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화
지금은 아직 모두가 자고 있을 새벽.
메시지가 온 시간을 확인해 보니 내가 지금까지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한꺼번에 도착한 듯했다.
[(알 수 없음): 밥은 잘 챙겨먹어]
[(알 수 없음): 언제 오니?]
[(알 수 없음): 일교차가 심하더라 감기 조심하고]
대화창을 올려 확인해 보니, 엄마는 내가 갑작스러운 출장으로 전파가 닿지 않는 곳으로 잠시 떠났다고 알고 있었다.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들어왔을 때처럼, 정말 허술한 이유였다.
‘요즘 시대에 인터넷이 일절 안 통하는 오지로 장기 출장이라니!’
1년 넘게 인터넷을 사용한 메시지만 전달되고 전화는 불가능한 것도 이상했지.
작년 초, 엄마는 내게 잘 다녀오라며 메시지로 인사했지만 정말 출장이라는 이유로 내가 사라진 것을 납득했을까.
어쩌면 내가 안 좋은 마음을 먹고 도피했거나 일부러 엄마를 피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엄마는 내게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먼저 말하지 않는 것은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렇게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기다렸을 텐데 이번엔 아예 연락 자체가 끊겨 버렸다.
‘세상에 이런 불효녀도 없을 거야.’
심지어 이 메시지를 언제까지고 못 볼 뻔했다.
온갖 감정이 휘몰아쳐서 머리가 복잡했지만, 걱정시키지 않으려면 어떻게 먼저 답장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했다.
나는 인적이 드문 복도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하지 못할 바에는 전후 사정은 얼버무려 넘어가고, 일단 밝게 답장하는 게 낫겠지.
[신주인: 미안. 너무 오래 연락이 안 됐지? 메시지를 이제야 확인했어!]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면 보고 답장하겠지.
어슴푸레 동이 트는 창밖을 보고 스마트폰 화면을 껐는데, 답장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알 수 없음): 전화는 왜 안 걸린다니?]
지금 원래 내가 있던 세상에선, 엄마가 내 목소리를 들으려고 전화를 걸고 있다.
이 말이 ‘보고 싶다’는 말처럼 들려서 눈물이 왈칵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나마 예전처럼 소통이 된다는 사실이 작은 위안이었다.
[신주인: 그러니까 ㅠㅠ 진짜 이상한 곳으로 와버렸어. 예전 회사보다 더해. 확 그만두든가 해야지]
그만둘 수 있을 리 없지만 평소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생각하면서 괜한 투정을 부렸다.
그리고 말이라는 건 한번 꺼내면 내 통제를 벗어나 눈덩이처럼 그 의미를 더하기도 했다.
“그만두고…… 싶은 건가……?”
전부 그만두고 싶은 게 내 본심인 걸까?
이곳에서 많은 일을 이뤘고 성취감을 얻으며 살아왔지만 항상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이 있었다.
어떻게든 외면하기 위해 가둬뒀던 감정이 둑이 터지듯 와르르 쏟아져나오는 것 같았다.
‘진짜, 좀 힘들다.’
아니, 좀이 아니라 많이 힘든 것 같아.
쌓아둔 불안이 한꺼번에 터진 탓에 더 휩쓸리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데, 이 감정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내게, 엄마는 조심스레 방향을 제시해주듯이 메시지를 보냈다.
[(알 수 없음): 딸도 목표가 있으니까 그렇게 힘든 환경에서도 오래 일해 온 거겠지? 기왕 하는 김에 최선을 다해봐.]
엄마도 매우 답답할 텐데, 조금 더 기다려주겠다는 그 말에 또다시 무언가가 울컥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내가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엄마는 ‘그래도 너무 힘들면 그만두고 돌아와’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 지금은 돌아갈 수가 없어…….’
엄마에게 하지 못할 말을 혼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쪼그려 앉아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내게 선택지는 두 개뿐이지. 지금처럼 계속 일하거나, 포기하거나.
그리고 포기하는 것은 절대 좋은 선택이 되지 못한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면 어차피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네.’
이제 반년 남짓. 그 짧은 기간이 지금은 막막하게만 느껴져서 나는 또 한숨을 쉬었다.
***
“아, 나 어떡해.”
“왜?”
녹화를 마치고 난 뒤, 옐로의 말에 아이리스 멤버들이 전부 그녀를 쳐다봤다.
“나 너무 잘한 것 같아.”
“아하하하! 뭐야. 갑자기 무슨 자신감이야!”
블루가 그 말에 폭소를 터트리며 몸을 휘청거렸다.
하드한 트레이닝 덕분에 체력이 생겨서인지, 계속 기다려왔던 활동이어서인지 이른 새벽인데도 모두 활기가 넘쳤다.
네이비도 이 분위기를 타서 한마디 하고 싶었는지 고개를 살짝 들고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사실 나도 완벽했다고 생각했어.”
“로아쌤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으음…….”
네이비는 ‘아냐!’와 ‘조금 더!’를 연발하던 로아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잠시 말문이 막혀 버렸으나, 지금은 그런 건 상관없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로아쌤도 잘했다고 해주실걸? 아마?”
“그랬어요~. 우리 도윤이 잘했어요~.”
그린이 네이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쭈쭈 해주자 모두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보며 레드는 마음에 뭔가가 벅차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진짜 잘했다.”
아이리스도 이제 5년 차.
지금까지 여러 활동을 거쳐왔고 음악 방송 무대에도 여러 번 서 봤지만,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이 목표하던 모습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몇십 년이 지나도 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겠지만 지금 이 기분과 고양감을 떠올리면 무슨 일이든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으로 멤버들을 둘러보니, 모두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 표정만으로도 전해져왔다.
“활동 이제 시작이니까 다 끝낸 것처럼 힘 빼지 말고 일단 쉬자.”
“대기실로 고!”
멤버들은 복도에서 방방 뛰다가 오렌지가 상황을 정리하자 재빨리 발을 옮겼다.
대기실로 돌아온 레드는 대기실과 앞 복도를 두리번거리다가 매니저인 공다혜에게 물었다.
“이사님은 어디 가셨어?”
모니터링 할 때만 해도 옆에 있던 주인은 녹화를 끝내고 들어오니 보이지 않았다.
자신들보다 먼저 대기실로 돌아온 줄 알았는데 이 근처에도 없었다.
“몸이 안 좋으신지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시더라고. 너희한테 수고했다고 말 전해달래.”
공다혜는 주인의 안색이 좋지 않았던 것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역시 이른 새벽부터 나와서 이것저것 살피느라 피곤했던 게 아닐까.
다혜는 걱정이 많아 보이는 주인에게 아이리스는 자신이 잘 살피겠다고 말한 후 그녀를 돌려보냈다.
레드는 주인이 없는 것을 알고도 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제일 먼저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녹화를 마치고 난 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불안함이 크게 해소되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들었다.
지금 이 기분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는데.
“방금 가신 거야?”
“응. 아마 지금 내려가고 계실걸?”
“나 잠깐만 다녀올게.”
바로 1층의 관계자 출입구로 향한 레드는 다행히도 주인의 뒷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발걸음이 굉장히 무거워 보였다.
“이사…….”
주인을 부르려던 레드는 주인의 뒷모습 너머로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인의 비서였다.
눈이 마주쳐 살짝 고개를 숙이자 상대에게서도 가벼운 묵례가 돌아왔다.
그의 담담한 표정을 보고 레드는 자신이 너무 들뜬 상태라는 것을 인식했다.
지금은 감사 인사를 전하는 것보다 주인이 쉴 수 있게 놔두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사님은…… 우리를 잠깐 맡아주신 것뿐이니까.’
오늘은 아이리스를 보러 왔지만 주인은 다시 뉴마로 돌아간다. 당연한 일이다.
원하던 음반을 낼 수 있어서 기뻤지만, 제작이 끝난 탓에 주인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사실에는 아쉬움이 들었다.
뉴레인에도 주인 같은 존재가 있었다면.
그런 레드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뉴마에 있을 적 자신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던 대표였다.
***
첫 사전 녹화를 마치고 돌아온 멤버들 앞에서 내가 죽상으로 있으면 오히려 민폐일 것 같아서 나는 아이리스의 매니저에게 말한 후 방송국 건물을 나섰다.
힘이 없어서 고개를 떨구고 걷다가, 출구 바로 앞에 익숙한 구두가 보여서 고개를 들어보니 아는 얼굴이 있었다.
“최 비서?”
내가 놀라서 그를 부르자 최 비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알고 여기 나와 있어?”
오늘 새벽에 아이리스의 사전 녹화를 보러 간다고는 미리 말했는데, 그에게 방송국으로 오라고 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컨디션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예정보다 일찍 나왔는데 출구에서 떡하니 마주치다니.
방청을 기다리는 팬들처럼 여기 계속 서 있던 건 아닐 테고.
“아이리스 매니저에게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체 언제 그런 커넥션을 만들어둔 거지.
방금 아이리스 매니저인 다혜에게 말을 하고 나왔는데 그새 연락이 된 모양이다.
“그래도 이 근처에 있었다는 거 아냐?”
“출근하는 김에 일찍 나왔습니다.”
“으음…….”
나는 아직 어슴푸레한 하늘을 쳐다봤다.
해가 긴 여름인데 이제야 동이 트기 시작한다는 건 정말 이른 시간이란 뜻이다.
잘 이해는 안 갔지만 최 비서가 내 이야기를 듣고 바로 납득했던 것처럼 나도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쨌든 내게는 잘된 일이다. 체력은 있는데 정신력이 크게 소모된 탓에 택시를 잡을 기운도 없었다.
새벽공기가 선선하니까 어디 조용한 데 앉아서 머리 좀 식히다가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날 태우러 왔다니.
“댁으로 모실까요?”
“아니. 회사로 갈래.”
지금 이 기분으로 집에 혼자 있으면 우울함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게 확실했다. 차라리 출근해서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게 나았다.
도로는 한산했으나 날 태운 차는 빠르지 않은 속도로 나아갔다.
조용한 차 안, 나는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최 비서는 그만두지도 못하는 상황에 어려운 프로젝트를 덜컥 맡게 되면 어떨 것 같아? 보통은 싫은 게 당연하겠지?”
지금까지 제시된 퀘스트 내용대로 목표를 향해 달려오기만 했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이 이런 상황에 빠진다면, 자발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가려고 할까? 나는 사실 등을 떠밀려서 억지로 여기까지 온 건 아닐까.
다른 사람이라면 어땠을지 궁금해져서 최 비서에게 질문했다.
최 비서는 대답을 고민하는 건지, 아니면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는 중인지 잠시 말이 없었다.
“……내가 그런 일을 맡기겠다는 뜻은 아니고.”
“아, 아뇨. 잠시 생각해 본 것뿐입니다.”
최 비서는 차가 나아가는 속도만큼 느긋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는 말투로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제게 그 일이 맡겨진 거겠죠. 그러면 열심히 하자는 생각부터 들지 않을까요? 저 말고는 아무도 그 일을 맡을 사람이 없다면 더욱이요.”
“오히려 부담스러워서 피하고 싶지 않아?”
“그걸 감수하고도 해야 할 일이라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일 테니까요.”
“대단한 사람이네.”
“이사님도 대단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갑자기 내 칭찬을 한다는 건…… 내가 물어본 게 내 이야기라는 걸 알아챈 걸까.
내가 아이리스 싱글 프로젝트를 맡은 것을 돌려 말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이니까 열심히 한다…….’
원래 살던 세계에 대한 미련으로 가득 차 있던 머릿속이 환기되듯이,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에서 내가 하는 일도…… 내게 가치 있는 일이지.
그러니까 뭔가를 이뤘을 때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성취 자체로도 기뻤다.
‘그래. 나는 분명 이 일을 억지로 하고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걸 자각했다고 의욕이 마구 솟아나지는 않았다.
엄마와 만나지 못해서 터진 우울한 감정이 내 마음을 더 흔들어댔다.
‘만일 성공하더라도…….’
내가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더라도, 나는 이 감정을 분명히 또 겪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의 기억을 지우지 않는 이상 우울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제 내 마음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무거운 머리를 창문에 기대고,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이곳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