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90화 (290/430)

# 290화

만나자마자 대뜸 바보라고 하진 않았을 테고.

대표의 본체가 신주인이라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었는데, 이건 어찌 된 정황인지 전혀 추측할 수가 없었다.

내가…… 처음 본 사람에게 바보 소리부터 하는 안하무인은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했길래…….’

궁금했으나 재민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느닷없이 욕을 먹은 처지다.

무슨 소리를 했냐고 묻는 건 바보 소리를 들은 책임을 재민에게 돌리는 일 같아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옆에서 듣던 준해가 나 대신 물었다.

“형이 이상한 소리 한 거 아니야?”

“아냐! 나 이상한 소리 안 했어. 바보 아니라고 그랬어.”

“그게 바보처럼 들린 게 아닐까?”

분명 대표가 멤버 앞에 나타난 것은 심각한 사안인데, 그에 비해 대화가 한없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그 얘기 말고 다른 건 잘 못 들었다고?”

“으음. 네. 별로 기억에 남는 얘기는 아니었어요.”

재민은 기억을 되돌리듯이 눈동자를 빙글 돌리더니 별거 아니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별 얘기 안 하고 갔다면 그냥 나한테 경고하려고 왔던 걸까. 자기도 언제든 멤버와 접촉할 수 있다고.

‘멤버랑 직접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도 모노크롬에게도 좋은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실제로…… 재민에게도 바보라는 상처 입을 만한 이야기를 하고 갔고.

재민은 지금도 입을 삐죽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매우 나빴던 모양이다.

“맞아. 재민이는 바보 아니야. 그 사람이 잘 몰라서 그래.”

“그렇죠? 나 바보 아니라니까.”

재민은 내 말을 듣더니 멤버들을 돌아보며 자랑하듯이 말했다.

평소에 멤버들에게도 가끔 바보 소리를 듣고 있었던 걸까.

그래도 재민이 바보가 아닌 것은 사실이다. 남이 지나가듯이 하는 이야기도 귀담아듣고 엄청나게 오래 기억하는 스타일이니까.

“그래서 그 사람 누구예요? 주인 님한테 물어보래요.”

“그…… 누구냐면…….”

다음에 멤버들 앞에 또 나타날 수도 있으니 믿으면 안 될 사람이라는 걸 경고해야 했다.

그런데…… 뭐라고 설명하지?

‘이 회사의 대표이며 같은 본체에서 떨어져 나간 플레이어의 자아라고……?’

아이리스는 대표를 직접 만난 게 아니었기에 ‘대표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는 말로 그녀의 이상한 행동을 얼버무릴 수 있었는데, 재민은 대표의 얼굴을 봐 버렸다.

누가 봐도 나와 유전적으로 이어져 있는 듯한 젊은 여자. 그러나 쌍둥이 자매는 아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갑자기 게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을 것 같고, 멤버들에게 가장 잘 와닿을 만한 설명이라면…….

“녹음실 귀신…….”

“네?!”

“두목님, 아는 귀신도 있으세요?”

내 입에서 귀신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우형이 화들짝 놀랐다.

녹음실 귀신을 직접 목격한 한이는 그 귀신이 나와 구면이었다는 소리에 마치 인맥이 넓은 것을 칭찬하듯이 말했다.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려서인지 멤버들은 오히려 별거 아닌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했다.

그냥 괴담으로 둘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지금이 해명할 타이밍인가.

“나한테 귀신 친구가 있는 게 아니고, 얼마 전에 알았는데 그 귀신이 사실은 귀신이 아니었어.”

“그, 그럼 뭔데요?”

“얼굴 닮은 친인척……?”

우형은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묻고, 해랑은 현실적인 수준에서 가장 그럴싸한 추측을 해냈다.

나는 사실 일부분에 그의 추측을 반영하여 멤버들이 이해하기 쉬울 만한 설명을 만들어냈다.

“맞아. 대표님과 핏줄이 이어진 사람이라고 보면 되는데…… 회사를 노리고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핏줄이 이어진 사람을 넘어서서 대표 본인이지만.

한이가 내 말을 듣더니 자신의 입을 양손으로 가리며 눈치를 봤다.

“헙. 그럼 저 그럼 대표님 친척분한테 되게 실례되는 말을…….”

녹음실 귀신 소문의 근원지가 바로 한이였다.

그는 이질적인 존재를 제대로 이상하게 본 것뿐이지만 졸지에 멀쩡한 사람을 귀신 취급한 것처럼 되어 버렸다.

“아냐. 귀신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해. 원래 회사에서 그렇게 모습을 보이면 안 될 사람이거든. 웬만하면 엮이지 마. 사상이 좀 위험한 사람이라.”

“사이가…… 별로 안 좋으세요?”

내가 미간을 좁히며 말해서인지 준해도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탈뉴마 하면 대표와의 연결고리도 끊길 텐데 괜한 걱정거리부터 심어줄 필요는 없겠지.

“응. 그러니까 누가 맛있는 거 사준다 그래도 따라가면 안 돼.”

“저희가 어린아이는 아닌데…….”

어색하게 웃는 우형의 말과 다르게 해랑은 한이를 바라봤다.

“너보고 말씀하시잖아.”

“나도 안 따라갈 거거든?”

내가 커피나 디저트를 사 준다고 할 때마다 가장 먼저 신나게 나서는 멤버가 한이라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아무리 그래도 20대 중반 청년을 유괴하려고 하진 않을 거야.

“그런데 방금 형이 이사님이랑 똑같이 생겼다고 했잖아.”

회사를 둘러싸고 심상찮은 일이 일어나는 것 같아서 불안한지, 준해가 재민을 보면서 말했다.

대표와 나는 머리카락 길이로 구별할 수 있지만 헤어스타일이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거고.

‘만일 대표가 내 행세를 하면서 멤버들에게 접근하면 어떻게 막지……?’

대표가 대표 신분으로 해외를 오가던 것을 생각해 보면, 지문 등의 공식적인 생체 정보는 신주인이 아니라 신대표의 것으로 적용되는 듯한데.

그런데 사람끼리는 생체 정보를 인증하고 나서 대화하는 게 아니잖아?

보상을 받는 과정을 건너뛰고 신주인인 척 지내는 건 시스템이 개입해서 막는 걸까?

또 복잡한 설정이 나타나서 고민하고 있는데, 재민이 정답을 말해주듯이 입을 열었다.

“아냐. 뭔가 달라.”

“네가 보기엔 뭔가 얼굴이 달라?”

나도 대표를 보고 똑같은 얼굴이라 소름이 돋았는데, 재민은 뭔가 다른 점을 느꼈나?

“아뇨. 겉모습은 다른 점을 잘 모르겠는데, 주인 님은 주인 님!이란 느낌이 느껴져요.”

“명재민이 명재민! 하는 것 같은 말이네.”

한이가 황당한 소리를 들은 듯이 ‘재민이 재민 했다’라는 말로 가볍게 그의 말을 넘겼다.

하지만 나는 재민의 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게임일 적에 사람들이 대표를 잘 인식하지 못하게 방해하던 힘이 아직 작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내게서 뭔가 특별한 영적 기운이 느껴지는 게 아니라.

그렇다면 재민이 내게 느꼈다는 ‘주인 님!이란 느낌’은 그냥…… 친근함인 듯하다.

그에 비해 대표에겐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거고.

‘그러면 내 얼굴을 알지만 나와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은 대표나 나나 똑같아 보일 수도 있나……?’

아이리스 멤버들이 내게 경계를 풀어서 다행이었다. 마음을 닫은 채로 대표를 만났다가 내 이미지까지 이상해졌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남에게 나쁘게 대할 생각은 없었으나, 나는 대표의 접근을 막아야 할 사람들에게는 친근감이 느껴지도록 특히 잘 대해줘야겠다는 도덕책다운 결론을 냈다.

***

<아이돌부 방학캠프>는 학교 컨셉을 차용했다.

그래서 촬영 시작 전에 반장부터 뽑았었지.

그리고 이번 촬영에서 모노크롬이 맡은 역할은…… 1기 수석 졸업생.

이전 회차 출연진들이 졸업생으로 이름을 남기고, 그렇게 ‘아이돌부’의 명맥이 계속 이어진다는 설정이었다.

작년 모노크롬의 촬영 의상은 활동하기 좋은 편안하고 캐주얼한 사복 스타일이었지만, 오늘은 졸업생답게 깔끔한 스타일로 맞췄다.

“아, 이사님. 오랜만에 뵙네요.”

“네. 안녕하세요.”

촬영장에 도착하니 제작진 무리에서 한 명이 빠져나와 내게 인사했다. 이 프로그램을 맡은 손영식 PD였다.

오랜만이라고 하지만 서로 잊을 수 없는 인연이지. 모노크롬의 전 멤버와 현 멤버를 한 방송에 섭외했던 또라…… 아니, 좀 특이한 PD.

그래도 내 마음에도 여유가 많이 생겼는지 악감정은 들지 않았다.

작년 여름에 컴백하면서 이 방송의 덕을 보기도 했고.

“사실 <최고의 팀메이트> 쪽으로 먼저 섭외 드리고 싶었는데.”

“…….”

또 무슨 이상한 기획을 하려고.

악감정이 안 든다는 건 취소. 바로 경계심이 드는 걸 보니 아직도 내 마음에는 앙금이 남아 있었나 보다.

“천상식 선생님이 예능은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고요.”

“한이를 부르고 싶으셨나 봐요.”

“네. 같은 팀이 되든 다른 팀이 되든 재밌을 것 같았는데 아쉽게 됐죠.”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 우리는 천상식을 굳이 피하지 않아도 괜찮다. 천상식은 아마 한이를 피하고 싶겠지만.

한이도 천상식을 엄청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이미 물 건너간 <최고의 팀메이트>는 건너가게 놔두고,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아이돌부 방학캠프>가 겨울에 걸그룹 편을 했잖아요. 이번 겨울에 걸그룹 2편도 촬영하나요?”

바로 아이리스 떡밥 던지기.

이번 싱글 프로젝트에서 내가 할 일은 주로 기획에 치중되어 있다. 안무를 짜고 녹음하는 동안에는 내가 붙어 있어도 할 일이 없단 소리다.

모노크롬에 관심을 가지는 대표 때문에 불안하니 모노크롬을 눈앞에 두기, 그리고 <아이돌부 방학캠프> 제작진에게 아이리스 이야기를 슬쩍 꺼내기. 이게 오늘 나의 목표였다.

손영식 PD는 내 질문에 다행히도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네. 여름과 겨울 특집 제작을 세트로 승인받거든요.”

“이미 출연진이 정해진 게 아니라면 아이리스도 섭외 후보로 둬 주시면 정말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 같은 소속사였죠. 모노크롬이랑 아이리스.”

모노크롬 책임자로 온 내가 아이리스 이야기를 꺼내자 손 PD는 아이리스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저번엔 계속 해외 스케줄이 차 있다고 해서 섭외할 생각도 못 했는데…….”

“올해는 국내에 있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가능성이 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만드는 게 내 목표이기에 일단 던지고 봤다.

아이리스에게 국내 활동의 선택지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뉴레인은 그걸 포기하고 해외로 나가는 데에 리스크가 생길 테니까.

‘예전엔 아이리스를 찾는 방송국 사람들한테 모노크롬을 어필하고 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상황이 반대가 됐네.

둘이 같이 잘되면 좋을 텐데 시소도 아니고 한쪽이 잘 풀리면 한쪽이 문제가 생기고. 이것도 다 내 업보려나…….

손영식 PD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더니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 전에 다른 방송에서도 걸그룹 멤버가 필요하게 될 것 같은데…….”

“정말요? 무슨 방송에서요?”

“<쉰셋돌> 시즌2라고 해야 하나. 뼈대가 비슷한 기획이 하나 있거든요. 혹시 따로 연락받으신 건 없으신가요?”

우리가 <쉰셋돌> 관계자이기에 이번에도 참여하는 게 아닌지 궁금한 듯했다.

<쉰셋돌>이 잘되어서 한 번 하고 끝내기에는 기획이 아까웠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엔 보이그룹이 아니라 걸그룹을 구성하는 모양이다.

“글쎄요. 저희에게는 아직 연락이 온 게 없는데.”

“흠. 그렇군요. 혹시 모르니 말씀하신 아이리스 얘기는 그쪽에도 전해두겠습니다.”

“네! 그래 주시면야 정말 감사하죠.”

손 PD는 곧바로 다음 촬영 지시를 내려야 하는지 대화를 마무리한 후 카메라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직접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의외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쉰셋돌>은 원만호 씨와 라솔 씨의 대상 콜라보로 홍보했었는데. 그러면 이번엔 혹시 천상식 씨를……?’

아니. 방금 손 PD도 천상식이 예능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으니 그건 아니려나.

아직 출연진을 모으기 전인 것 같으니 라솔 씨한테도 한번 물어봐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노크롬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는데, 멤버들은 한곳에 모여 뭔가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저거 왜 저렇게 새빨간데.”

“저기 까만 게 더 이상하지 않아?”

“형이 먹어 봐. 형은 저번에 시식 안 해 봤잖아.”

불안한 얼굴의 멤버들 옆에서, 해랑이 기회를 양보하듯 우형에게 뭔가를 권유하고 있었다.

‘아, 이 시간이면 그걸 할 차례구나.’

지금은 저녁 시간 전. 낮이 길어져서 아직은 밝지만 좀 더 있으면 노을이 질 시간.

작년에도 딱 이 시간대에 촬영한 코너가 있었다.

바로 리더전. 각 팀 리더의 요리 대결.

작년 리더전에서 우형이 만들었던 지옥의 떡볶이를 경험한 멤버들이 시식을 우형에게 미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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