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화
“대표님 번호를 알려줄 수는 있는데, 주의점이 있어.”
대표가 아직도 계약 해지 위약금을 노리고 있다면 레드에게 험한 말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대표가 레드에게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이상, 야생 동물을 대하듯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대표님이 어쩌면 심한 말을 할 수도 있어. 내가 전에 말했지? 대표님이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 같다고……. 원래 사이비 종교라는 게 사람 마음의 약한 부분을 이용하는 법이거든. 그래서 일부러 상처부터 주려고 할지도 몰라.”
“네. 전에 얘기해 주셔서 각오하고 있어요.”
“판단이 흐려져서 아이리스에 관해서 아무렇게나 말할 수도 있으니까, 본론 외의 다른 얘기를 듣더라도 크게 마음 쓰지 마.”
“저는 정말 아이리스의 의견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뿐이에요. 저한테 따로 뭐라고 하시는 건 상관없어요.”
레드도 이미 그런 점을 고려하고 내게 물어본 듯,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꼭 아이리스의 의지를 전해내고야 말겠다는 포부가 느껴지는, 강인한 리더의 얼굴이었다.
마음이 쉽게 흔들릴까 봐 걱정부터 했는데 이 정도면 믿어도 될 만했다.
대표는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아티스트를 직접 찾아와서 내게 경고하려 했는데.
‘그럼 난 아티스트가 널 직접 찾게 만들 거야.’
직원은 대표 편일지 몰라도 아티스트는 내 편이거든.
대표도 아티스트에게 직접 연락받는 건 처음일 터. 대표는 찔릴 것이 많은 사람이니 아마도 크게 당황할 것이다.
‘대표가 우리 집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꿀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대표가 아이리스의 연락을 받고 이들을 게임 캐릭터가 아니라 같은 사람으로 보게 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 반응할지는 궁금했다.
그리고 얼마 후, 대표에게 연락이 닿았는지 궁금하여 레드를 만났을 때 슬쩍 물었다.
“대표님한테 연락은 해 봤어? 연락 받으시니……? 원래 나도 연락은 잘 안 됐거든.”
연락이 안 되는 건 대표가 아니라 나지만.
내 질문에 레드는 눈을 살짝 내리깔면서 어깨를 힘없이 아래로 늘어트렸다.
“처음 보낸 메시지에는 ‘읽음’이 떴는데, 대답은 안 해주시네요…….”
아마도 대표는 처음 보는 번호로 메시지가 오자 누군지 몰라서 대화창을 눌러보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이리스의 레드라는 것을 알고 무시하기로 한 것 같지만.
“그래? 그 번호가 대표님 번호가 맞는데…….”
“네. 없는 번호는 아닌 것 같아서 멤버들 번호로도 연락해 보고, 매니저 언니 핸드폰으로도 연락해 보고 그랬는데 아직 답장은 못 받았어요.”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대표를 압박하고 있었잖아?
몰랐는데 레드는 은근히 집요한 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레드에게는 그럴 의도가 없는 듯했지만, 대표는 번호를 바꿔가며 연락하는 레드가 무섭게 느껴졌겠지. 나였다면 무서웠을 거야.
‘알림 수신을 꺼도 꺼도 끊임없이 오는 푸시 알림을 보는 기분이려나…….’
대표가 처한 상황이야말로 공포 영화가 아닐까.
그러고 보니 내가 계속 메시지를 무시하니까 대표는 포기했는지 한동안 메시지를 안 보내다가 요즘 다시 보내기 시작했던데.
아마 레드가 메시지를 보낸 게 내가 시킨 일이라고 생각해서 항의하고 싶었나 보다.
대표는 레드의 메시지를 씹고, 나는 대표의 메시지를 씹고. 메시지의 버뮤다 삼각지대 같은 구도가 완성되었다.
“처음에 확인은 하셨다면 네가 소통을 원한다는 건 전해진 것 같으니까 계속 연락해 봐. 할 말이 있으면 회사를 통해서라도 제스처를 보이시겠지.”
“네. 틈날 때마다 계속 연락 시도해 볼게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레드가 든든해서 나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대표가 레드의 무한 메시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두 가지뿐. 알아서 기어 나오거나, 아이리스의 계약 기간이 끝나거나.
아이리스의 계약은 반년 이상이 남았으므로 그 전에 지긋지긋해서 답장을 먼저 하지 않을까.
번호를 바꾸는 법도 있겠지만 내가 대표에게 방해되는 짓을 하면 내게 연락하려 할 것이다.
‘퀘스트나 게임 얘기 같은 건 다른 사람이나 회사를 통해서 전하기 어렵고 나랑 직접 대화해야 할 테니까.’
그러면 난 또 레드에게 번호를 넘겨야지.
또 약점을 하나 잡은 것 같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뉴마로 복귀하자, 나를 본 재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주인 님,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으응. 좀 골치 아팠던 일이 생각보다 잘 풀려서.”
그러고 보니 재민은 대표를 직접 만났었지.
자신에게 바보라고 한 대표가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은 재민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까.
“너한테 바보라고 한 그 사람한테 사소한 복수를 해줬거든.”
“그분한테 바보라고 하셨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다음에 만나면 바보라고 해 줄게.”
내가 대신 복수를 해준다는 것이 만족스러웠는지 재민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웃었다.
그리고 마치 고자질하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른다고도 했었는데.”
“걔가 너한테 그런 말도 했었어?”
그냥 바보라고 했다면 유치한 수준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천치라고 했단 말이야?
대체 대표는 뭘 하러 왔던 거야? 안 그래도 대화한 내용을 마음속에 엄청 담아두는 애인데 마음 상할 소리만 하고.
“네. 그러니까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제가 아니라 그분이라고 말해 주세요.”
재민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건 처음 봤다.
혹시 다른 소리를 더 들었던 걸까. 재민이 굳이 내게 말하지 않았다면 그럴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묻기는 어렵지만.
나는 다음에 대표를 만나면 딱밤을 때려줄 생각을 하면서 재민에게 복수를 약속했다.
***
의 2차 티저부터는 드디어 제대로 된 컨셉이 드러난다.
2차 티저는 뮤직비디오의 스토리 파트를 제외한, 댄스 파트 위주의 티저였다.
저번 1차 티저가 티저 사기용이었다면, 이번 티저는 ‘노래가 얼마나 좋은지 들어봐라, 그리고 무대를 기대해라.’라고 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교복=청량’ 공식에 얽매여 비슷한 컨셉을 예상하던 무지개들은 예상과는 다른 분위기의 곡이 나오자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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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뭐야 몽환 컨셉이었나 보네 ㅇㅁㅇ??!!!!
와 나 진짜 청량이라고만 생각해서 티저 보자마자 너무 놀랐엌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개좋아!!!!
└얼마만에 제대로 컨셉잡고 하는거냐ㅠㅠㅠㅠㅠㅠㅠ 우리 애들 이런거 잘한다고요
└레인보우-레이니데이 이름 비슷해서 그런가 레인보우 생각나ㅠㅠㅠ옛날 느낌 가끔 그리웠는데
└뻔한청량컨셉또한다고실망해서죄송합니다제가너무섣부르게판단했습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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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초 앨범이 떠오른다는 게 멤버들 생각만은 아니었나 봐.’
이것만으로도 무지개들은 ‘드디어! 신선한 컨셉을!’이라면서 좋아했지만 그들에게 보여줄 것은 더 남았다.
곡 자체는 몽환 컨셉이 맞지만, 뮤직비디오는 또 다르다.
그다음으로 공개된 3차 티저는 2차 티저와 반대로 스토리 파트에만 집중했다.
‘뮤직비디오 다음으로 이걸 빨리 보여주고 싶었지!’
3차 티저는 교복을 입은 퍼플과 단역 배우들이 연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보라! 집에 안 가?]
[응. 나 동아리방 청소해야 돼.]
[이그. 대충 했다 그러고 째지.]
[다 그런 마음으로 째서 지금 완전 창고 됐잖아.]
웃으며 퍼플과 인사한 친구들은 먼저 교실을 나서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이 다시 뒤돌아선다.
[아, 그런데 오늘 비 온댔는데.]
[나 사물함에 우산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화면은 전환되어 혼자 남아 동아리방을 정리하는 퍼플의 모습을 비춘다.
퍼플은 동아리방을 치우다가 구석의 한 상자에서 먼지 쌓인 오르골을 발견한다.
먼지를 털어내고 오르골을 작동시키자, 위에 달린 인형이 천천히 돌며 음악이 흘러나온다.
음악이 마음에 든다는 듯 테이블 한구석에 올려두고 창문 앞의 소파에 앉는 퍼플.
그리고는 방금 들은 친구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비 오는 밤에 학교에 혼자 남아 있으면, 갇혀서 못 나온다는 소문 있잖아.]
퍼플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시끌벅적하게 하교하는 학생들과 하늘을 보고는 안심한 듯이 소파에 깊이 몸을 기댄다.
[비, 안 올 것 같은데.]
여운 남는 오르골 소리와 함께 화면은 페이드아웃.
깜빡 잠이 든 퍼플이 눈을 뜨면서 화면은 밤으로 전환되고, 오르골 소리 대신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산을 찾으러 교실로 돌아가려던 퍼플은 어두운 복도를 지나다가 인기척을 느낀다.
소리가 들린 교실을 엿본 그녀가 발견한 것은, 오르골에 달린 인형처럼 우아하면서도 섬뜩하게 춤을 추는 옐로. 퍼플은 숨을 급히 삼키며 뒷걸음질을 친다.
그러다 퍼플의 발에 뭔가가 차이고, 옐로는 그 소리에 반응하여 고개를 홱 돌린다.
카메라는 퍼플의 발 뒤에 떨어진, 희미하게 반짝이는 프리즘을 클로즈업하고…… 뉴레인 로고가 등장하며 티저는 끝이 난다.
상상하지도 못한 내용의 티저에, 무지개의 반응은 [어..??]부터 시작하여 점점 물음표와 느낌표의 개수가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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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거.. 영화 예고편이야? 우리 방송국 아니고 영화관 가는 거야?
잘 모르겠지만 천만관객 가보자고
└가보자고222
└아니 근데 진짜 뭐지 뮤비 대체 어떻게 나오는거지??
└세계최초 두시간짜리 뮤비 어떰
└난 예상을 포기했다ㅋㅋㅋㅋㅋ 주는대로 먹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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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레인 로고 나올 때 뉴레인 뿌수러갈뻔
아 왜 거기서 로고 튀어나와서 끊냐고!!!! 회사이름 안 궁금하다고요
└영화 잘 보고 있는데 갑자기 영화관 불켜네 아ㅋㅋ
└뉴레인 눈치챙겨라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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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들은 재생 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몰입해서 감상하고 있었는데 뉴레인 로고 때문에 강제로 현실로 돌아왔다며 짜증을 냈다.
회사를 욕하고 있지만 그만큼 티저가 마음에 든다는 표현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야! 옆 반에서 싸움 났대!’라고 소문내듯이 ‘야! 아이리스 공포 컨셉 한대!’ 하며 이곳저곳으로 이 소식을 퍼 나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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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얼마 전에 청량 낸다 그러지 않았음?
└그런 줄 알았는데 까보니까 공포컨셉ㄷㄷ
└티저가 페이크였음ㅋㅋㅋㅋ
└티저 때깔 보니까 칼 갈고 나온듯
└근데 꽤 공들인 것 같은데 왜 디싱이지?
└선공개로 내는 거라는 소문 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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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기사 보니까 그룹명이 무지개의 여신이라 거기 집중했다던데 갑자기 왜 귀신 컨셉임
악법도 법이니까 귀신도 신이다 뭐 그런건가?
└오ㅋ일리있다
└아 귀신 컨셉 아니라고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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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단편적인 정보밖에 안 나와서 혼란스럽네.’
그래도 그만큼 관심이 가고 궁금하다는 뜻일 테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싱글 발매일.
이번엔 제작이 급하게 결정된 디지털 싱글이어서 쇼케이스 등의 행사가 없었다.
따라서 아이리스 멤버들은 회사의 한 회의실에 모여 무지개들처럼 뮤직비디오 공개 시각을 기다렸다. 리액션을 촬영할 카메라도 같이.
“나 촬영할 때 무서워서 눈 감아야 할 때 슬쩍슬쩍 떴는데 찍혔으면 어떡해?”
“그럼 우리 네이비가 눈 떴는지를 집중적으로 보자.”
블루의 말에 네이비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어떡해! 이제 10초도 안 남았어!”
“3초!”
“올라왔다!”
빔프로젝터와 연결된 노트북 앞에 앉아 F5를 연타하며 아이리스의 채널을 새로고침 하던 그린이 뮤직비디오 섬네일을 클릭해 재생했다.
방금까지 수다스럽게 떠들던 멤버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오프닝을 장식하는 퍼플의 연기를 흐뭇하게 보다가, 뮤직비디오 속 배경이 어두워졌을 때부터는 다시 긴장이 맴돌았다.
“아, 깜짝이야!”
“왜 네가 너를 보면서 놀라!”
옐로가 화면 속의 자신을 보고 놀라서 큰 소리를 내자 멤버들도 덩달아 놀라 몸을 들썩이더니 이내 웃음이 터졌다.
그린 왈, 옐로가 무표정할 때 분위기가 엄청 다르다더니. 확실히 화면 속의 옐로와 회의실에 앉아 있는 옐로는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긴장하며 손을 꼭 쥐었다가, 무서워서 옆 멤버에게 기대다가, 영상미에 감탄하다가.
뮤직비디오의 엔딩에서 모두가 함께 무지개가 뜬 아침을 맞이할 때는 멤버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그리고 배경으로 깔렸던 타이틀곡이 끝난 후, 스태프 롤이 나온 후 끝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 이거!”
나란히 선 멤버들의 모습과 함께 다른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하고, 멤버들의 시선은 카메라 뒤에 앉아 있던 내게로 동시에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