극 놀이 같은 걸 예상했는데…….’

인원이 많으면 친척, 형제, 옆집 친구에 강아지 정도가 나오는 그런 소소한 소꿉놀이 말이다.

그런데 ‘스타’라는 것을 보니 시연의 직장인 연예계를 배경으로 한 스토리가 준비된 듯했다.

멤버들도 이렇게 본격적인 배경 설정이 있을 줄은 몰랐는지 호기심을 드러냈다.

“선생님이 직접 쓴 거예요?”

“네!”

그러면서 시연은 간단한 내용을 설명했다.

“주인공은 배우인데, 루비 엔터테인먼트라는 회사에 있어요.”

시연이 미래에 세울 회사인 에메랄드 엔터테인먼트를 모티브로 삼은 건가.

일반적인 소꿉놀이는 아이들이 평소에 지켜봐 왔던 가족이나 친구를 흉내 내지만, 시연은 배우로서 배우나 소속사 사람들을 자주 봐 와서 이런 설정이 가능한 듯했다.

“그리고 같은 회사에는 아이돌이 있는데요.”

“오, 아이돌!”

“주인공은 그걸 보고 아이돌이 되고 싶어 해요.”

아이돌 캐릭터의 등장에 멤버들이 흥미진진하게 시연의 대본 줄거리를 경청했다.

“그런데 주변에서는 아이돌 하지 말라고 해서, 주인공은 계속 고민해요.”

“헉. 갈등까지……!”

그냥 설정만 적당히 부여하고 재밌게 놀자는 것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본격적인 청춘 드라마였다.

의외의 전개에 나는 옆에서 촬영을 지켜보던 시연의 어머니에게 물었다.

“대체 이런 스토리는 언제 생각해낸 거죠?”

“요즘 시연이가 보는 애니메이션에 아이돌 캐릭터가 나오는데, 그걸 보고 떠올린 것 같아요.”

하긴 아이들이 보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는 뮤지컬처럼 노래나 춤이 자주 나오곤 하던데. 그런 요소를 위해 아이돌 캐릭터가 등장하는 모양이었다.

시연의 스토리는 중간중간 빠져 있는 부분이 많아서, 세세한 디테일은 이 <세대공감 아이+돌>의 작가가 시연과 상의하여 추가, 보완했다고 한다.

“그럼 선생님이 주인공이네?”

“아니요.”

시연이 만들어온 스토리의 주인공은 배우. 그것도 여주인공이었다.

시연의 설명에서 나온 확실한 여자 캐릭터는 주인공 한 명이었기에 한이가 묻자 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는 소속사 사장님 할 거예요.”

시연은 장래희망이 뚜렷한 아이였다.

그 말에 멤버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시연이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은, 멤버 중 한 명이 여주인공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

“레디…… 액션!”

시연이 귀여운 베레모를 쓰고 세트 한구석에 앉아 현장을 지휘했다.

‘이건 소꿉놀이라기보다는…… 감독 놀이?’

역할극 놀이라는 점에선 같지만.

각 배역을 누가 맡을지는 막간 오디션을 통해서 시연이 골랐다.

그리고 당당히 여주인공 역을 차지한 것은…… 역시 연기 경력이 있는 한이였다.

“으아, 힘들다.”

“NG!”

한이가 첫 대사를 내뱉으며 들어오자마자 시연이 벌떡 일어나며 NG를 외쳤다.

“왜죠? 제 연기는 완벽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 ‘휴! 힘들다.’ 이렇게!”

시연이 직접 연기 시범을 보이자 모두가 흐뭇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봤다.

시연의 연기는 그야말로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그에 비해 한이는 운동하다 나온 것처럼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며 쾌남 스타일로 등장했다.

컬러즈가 원하는 모습일 수는 있으나 시연이 원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주인공은 중학생이니까 중학생답게 해 주세요.”

“저 중학생이었나요?”

“그럼 저는요? 아이돌 멤버1은요?”

“배우1이랑 아이돌 1, 2는 고등학생.”

준해가 손을 들고 물어보자 시연이 등장인물들의 나이를 알려줬다.

청춘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청소년 드라마였다.

시연 기준으로 쓰인 대본이어서 등장인물의 연령대가 전부 아이 기준으로 맞춰져 있었다.

참고로 시연이 맡은 소속사 사장님은 스무 살이라고 한다.

‘스무 살에 소속사 사장님이라니…… 집안이 굉장히 좋은가 본데.’

낙하산인 내가 할 생각은 아니었으나 사회에 찌든 인간이라 이런 생각부터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튼, 한이는 시연이 원하는 대로 중학생 소녀를 제대로 연기하기 시작했다.

힘들게 촬영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온 여주인공은 누군가를 보며 설레는 얼굴로 가슴 앞에 손을 모은다.

“저건 우리 회사의 인기 아이돌, 제이제이……!”

제이제이는 재민과 준해의 영문 이름 앞글자를 따서 즉석에서 만든 이름이었다.

재민과 준해는 요즘 한창 연습 중인 신곡 안무를 스포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를 묘한 춤을 추며 열심히 아이돌을 표현했다.

아역배우인 여주인공은 그들을 보며 아이돌을 꿈꾼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었으니…….

“나는 다음 작품에서 너와 같이 연기를 하고 싶-.”

“NG!”

동료 배우 역을 맡은 해랑이 입을 열자마자 시연이 또 NG를 외쳤다.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해랑의 어설픈 눈빛 연기에도 “어머.” 소리를 내며 몰입했으나, 프로 배우인 시연의 귀에는 해랑의 래퍼 딕션이 특이하게 들린 모양이었다.

“말이 너무 빨라요. 좋아하는 사람한테 말하는 거니까 천천히 말해 주세요.”

“제가 쟤를 좋아하는 거였나요……?”

쪽대본 촬영이라 이후 내용을 알지 못했던 해랑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시연의 뒤에서 한이가 ‘어쩔?’ 하는 표정을 지으며 해랑의 몰입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감정이 안 나오는데…….”

“아, 어, 어떻게 할까요?”

해랑이 한이를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시연은 대본이 불만스러워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해랑은 당황하며 자세를 낮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시연은 배우 선배의 얼굴로 돌아가 시선을 어디에 고정하고 대사 어느 부분에서 눈을 깜빡이라는 등 자세한 연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진짜 연기 수업을 받을 줄이야.’

해랑은 <쉰셋돌>에서 원만호가 여자친구 상황극을 시작할 때처럼 머리에서 영혼을 반쯤 내보낸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경험이 있어서인지 나름대로 조금 나아진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그다음 신은 제이제이의 멤버1인 준해가 여주인공에게 춤을 가르쳐주겠다고 하는 장면이었는데…….

“아……. 저도 저 형을 좋아하는 역할이에요?”

“삼각관계……!”

준해는 조금 전 해랑처럼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으나 드라마를 좋아하는 재민은 흥미진진하게 시연의 설명을 들었다.

나도 이후 전개는 알지 못했으나 이걸 보니 예상이 갔다.

‘준해가 진짜 남주다.’

아이돌 멤버 역할은 두 명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멤버1을 준해에게 맡긴 것은 시연이었다.

최애가 준해임을 숨기지 않는 시연의 성격상, 분명 이건 사심이 들어갔다. 여주가 한이가 된 시점에 별로 남주를 맡고 싶어 하는 멤버는 없는 듯하지만.

“하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배우의 길과 아이돌의 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주인공.

여기서 제이제이의 팬과 여주인공의 엄마라는 두 가지 역할을 부여받은 우형이 등장한다.

촬영 내내 딸바보 같은 표정으로 시연을 구경하던 우형은 결국 어울리는 역할을 받아냈다.

아빠가 아니라 엄마인 것은 아마 시연이 엄마와 함께 다니기 때문인 것 같고…….

엄마 역할로 등장한 우형은 분량은 적었지만 이 <스타가 될 거야!>라는 단막극 내 최고의 명대사를 날린다.

“나중에 힘들면 그만둬도 되니까 해 보고 싶은 건 다 해 봐.”

“엄마……!”

아이가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어른스러운 대사인데 작가가 추가한 부분인 걸까? 아니면…….

“이거 혹시 어머님이 시연이한테 해 주신 말씀인가요?”

“그러게요. 시연이가 더 어릴 때, 배우 하기 전에 해 줬던 말인데.”

시연의 어머니는 감동한 표정으로 시연을 바라봤다.

시연은 그때 들은 말을 기억하고 이 대본에 그대로 녹여낸 모양이었다.

‘뭐야. 감동 코드까지 있었잖아.’

여주인공은 엄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스무 살의 소속사 사장인 시연에게 찾아간다.

“사장님. 전 아이돌을 하고 싶어요!”

“안 돼! 할리우드에서 영화 열 편 섭외가 들어왔단 말이야.”

카메라 앵글에 잡히지 않도록 선 재민이 “할리우드 영화 열 편이면 조금 아깝다.”라면서 준해의 귀에 수군거렸다.

꿈과 희망을 전해줘야 할 아이돌 제이제이 멤버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표독스러운 사장님을 연기하는 시연을 보며 다들 입꼬리가 흐늘흐늘해졌으나 한이만큼은 진지하게 연기를 받아쳤다.

“하지만 저는 꿈을 포기하지 않을래요!”

“그러면…… 아이돌만큼 춤을 잘 추면 시켜줄게!”

“갑자기?”

시연이 내놓은 해결책을 듣고 이 장면에 출연하지 않는 우형이 속마음을 그대로 입 밖에 꺼내버렸다.

결국 여주인공은 제이제이 멤버1에게 배운 춤으로 숨겨뒀던 춤 실력을 뽐내고 사장님께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인기 보이그룹 제이제이는 여주인공인 한이를 영입하여 혼성 그룹이 된다는 파격적인 엔딩으로 <스타가 될 거야!>는 마무리된다.

업계인에게는 심히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아냐. 이건 오히려 신선해.’

아이의 상상력이 아니면 누가 이런 스토리를 만들어내겠어.

스태프들이 관객처럼 짝짝 박수를 치는 소리에 따라 나도 박수를 보냈다.

“오늘 수업은 어떠셨나요?”

“재밌었어요!”

다시 초등학생으로 돌아온 멤버들이 시연 선생님의 질문에 환하게 대답했다.

“저는 배우니까, 다른 사람한테도 연기하는 게 재밌다고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 그런 뜻이.”

그냥 아이의 특기를 살린 재밌는 놀이 코너라고 생각했는데.

시연은 선생님으로서 배우란 직업이 어떤지를 진지하게 알려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정말로 프로 배우의 마음가짐이었다.

멤버들도 나처럼 생각하고 있었는지 시연의 깊은 뜻을 듣고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저 진짜 가르침을 받은 것 같아요.”

내내 시연을 귀여워하며 구경하던 우형은 이제 시연에게 존경의 눈빛을 보냈다.

아이라고 해도 어른들만큼이나 자기가 맡은 일에 진지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시간이었다.

촬영이 끝난 후, 자신의 엄마에게 달려온 시연은 나와도 작별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옆에 서 있던 내게로 다가왔다.

“이사님!”

“시연이 준비 진짜 많이 했다.”

“네. 그런데 재밌었어요.”

“오빠들도 엄청 재밌어 보이더라.”

출연하지 않은 나도 덩달아 시연에게 많은 것을 배운 기분이었다.

시연은 오늘 촬영이 정말 재밌었는지 얼굴에 아쉬움이 섞여 있었다.

“시연이 조만간 몬클하우스 놀러 올래?”

내가 다음 약속을 만들어내자 시연은 환한 표정이 되었다가, 이내 잠시 머뭇거렸다.

“거기…… 강아지 있어요?”

“강아지? 맥스? 이만하고 흰색, 검은색 있는 강아지?”

“네. 큰 강아지.”

시연도 개스트 특집 영상을 봤구나.

그런데 안타깝게도 맥스는 몬클하우스에 상주하는 강아지가 아닌데.

강아지가 보고 싶다고 하면 한이한테 또 데려올 수 있을지 물어봐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대답을 얼버무리고 있는데 시연은 작은 손을 꼬물꼬물하며 작게 말했다.

“큰 강아지는 좀 무서워요.”

아아. 멤버들이 맥스에게 몸통박치기도 당하고 좀 격하게 놀았었지.

맥스는 중형견이지만 시연의 눈에는 특대형견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오빠들만 있을 거야. 친구들이랑 놀러 와.”

시연은 안심했는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고 웃는 얼굴로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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