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97화 (297/430)

# 297화

회사에 너무 일찍 도착해버려서 조용하기는 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바로 업무를 시작해도 이 기분으로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나는 잠시 의자에 푹 기대앉아 사색에 빠졌다.

‘평소처럼 있자, 평소대로.’

아이리스 퀘스트를 진행할 때가 특수한 상황이었던 거지, 나는 원래 이 상태였다.

핸드폰으로 엄마와 메시지를 나누고 일을 한다.

중요한 것을 잠깐 빼앗기긴 했어도 결국은 돌려받았으니 새삼스레 엄청난 변화를 느낄 이유는 없었다.

약간 분통이 터지고, 세상이 좀 원망스럽고, 다 뒤엎고 배 째라면서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살짝 들 뿐.

부정적인 감정에 빠져 있으면 있을수록 나만 손해다.

‘커뮤 중독으로 치유해 볼까…….’

새벽이나 아침에는 밤새 덕질하느라 새벽 감성에 푹 젖어 감정이 벅차오른 팬들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

애들이 이번 앨범 참여도 높았다고 한 게 설마..?

회사에 사람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

└저기 작곡가분도 우형이 친구자나..

└아 뉴마가 또

└뭐야주인님돌려줘요

━━━━━━━━━━━━

“…….”

낮이나 저녁에는 어느 커뮤니티든 활동하는 사람이 많아서 부정적인 화제는 금방 지나가는데, 새벽에는 사람이 적다 보니 이런 이야기 흐름이 오래가기도 했다.

아이리스의 이번 뮤직비디오 맨 뒤, 스태프 롤에 프로듀서로 내 이름을 올린 것을 컬러즈도 확인한 모양이었다.

나뿐만 아니라 타이틀곡 작곡가인 성운도, 편곡에 이름을 올린 송 피디도 전부 모노크롬과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로아 씨 또한 재민이 속한 팀 미로의 단장 중 한 명이고.

‘내가 협력을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한정적이라서 어쩔 수 없었어…….’

그 탓에 마치 내가 사람들을 데리고 뉴레인으로 빠져나간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물론 실제로 그랬다면 내가 대역죄인이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단발성이니까.

컬러즈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기에 불안해하는 거고 시간이 지나 모노크롬의 앨범이 나오면 불안함은 해소되겠지.

그래도 컬러즈가 평상시대로 회사를 의심하며 정상 운행 중인 모습을 보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이란 사실이 새삼스레 실감 났다.

‘시간도 많은 김에 무지개들 반응도 찾아볼까.’

이번 싱글과 뮤직비디오에 대한 반응은 많이 찾아봤지만 오늘은 활동 첫날이 아니던가.

지금쯤 사전 녹화 현장에 왔던 무지개들의 후기를 공유하며 설레고 있지 않을까.

예상대로 무지개는 이른 아침부터 활기찬 분위기였다.

━━━━━━━━━━━━

오늘 우리 애들 진짜 반짝반짝했다ㅠㅠㅠㅠ

아이리스는 이제 특수효과 필요없어 자체 반짝이 가능

└오늘 사녹간 무지개들 다 반짝거렸단 소리부터 하넼ㅋㅋㅋㅋ

└나도 기억 공유좀

└애들이 스포하지 말랬는데 ㅎㅎ..진짜 기다린 보람이 있다

━━━━━━━━━━━━

분명 나도 조금 전까지 이들과 함께 사전 녹화 무대를 보고 있었는데 퀘스트 완료 메시지에 엄마의 메시지까지, 큰일이 한꺼번에 몰아치는 바람에 마치 엊그제 일처럼 느껴졌다.

신경 써서 같이 준비한 싱글이니까 좀 더 여유 있게 기념했으면 좋았을걸.

먼저 간다는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방송국에 남겨두고 온 아이리스 멤버들이 떠올라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지개들이 좋아하는 걸 보니 더 걱정도 되고…….’

컬러즈가 지금 뉴마를 걱정하는 것과 반대로 뉴레인은 앞으로가 문제인데 말이야.

아이리스 멤버들에게 뜻이 맞는 직원들이 있는지 잘 살펴보라고 했고, 이번 싱글 프로젝트 동안 뉴레인에 심어둔 송 피디에게도 분위기가 어떤지 지켜보도록 부탁했다.

다행히도 대표의 뜻에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멤버들의 의견을 지지하는 직원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다.

‘권한이 큰 기획실의 책임자들이 대표를 따르는 게 문제지만 혁신의 가능성이라도 있는 게 어디야.’

최근 뉴레인의 행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무지개들은 뉴레인보고 ‘망해라, 망해라’ 하지만 진짜 망하면 큰일이다.

아이리스는 퀘스트 보상을 받아서 어떻게든 그룹이 유지될 가능성이 커졌지만, 뉴레인에는 데뷔를 기다리는 보이그룹이 있지 않은가.

뉴레인이 망해 버리면 데뷔조에게는 열심히 수능을 준비해서 대학에 합격했는데 학교가 사라지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야말로 재앙이다.

‘하……. 대표가 문제지.’

핸드폰을 부순 것도, 아이리스를 불안하게 만든 것도, 뉴레인이 그 꼴인 것도.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가다 보면 돌고 돌아 결국 플레이어였던 내게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나 자신을 책망할 수밖에 없었다.

***

기분이 태도에 드러나는 상사가 최악인 법이다.

점심시간, 오전 내내 뭘 해야 기분이 좀 풀릴까 고민하던 나는 카페에 가서 카드를 긁었다.

날이 더워지다 보니 다들 수분 섭취가 많아져서 음료를 돌리면 반응이 좋았다.

아티스트 팀에 커피를 돌리고, 지금은 모노크롬이 안방처럼 사용하는 연습실에서 멤버들이 음료 마시는 모습을 구경하는 중이다.

“형,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해랑이 눈치를 보듯이 흘끔흘끔 날 쳐다보다가 어색하게 어깨를 긁적였다.

준해도 내가 해랑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알고는 ‘잘못한 게 있으면 먼저 자수해라.’라면서 있지도 않은 죄를 고백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해랑은 아무 잘못도 없다. 컬러즈 공식 마음 안정제인 해랑의 얼굴을 보다 보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해서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뿐이다.

‘보기야 좋지만 매력 레벨 11에 기대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닌 것 같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얼굴을 보기만 해도 축 처졌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건 종교 간증에나 나올 법한 얘기지.

정말 그런 효과가 있으면 해랑을 TV에서 보는 게 아니라 병원에서 의사와 상의한 후에 처방받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내 시선을 받은 해랑이 찔릴 것도 없는데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것 같아서 나는 그를 눈으로 압박하는 것을 그만두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멤버들을 힐링 컨텐츠로 사용하는 건 미안한 일이지만…….’

회사 최고의 힐링 요소가 멤버들이었다. 보고 있으면 잘 성장한 게 느껴져서 흐뭇하다고 해야 하나.

물론 내가 멤버들을 어린 시절부터 키운 건 아니지만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돌린 시선의 끝에 있던 재민은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같이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눈싸움이라도 거는 줄 알았는지 응수에 나선 모양이었다.

옆에서 우형이 “왜 이사님을 째려보고 있어…….”라면서 재민을 툭 치는 바람에 싱겁게 끝나 버렸지만.

‘아무래도 지금 내 눈빛이 험악한가 봐.’

누군 없는 잘못을 되짚고 누군 승부를 거는 거라고 착각하고.

멤버들 구경도 큰 효과는 없는 것 같아서 한숨을 푹 쉬고 있는데 한이가 옆으로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두목님, 사탕 드실래요?”

“갑자기 무슨 사탕?”

“고민이 많으신 것 같아서요. 그럴 땐 당분을 섭취해 줘야 기분도 나아지고 머리가 쌩쌩 잘 돌아가거든요.”

역시 머리가 복잡한 게 표정에 다 드러나고 있었나 보다.

한이가 내민 것은 평소에 그가 목 관리를 위해 들고 다니는 사탕이었다.

당분이 기분 전환이나 뇌 활성화에 도움을 주는 건 맞는 말이긴 한데…….

“너 들고 다니는 거 무설탕 사탕 아냐?”

“어……?”

분명 한이가 들고 다니던 건 단맛만 내고 당 흡수가 안 되게 만드는 종류의 사탕이었던 것 같은데.

한이가 사탕 케이스 겉면의 영양성분표를 확인하고는 벙찐 표정이 되었다.

“그러게요……? 그럼 난 지금까지 왜 머리 쓸 때 사탕을 먹었던 거지? 분명 먹으면 머리 잘 돌아갔는데.”

“플라시보 효과였던 거지.”

옆에서 준해가 한이의 증상을 전문 용어로 설명해냈다.

나름대로 건강을 신경 써서 구비해 다녔던 듯한데, 자기 손으로 슈가프리를 골라놓고 당분을 섭취하는 기분으로 먹고 있었다니.

지금까지 허상의 당분을 섭취해 온 한이는 충격받은 얼굴로 사탕을 한 알 꺼내 먹었다.

“지금 하나 먹어야겠다. 머리가 안 돌아가서.”

“플라시보라니까.”

“몰라! 나는 효과 있어!”

한이가 특기인 ‘일단 큰소리로 주장하기’를 발동했다.

바로 앞에서 한이가 소리를 왁 지르자 준해는 재빠르게 귀를 막았다.

목소리 크기로 논리를 이긴 한이는 다시 몸을 틀어 내게 사탕 케이스를 내밀었다.

“아무튼 드실래요?”

“그, 그래.”

내가 지금 ‘난 됐고 너 많이 먹어.’라고 하면 ‘이사님도 절 무설탕도 모르는 바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라면서 이 얘기를 붙잡고 늘어질 것 같았다.

하나씩 소포장 된 사탕을 한 알 받아 포장 종이를 벗겨내 입에 넣으니 은은한 허브향이 입에 감돌았다.

“확실히 사탕 먹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긴 해.”

“그거 플라시보 효과인데요?”

“…….”

방금까지 준해에게 플라시보 효과가 아니라며 큰소리를 내던 한이가 손바닥 뒤집듯이 태도를 바꿨다.

‘방심하다가 한 방 먹었다.’

결국 한이는 우형에게 ‘이사님께 건방지게 굴지 마라.’라는 이유와 함께 벌점 200점을 받고 말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멤버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회사 최고의 힐링 요소. 이 정도는 되어야 컬러즈의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수 있지.

멤버들 덕분에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마저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지금까지 내 스포일러를 잘 피해 간 민형이 있었다.

그는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보더니 바로 내게로 다가왔다.

“와…… 주인님.”

“……주인님이요?”

지금까지 민형이 쓰던 ‘주인님’은 멤버들에게 ‘너희 주인님이 찾으신다.’ 같은 뉘앙스로 말할 때나 등장했었는데.

“주인님은 최고의 프로듀서입니다.”

민형이 느닷없이 기계 같은 칭찬을 내뱉었다.

이건…… 아마도 아이리스 싱글과 뮤직비디오를 감상해서 이러는 거겠지.

아이리스 싱글은 저녁 발매였고, 어제저녁에 나는 아이리스의 뮤직비디오 리액션 영상을 촬영하느라 뉴레인에 있었다. 따라서 싱글 발매 후에 그와 내가 마주치는 건 지금이 처음.

민형은 매우 감명이 깊었는지 어제 느꼈던 감상을 지금 내게 전해주려는 듯했다.

“그거 아세요? 되게 혁신적인 스타일인데 보고 있으면 ‘아, 이게 근본이구나!’ 하는 느낌. 무슨 아이리스 석박사가 만든 뮤비를 보는 줄 알았다니까요.”

“아이리스 석박사…….”

이건 또 무슨 새로운 표현법이람.

그래도 찐 무지개인 그가 이렇게 극찬하는 것을 보니 뿌듯함이 들었다.

‘그래. 대성공 음반이니까 이 정도 반응은 나와줘야지.’

퀘스트 성공을 기념할 새도 없이 우울해지는 바람에 성공의 기쁨을 제대로 못 누렸는데, 이제야 ‘그간 뉴레인에서 해 왔던 일들이 좋은 성과를 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속으로 대성공의 여운을 느끼고 있는데 문득 민형 옆에 서 있는 우형과 눈이 마주쳤다.

우형은 묘한 표정으로 민형을 힐끔거리더니 내게 미안하다는 듯 머쓱하게 눈웃음을 지었다.

본인도 아이돌이니 주접이나 덕질 현장은 익숙하지만, 사촌 형이 회사의 책임자 앞에서 덕질하는 장면은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따지자면 점심시간은 근로시간이 아니라 잠을 자든 덕질을 하든 자유고, 칭찬해준 것도 고맙지만 우형을 위해서 좀 진정시켜둘까.

“저 아침에 사녹 무대도 보고 왔는데 동선이 뮤직비디오랑은 차이가…….”

“아니, 제 눈으로 볼게요!”

그렇게 민형은 스포일러를 피해 도망쳐버렸다. 변함없이 웃긴 사람이라니까.

아이리스 주접쟁이가 빠르게 들어왔다가 빠르게 나가서 다시 조용해진 연습실. 화제는 그 아이리스를 잠시 맡았던 내게로 돌아왔다.

“주인 님 그러면 이제 뉴레인 일은 끝나신 거예요?”

“으응. 아마? 애프터서비스가 필요하면 잠깐 가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저희도 뮤비 10분짜리로 만들어요.”

“10분은…… 너무 도전인데?”

재민이 아이리스의 뮤직비디오가 5분이 넘는 게 좋아 보였는지 그 두 배를 탐냈다. 하지만 영상 길이가 길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니야!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가 중요하므로 너무 길어도 좋지 않다. 영상이 길수록 사람들은 클릭하기를 주저하거든.

이번 아이리스의 뮤직비디오가 5분이 넘는 것도 조금 도전이었지.

그런데 재민의 말이 신호가 되었는지 이번엔 한이가 입을 열었다.

“저희도 연기 신 넣어보면 재밌을 것 같아요.”

“그러게. 한이 너도 뮤직비디오에선 제대로 연기해 본 적이 없었네.”

신셋 뮤비처럼 상대역이 있으면 대사는 없어도 행동이나 표정 연기가 들어가곤 하는데, 모노크롬 뮤직비디오에는 상대역이 나온 적이 없었다.

모노필름 시퀄 때 잠깐 들어간 한이의 표정 연기를 보고 ‘쟤는 연기를 잘하겠다.’라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 한이의 될성부른 떡잎 시절이었다.

그런데 한이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뇨. 해랑 형 주인공 시켜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뜻이었어요.”

흥미롭다는 뜻의 재미가 아니라 웃긴 쪽의 재미를 말하는 거였냐고.

‘해랑이는 연기 레벨 3이란 말이야…….’

해랑은 연기 같은 건 전혀 하고 싶지 않은지 한이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보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해랑의 연기를 볼 기회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