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8화
컴백 전이 바쁜 이유는 녹음이나 안무 연습 등 활동 준비가 바빠서이기도 하지만, 활동 기간에 맞춰서 공개해야 할 방송이나 컨텐츠 촬영 스케줄도 중간중간 들어 있기 때문이다.
겨울잠을 준비하는 다람쥐처럼 어딘가에 도토리를 하나씩 저장해뒀다가 때가 되면 하나씩 까먹는 기쁨.
물론 저장하는 건 우리고 까먹는 건 컬러즈지만.
아무튼 오늘 스케줄이 바로 그 도토리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건 기획부터가 힐링 컨텐츠라서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어.’
힐링 기획은 웬만하면 실패가 없다.
저번에 맥스가 몬클하우스에 놀러 온 것도 컬러즈의 스테디 영상이 되었다. 심신이 지칠 때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나.
당시 맥스는 결국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해랑에게 마음을 열었다.
하룻밤 새 모노크롬을 지켜보다가 ‘해랑은 다른 멤버들과 달리 돌발행동을 하지 않고 차분하다’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놀 때는 다른 멤버들과 놀다가 쉴 때는 해랑의 옆에 가서 쉬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그런 서사까지 포함하여 개스트 특집은 컬러즈에게 ‘기승전결에 감동 코드까지 완벽했다’라면서 아직도 극찬을 받고 있으며 대표 추천 영상 반열에도 당당히 올랐다.
‘이번 방송도 그 정도의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오늘 모노크롬이 촬영을 나온 방송은 바로 <세대공감 아이+돌>.
주로 아티스트 관련 방송을 제작하는 뮤직플러스TV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직관적인 프로그램명 그대로, 아이와 돌. 즉, 아이와 아이돌이 나와서 두 세대가 공감을 나누는 방송이었다.
여기서 아이돌은 당연히 아이돌이고, 아이는 바로 아역배우다.
그리고 오늘 모노크롬과 촬영을 함께할 아역배우는…….
“이사님!”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함께 다리에 폭 하고 뭔가가 안긴 듯한 무게감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한이와 웹드라마 촬영을 함께 했던 한이의 배우 선배, 민시연이었다.
나는 시연과 눈높이를 맞추고 인사를 나눴다.
“머리가 길었네? 그땐 단발이었는데. 키도 더 큰 것 같고.”
“네!”
아이는 1년 만에 이렇게도 빨리 크는구나.
작년에 일곱 살이었으니…… 이제 여덟 살인가?
‘이제 초대권도 줄 수 있겠다.’
작년에는 모노크롬 팬미팅이 8세 이상 관람가여서 초대를 못 했는데.
이제 훌륭한 어린이가 되었으니 시간이 되면 콘서트에 놀러 오라고 해야지.
시연을 처음 봤을 때의 첫인상은 차분한 배우 선배라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만나자마자 활기차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시연이는 오늘 준해 오빠 봐서 이렇게 기분이 좋은가?”
혹시 그사이에 다른 아이돌을 더 좋아하게 된 건 아니겠지?
물어봐 놓고 잠시 걱정했으나, 준해 얘기에 시연이 수줍게 배시시 웃는 것을 보니 마음이 바뀌진 않은 모양이었다. 다행이다.
안도하고 있으니 시연의 뒤에 서 있던 시연의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시연이가 이사님 뵈면 보여드릴 게 있다고 아침부터 바쁘더라고요.”
“정말요? 나한테 보여줄 거 있어?”
사실 시연과 나는 그때 딱 한 번 마주쳤다.
내가 모노크롬 소속사의 높은 사람이란 걸 알고 관심을 보이던 시연이었지만, 그래도 머릿속에 그리 인상 깊게 남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웹드라마 촬영 중에 시연이 내 이야기를 하더라고 한이에게 전해 듣긴 했으나 아직도 날 계속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은 의외였다.
‘그런데 나한테 보여줄 만한 게 뭐가 있지?’
준해 포토카드라도 예쁘게 모아온 걸까.
그러면 자랑하고 싶을 수도 있지. 컬러즈도 어디 갈 때마다 미니크롬이나 멤버들 포토카드를 들고 다니면서 인증샷을 찍는걸.
멤버들은 메이크업 중이고 나는 조용한 복도에 나와서 태블릿으로 업무를 확인하고 있었는데 급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시연의 대기실로 초대받아 시연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시연이 내게 보여주겠다면서 가방에서 꺼낸 것은, 아직 삐뚤빼뚤하지만 아기자기한 글씨로 꾸민 파일이었다.
“에메랄드 엔터테인먼트? 이게 뭐야?”
“제가요. 나중에 어른 되면 만들 회사예요.”
“시연이가 가끔 미래의 회사를 상상하는데 이사님한테 검사를 받고 싶다고 하지 뭐예요.”
아하. 그렇게 된 거군.
내가 기획사의 높은 사람이라 숙제를 확인받듯이 한번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자신이 소속된 기획사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고 내게 보여주는 건…… 회사를 차리겠다는 말은 현재 소속된 회사에서 자립하겠다는 소리니까?
‘……여덟 살이 그런 어른의 사정을 고려했단 말이야?’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해 봐서 벌써 그런 생각도 하는 건가.
나이보다 어른스러워야 하는 아역 배우의 고충 같은 것을 상상하며 잠시 마음이 짠해지려던 것도 잠시.
시연이 보여준 파일 내용을 보고 이것을 내게 들고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시연이 펼친 페이지의 글씨를 읽어보니 맨 위에는 사장 민시연.
그 아래에는 배우 10명과 아이돌 10명이라고 쓰여 있었다. 매우 균형 잡힌 인원 구성이었다.
“저번에 배우 회사 사장님 한다고 그랬는데 아이돌도 있네?”
“네. 여기 다섯 명은 한 팀 할 거고요, 아래 다섯 명도 한 팀 할 거예요.”
시연의 회사는 배우만 소속되어 있는데 뉴마는 배우와 아이돌이 둘 다 있어서, 미래 계획을 보여줄 대상으로 내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훌륭한 마이 엔터 꿈나무네……가 아니지. 마이 엔터처럼 회사를 운영하면 안 되지.’
알고 보니 아이돌 친화적이었다고는 해도 그건 ‘알고 보면 착한 사람’과 비슷했다. 모르고 보면 일단 나쁘단 거지.
숨은 속뜻을 모르는 많은 사람을 악덕 사장의 길로 꾀어냈다면 그건 그냥 악마 같은 게임이다.
그래도 회사 이름을 짓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회사를 만들어나갈지 상상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는 나도 잘 안다.
나는 게임을 처음 실행했을 때의 기분을 되살려 시연의 상상력에 조언을 보태주기로 했다.
“그럼 그룹 이름도 정했어?”
“그건 아직 못 정했어요.”
“보이그룹인지 걸그룹인지 먼저 정해야 이름도 정하기 쉽겠지? 팀이 두 개니까 하나는 보이그룹 하고 하나는 걸그룹 하면 되겠다.”
“왜요?”
그…… 정해진 건 아닌데 사업적인 이유로 많이들 그렇게 해.
하지만 그런 현실적인 이유를 알려줄 순 없으니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 동심을 지켜줄 수 있는 대답을 쥐어짜 냈다.
“어어……. 보이그룹도 좋고 걸그룹도 좋은데 하나만 하기엔 아쉬우니까?”
다행히 시연은 급조한 이유로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거리고 펜을 들어 해당 사항을 아래에 메모했다.
의자에 앉아 허공에 붕 뜬 발을 흔들흔들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재밌는 모양이었다.
귀여워. 이런 귀여운 사장님이면 악덕 운영을 해도 봐줄 수 있지 않을……. 아니, 무슨 이유에서든지 악덕 운영은 안 된다.
시연의 귀여운 리액션을 구경하며 사업 계획에 첨언하고 있는데 옆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옆에서 일정을 정리하던 시연의 어머니가 진동이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저 잠시 복도에서 통화하고 와도 될까요?”
“아, 시연이는 제가 보고 있을게요.”
그녀는 내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하다는 듯이 눈을 찡긋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가 여기 눌러앉은 게 문제였다.
원래라면 여기서 통화해도 될 텐데 내가 함께 있는 바람에 복도로 나가서 통화하려는 걸 테니까.
잠시 인사하고 나올 예정이었는데 시연이 귀여워서 생각보다 오래 있고 말았다.
시연의 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동안, 우리는 사업 계획을 계속 꾸며나갔다.
“매니저? 매니저도 많이 있어야 해요?”
“으응. 적은 것보다는 많은 게 좋지.”
연예계에 과거 모노크롬과 같은 슬픈 상황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엄마와 같이 다녀서 매니저 인원은 감이 안 잡히는지, 시연은 내 말을 듣고 매니저 100명이라는 파격적인 고용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완성된 에메랄드 엔터테인먼트 사업계획서 업데이트 버전.
듬성듬성 빈 부분도 많지만 그걸 채우는 과정은 재밌는 거니까 시연의 상상에 맡기고 나는 적당히 고문 역할에서 빠지기로 했다.
‘아직 통화는 안 끝나셨나 보네.’
아니면 편하게 있으라고 배려해주신 건가?
나는 시연이 파일을 다시 가방에 고이 집어넣는 것을 보다가 질문을 하나 했다.
“시연아. 예전에 눈물 연기 할 때는 엄마가 시연이를 보고 싶어 하는데 못 만나는 상상을 한다고 했었잖아.”
“네.”
시연이 가방의 지퍼를 단단히 잠그고 뿌듯한 표정으로 다시 나를 올려다봤다.
“그럼 반대로 시연이가 엄마를 보고 싶을 땐 어떻게 해?”
내 상황에 대한 조언을 아이한테 구하다니, 너무 한심한 어른인가.
그런데 어린아이라면 다른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가장 순수한 답변을 해줄 것 같아서, 공감하고 싶은 마음에 묻고 말았다.
시연은 “으음…….” 하면서 생각에 빠진 듯 발을 몇 번 통통 튕기더니 대답했다.
“그때는 저는 안 울어요.”
“그래? 시연이 대단하네.”
어릴 때부터 배우 생활을 하면서 엄마와 떨어져 있을 때도 많았기 때문일까.
그런데 시연은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예전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우는 연기 하다가요. 그만 울어도 되는데 계속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배우들이 눈물 연기를 하다가 상황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촬영이 끝나고도 눈물이 그치지 않아서 진정하느라 시간을 써야 했다는 이야기를.
시연이 너무 대견하게 일을 잘해서 프로 배우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역시 어른들보다 감정 조절이 어려운 어린아이였다.
“계속 울고 있으니까, 엄마도 울려고 그랬어요.”
“그랬구나…….”
앞에서 딸이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힘들게 우는데 마음 편할 어머니는 세상에 없겠지.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 달리 어린 나이에 어른들처럼 연기를 해내야 하는 딸을 보고 마음 한구석에는 죄책감이 들었을 수도 있다.
어머니에게 이입하여 얘기를 듣다가 나도 괜히 슬퍼지려는데 시연은 오히려 힘차게 대답했다.
“그래서 안 울어요. 제가 울면 엄마가 슬퍼하거든요. 그러니까 씩씩하게 있을 거예요.”
엄마가 슬퍼하는 것을 상상하면서 그 감정에 공감하여 눈물 연기를 하지만, 본인이 슬플 때는 엄마를 슬프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참는다고 한다.
‘나보다 더 어른이다…….’
그래도 아이는 울면서 큰다고 하던데…… 아무리 배우라고 해도 너무 감정을 참기만 하면 힘들지 않을까?
“그럼 시연이는 다른 때는 안 울어?”
걱정되어서 물어보니 시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떨 때 울어?”
“동생이 화나게 할 때…….”
감정 조절을 하는 건 일할 때 한정이었나 보다. 역시 프로 배우였다.
기특하고 귀여워서 등을 쓰다듬고 있자 시연은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다른 기억이 떠올랐는지 작은 입을 다시 열었다.
“다른 애들이랑 같이 연기하다 보면요. 엄마 보고 싶다고 우는 애들도 있는데요.”
“응.”
“그럼 제가 이렇게 꼭 안아줬어요.”
시연은 그렇게 말하며 상체를 틀어 나를 폭 안았다.
그리고 내가 방금까지 등을 쓰다듬어주던 것처럼, 내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지금…… 나 위로해주고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