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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99화 (299/430)

# 299화

혹시 또 내 표정이 너무 안 좋았던 걸까? 내 기분을 알아채고 자신의 방법대로 날 위로해주려는 걸까.

시연의 정확한 마음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사람한테 안긴 건 오랜만이라 마음에 그 무게가 진하게 와닿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시연의 토닥임을 받고 있는데, 시연의 어머니가 대기실로 들어왔다.

“엄마. 나 이사님이랑 다 얘기했어. 나중에 직원 500명 뽑을 거야.”

“어머.”

시연의 어머니는 고작 몇 분 만에 훨씬 장대해진 딸의 포부를 듣고 웃었다.

고문 직책인 내가 책임지지 못할 규모가 되어버렸지만…… 그만큼 회사가 커졌으면 좋겠다는 얘기지.

곧 시작할 촬영을 위해 그만 인사를 나누고 대기실에서 나가려는데, 시연의 어머니가 내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거…… 괜찮으시면.”

“젤리인가요?”

그녀가 내게 내민 것은 작게 포장된 젤리 봉지 여러 개였다.

“시연이가 울적해할 때마다 하나씩 까서 주던 건데…… 혹시 필요하실 때가 있을까 해서요.”

역시 시연에게 안겨 있을 때 내 감정이 표정에 다 드러나 있었나 봐.

딸이 있는 엄마의 눈에 그게 포착되었던 모양이다.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두 손으로 받아들고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자 그녀도 미소로 화답했다.

아이나 어른이나, 세상엔 상냥한 사람이 너무 많아.

내게 행운 스탯이 있다면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데에 다 쓰지 않았을까.

나는 과일 맛 젤리를 우물거리며 천천히 복도를 걸어 모노크롬의 대기실로 돌아갔다.

“웬 젤리예요?”

대기실로 들어가자마자 약간 고장 난 당분 레이더가 있는 한이가 바로 내 손에 든 것을 포착했다.

“내가 먹을 거야. 넌 못 줘.”

“흥.”

“형 지금 이사님한테 흥이라고 한 거야?!”

“헉. 저도 모르게 그만.”

옆에 서 있던 준해가 깜짝 놀라며 한이를 쳐다보자 한이도 덩달아 놀라며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막았다.

군것질거리 앞에선 두목님이고 뭐고 없는 모양이었다.

우형이 있는 곳으로 슬쩍 시선을 돌려보니, 우형은 스타일리스트와 소매를 롤업할지 말지 상의 중이었다.

방금 그걸 우형이 봤으면 벌점 200점짜리였는데.

“제가 벌점 적어둘까요?”

내가 우형을 바라보자 준해가 그것을 보고 내 생각을 읽었는지 먼저 말했다.

“지금 한이 벌점 몇 점인데?”

“한 6만 점 되나…….”

노예 기간이 2년에 가까워지고 있잖아.

벌점의 인플레이션이 심해진 나머지, 200점 정도는 티끌 수준으로 느껴졌다.

“음…… 그럼 됐어.”

“역시 두목님. 두목님도 제가 불쌍하시죠?”

“불쌍하다기엔 너무 당당한 거 아니야?”

불쌍하냐는 소리를 이렇게 뿌듯한 표정으로 하다니.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듣고 내가 자비를 베풀어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흥’ 정도는 귀여운 투정 수준이라 애초에 뭐라고 할 생각도 없었다.

모여 있다간 우형이 수상하게 여기고 잔소리를 할 거라면서 한이는 마저 촬영 준비를 하러 떠나갔다.

오늘 멤버들의 의상은 반소매 흰 셔츠에 타이. 간단하게 말하자면 학교 하복 의상이었다.

‘여자애들 교복을 계속 보다 왔는데 마침 여기서도 교복이네.’

작년엔 <아이돌부 방학캠프> 촬영을 위해 교복 사진을 찍었는데 올해는 이 방송이 교복 할당치를 충당시켜줬다.

그리고 함께 촬영할 아이를 위해서인지 멤버들은 각자 가슴팍에 교복치고는 큰 명찰을 달았다.

거기에 각자 준비물이 든 가방을 메면 등교 준비 끝.

“야. 매점 가자!”

“무슨 등교하자마자 매점이야. 아침 안 먹었어?”

멤버들은 학창 시절에 정말로 했을 듯한 멘트를 내뱉으며 교실 세트에 입장했다.

교실이지만 멤버들이 앉을 책상은 칠판을 향해서가 아니라 카메라를 향해서 배치되어 있었다.

멤버들은 각자 자리에 앉아 가방을 두고 교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교탁이 너무 귀여워요.”

“선생님 키가 작으신가 본데요?”

우형의 말에 멤버들은 일반적인 크기보다 작은 교탁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보통 교탁은 성인이 서서 사용하기 때문에 일반 책상보다 높게 제작되지만, 이 교실에 있는 교탁은 멤버들이 앉은 책상과 높이가 비슷했다.

이 <세대공감 아이+돌>은 학교 수업 컨셉.

그렇다면 선생님 역할은 누가 맡느냐. 아이돌은 학생이니까 당연히 아이 쪽이 선생님이다.

‘아이는 아이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니까 나름대로 배울 게 많지.’

방금 내가 시연에게서 씩씩하게 지내야 한다는 것을 배운 것처럼.

“그런데 여기 무슨 학교예요? 고등학교? 중학교?”

재민이 카메라 너머를 보고 묻자 작가에게선 “초등학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멤버들은 생각지도 못한 설정에 입을 떡 벌렸다.

“그럼 선생님이 작은 게 아니라 우리가 너무 많이 큰 거 아냐?”

고등학생으로 있는 기분과 초등학생으로 있는 기분은 매우 다른지 재민이 뭔가 부끄러운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상체를 움츠렸다.

그리고 이 상황에 주목받는 것은 단연 공식 정보상 신장 186cm의 해랑이었다.

멤버들 말로는 ‘더 큰 것 같다’라고 하는데 정확한 키는 미상이었다. 키가 커야겠다는 절박함이 없어서 키를 대충 재는 것 같다나.

“너 대체 우유를 얼마나 마셨길래 키가 이렇게 큰 거야. 초등학생이!”

“요즘 애들은 키 빨리 커.”

“어른 되면 진짜 2미터 50 되는 거 아니야?”

컬러즈가 해랑의 신장을 표현하며 주로 하는 말이 키가 이메다오십, 다리 길이만 이메다 등등이었다.

장신의 초등학생 친구가 더 클까 봐 염려하는 분위기 속, 교실 문이 드르륵 열렸다.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반 묶음 머리를 하고 단정한 체크 무늬 원피스를 입은 시연이 뽀짝뽀짝 소리가 날 것 같은 발걸음으로 걸어 들어와 교탁 앞에 섰다.

오늘 시연은 선배님이 아니라 선생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의 선생님 민시연입니다!”

“와아아!”

시연이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멤버들에게 배꼽 인사를 하자 멤버들도 앉은 채로 같이 배꼽 인사를 했다.

한이와 준해 말고 다른 멤버들은 모두 시연과 첫 대면. 다들 하나같이 귀엽다는 표정을 짓고 시연을 환영했다.

“그러면은. 출석을 부를게요.”

“네-.”

말 잘 듣는 학생인 멤버들은 시연 선생님의 말씀에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리고 시연이 나이 순서대로 출석을 부르다가 준해의 이름을 불렀을 때였다.

“현준해.”

“네!”

선생님처럼 차분하게 출석을 불러나가던 시연은 준해가 대답하자 까르륵 웃었다.

울음도 잘 참는다던 프로 배우 시연이지만, 최애 준해 앞에선 감정이 솔직했다.

“선배님, 아니, 선생님. 왜 준해 부를 때만 웃으세요?”

이유를 아는 한이가 손을 들고 묻자 시연은 또다시 까르르 웃으며 대답하지 않고 무마해버렸다.

‘사실 시연이가 해랑이를 보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했는데.’

준해가 잘생겨서 좋다던 시연이 아닌가.

물론 잘생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고 누가 더 잘생기고 덜 잘생긴 건 없지만, 매력 레벨이라는 객관적인 수치는 해랑이 유독 높았다.

그런데 해랑의 매력 레벨은 아이와 동물에겐 잘 안 통하는 모양이었다.

‘사회의 쓴맛과 풍파를 겪어보고 나서 봐야 더 아름다워 보이는 얼굴 같은 건가?’

아니면 치명적인 분위기가 아이와 동물에게는 ‘위험’의 한 종류로 느껴진다거나.

어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즐기는 무언가를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니까.

아무튼 이 사례는 내 머릿속 매력 레벨 연구의 중요 사례로 저장해두었다.

“선생님, 그럼 저 반장 시켜 주세요.”

“좋아요.”

반장을 정할 필요는 없었으나 준해가 작년의 미련이 남았는지 반장 자리를 요구했고, 시연은 고민도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도 이쁨받고 싶다.”

재민이 엎드려서 책상을 두드리자 준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멤버들을 둘러봤다.

“다들 수업 열심히 들으면 저처럼 신뢰받는 학생이 될 수 있을 거예요.”

“뭐지. 저 자신감.”

그렇게 멤버들은 벌써부터 편애 기미가 보이는 선생님과 함께 오늘의 수업을 시작했다.

***

첫 코너는 미술. 그러나 사실 그림보다는 교감을 위한 토크 시간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야 멤버 두 명이 시연과 구면이지만, 다른 출연진들은 촬영 날 처음 만나는 경우가 더 많을 테니까.

서로 좋아하는 것, 장래희망 등을 주제로 이야기 나누며 친목을 다지고, 그 대화 내용을 토대로 그림을 한 장 완성하면 되었다.

사실 이런 코너가 있다는 것을 미리 전해 듣고 걱정이 많았다.

‘재민이의 화풍을…… 여덟 살 아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시연 선생님은 돌아다니며 멤버들의 질문에 대답도 해 주고 그림을 중간중간 검사하며 질문하기도 했다.

그리고 시연이 재민 앞에 서서 그의 그림을 빤히 바라봤다.

“어떤가요, 선생님?”

멤버들도 시연의 반응이 궁금했는지 다들 그림을 그리던 손을 잠시 멈추고 시선을 집중시켰다.

혹시 그림이 너무 충격적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곤란해하는 게 아닐까? 아이는 작은 것에도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 소중히 대해줘야 하는데.

그러나 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감상평을 남겼다.

“개성 있는 그림이네요. 여기 꽃이 날아다니는 게 좋아요.”

“서, 선생님……!”

옆에서 준해는 “꽃……?”이라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시연의 해석이 정확했는지 재민은 감동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 어른이다…….’

멤버들을 너무나 사랑하는 컬러즈도 종종 재민의 그림을 보면서 ‘ㅠㅠㅠㅠ’ 하며 무서워하거나 ‘ㅋㅋㅋㅋ’를 남기며 폭소하는데, 시연은 어른들보다도 더 어른이었다.

학생의 그림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칭찬하는 모습. 그야말로 훌륭한 선생님의 자세였다.

재민의 그림은 아이의 시선으로 봐야 더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점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전 나중에 커서 미술고등학교로 진학하려고요.”

“으음.”

그러나 선생님의 본보기와도 같던 시연은 재민의 포부를 듣고는 모호한 리액션을 남기고 옆자리로 옮겨가 버렸다.

한이가 그 옆에서 웃겨 죽겠다는 듯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그림을 확인하며 자리를 옮긴 시연은 이번엔 해랑 앞에서 멈춰 섰다.

“와! 고양이.”

“검은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고 해서.”

방금 시연이 멤버들과 대화하다가 꺼낸 이야기였는데 해랑이 그걸 캐치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 매력 레벨이 아니라 상냥함으로 아이에게 다가가는 모습.’

시연은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손가락으로 종이 한구석을 콕 집으며 ‘커피’라는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우형은 ‘귀여워’ 자동 출력 로봇처럼 숨 쉬듯이 감탄사로 ‘귀여워’를 내뱉으며 시연을 구경했다.

활동하면서 아이와 접할 일이 많지 않아서 몰랐는데 우형은 아이에게 상당히 약한 듯했다.

“이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대요.”

“귀여, 앗, 네.”

그림 그리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고 선생님께 혼나 버렸지만.

미술 시간이 끝난 후에는 빠르게도 급식 시간이 찾아왔는데…….

“양이 너무 적어요, 선생님.”

“선생님은 이렇게 먹는데?”

“아차. 우리 초등학생이었지.”

설정을 잊은 한이가 양을 불평하다가 시연의 대답에 입을 합 다물었다.

각자의 식판에 담긴 것은 작은 샌드위치 네 조각과 당근 샐러드, 후식 과일.

여덟 살 시연이 먹는 양 그대로 준비된 점심 식사는 20대 중반의 멤버들에겐 간식거리였다.

“나 이거 한입에 넣을 수 있을 듯.”

“넣어 봐.”

시연에게 한없이 상냥했던 해랑은 한이에게는 냉정했다.

두 사람이 진짜 한입에 들어가는지 실험해보겠다며 힘으로 욱여넣느니 마느니 할 때, 초등학생 설정에 충실한 재민은 반찬 투정을 시작했다.

“선생님-, 저 당근 먹기 싫어요.”

그러자 샌드위치 조각 하나를 다 먹은 시연이 재민에게 당근을 먹이러 찾아왔다.

‘진짜 초등학교 교실 같다.’

한구석에는 애들끼리 투닥이고, 선생님은 자기 밥 먹는 것도 미루고 학생 붙잡고 밥 먹이고.

점심은 촬영 때문에 먹는 것이었지, 실제로는 간식 시간에 가까웠지만 예능에서 이런 선생님의 고충까지 체험해야 할까?

그러나 시연은 꽤나 진지하게 재민의 편식을 고쳐주려 했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토끼예요.”

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바짝 세운 손바닥을 머리 위에 붙여서 토끼 귀 모양을 만들었다.

멤버들도 시연을 따라서 손을 머리 위에 올려 순식간에 토끼 무리가 완성되었다.

“토끼는 뭘 먹어요?”

“당근을 먹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토끼니까 당근을 먹을 수 있어요!”

그 말이 신호라도 된 듯, 준해가 재민이 식판에 남겨놓은 당근을 한꺼번에 집어서 재민의 입으로 재빨리 집어넣었다.

아이다운 어설픈 방법이었지만 우형은 귀여움에 공격당한 듯 가슴을 부여잡았다.

당근 샐러드를 원샷한 재민이 여전히 토끼 귀를 한 채로 시연에게 물었다.

“선생님도 이렇게 당근을 처음 먹게 된 건가요?”

“아니요. 건강에 좋으니까 먹으라고 해서 먹었어요.”

시연의 시크한 대답에 재민은 그냥 혼자 반찬 투정이 심한 아이가 되어 버렸다.

‘어른이다…….’

예능 레벨 톱 멤버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입담. 이게 바로 관록이 아닐까.

그러나 프로 아역배우의 진가를 보여주는 코너는 이다음이었다.

정말로 시연이 선생님으로서 멤버들에게 진정한 가르침을 전수해 줄 시간.

바로 아역배우의 본격적인 소꿉놀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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