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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86화 (286/430)

# 286화

미친 건가? 위약금을 얼마나 뜯어내려는 거야.

아이리스를 방치했던 대표의 태도가 이제야 정확히 이해되었다.

그 후에 회사가 하락세를 걷든 말든, 대표는 일시적인 수입으로 목표치를 충당해서 퀘스트를 완료해버리면 그 뒤는 책임지지 않아도 되니까.

대표는 이곳을 억지로라도 게임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큰 죄책감 없이 반인륜적인 선택지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몇 명의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

“지금은 아이리스 계약 만료가 다가오니까 조급해서 그런 생각을 했는데, 모노크롬이 계약 기간을 길게 잡고 들어오면 여유가 생길 것 같거든. 그러면 아이리스를 그렇게 쥐어짜지 않아도 괜찮고. 내 말 이해했어?”

아이리스의 계약 기간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퀘스트를 완료하려고 무리수를 뒀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모노크롬의 책임자라고 해도 멋대로 계약시킬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진 것도 아니고. 계약은 멤버들이 동의해야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와서 말하는 거지. 걔네는 활동을 하고 싶어 했고, 요즘 분위기가 좋다며? 지금처럼 잘 지원해준다고 네가 구슬리면 되잖아.”

그러니까 이건 내 목표를 위해 모노크롬을 뉴레인에 팔아먹으란 소리다.

내가 미간을 좁히자 대표는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가 본데, 가식은 한번 버리면 그다음은 쉬워. 너도 급해지면 마음이 바뀔걸. 잘 생각해 봐.”

생각해 보면 자기 말이 맞을 것이라는 저 확신에 찬 말투를 들으니, 뉴마와 뉴레인의 몇몇 임직원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종종 모노크롬을 무시하며 저런 태도를 보이곤 했는데.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대표의 말투가 불쾌감을 불러일으켜서 오히려 반항 심리부터 들었다.

‘……잘 생각해 보자. 대표한테는 모노크롬이나 나나 별로 중요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잖아.’

대표는 퀘스트 보상을 받아서 신주인이라는 신분을 얻으면 끝.

대표가 그 신분을 노린다는 것은 이미 예상했기에 나도 지금까지 계속 생각을 해 봤다.

내가 지금 신주인으로 있는데, 대표가 목표를 이뤄서 ‘신주인’이 되어버리면 나는 어떻게 될지.

‘현실 복귀는 퀘스트 보상이니까, 시스템이 공짜로 날 돌려보내진 않을 테고.’

내가 추측한 경우의 수는 이러하다.

신분도 뭣도 없는 허상 같은 존재가 되거나. 분리되었던 나의 세계선이 대표에게로 다시 합쳐지거나, 아니면 그냥 사라지거나.

무엇이 되었든 나는 퀘스트 진행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나는 대표보다 빨리 퀘스트를 완수해야 한다.

‘그런데 음악대상은 1년에 딱 한 번 개최되니까 멋대로 빨리 끝낼 수가 없지.’

그러니까 내가 대표보다 빠르게 퀘스트를 완료하는 게 아니라, 대표가 나보다 먼저 퀘스트를 완료할 수 없도록 해야 한다.

한마디로 내겐 대표를 방해해야 할 이유가 있다는 거지. 대표가 날 도와서 얻는 이득은 딱히 없고.

‘이거…… 선수 치려고 온 거 아냐?’

갑자기 불쑥 나타나서 혼란스럽게 만들고, 도와주는 척 혹하게 만들어서 판단력을 흐리려고.

대표로서는 나와 모노크롬을 둘 다 뉴레인에 두는 방법이 가장 좋았겠지.

모노크롬을 퀘스트 진행에 사용할 수도 있고 대표를 방해할지도 모르는 나까지 통제할 수 있으니까.

마치 날 위해 제안하는 것처럼 얘기했지만 내용을 잘 뜯어보면 그렇지 않다.

‘퀘스트 기간을 늘릴 수 있다는 것도 추측일 뿐이고.’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고 목표만 던지는 시스템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대표도 정확히는 모를 가능성이 클 터.

퀘스트 기간을 늘릴 방법이 있다면 찾고 싶긴 하지만, 역시 이 방법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을 끝낸 나는 대표의 제안을 보이스피싱과 동급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대표는 내가 제안에 흔들려서 생각에 빠졌다고 생각했는지 말없이 기다리다가 입을 열었다.

“엄청 심각한 표정이네. 생각 좀 했어?”

“반대로 묻자. 모노크롬을 영입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찾을 생각은 없어? 이제 신인 그룹도 런칭할 거고, 회사를 성장시킬 기회는 앞으로도 노릴 수 있잖아.”

“그 다른 방법이란 게 뭔데?”

“아이리스를 제대로 키우는 거지.”

‘시험을 잘 보려면 공부를 제대로 해야지’와 같은 당연하고 정석적인 대답이었으나 지금 내가 대표에게 해 줄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내 이야기가 와닿지 않았는지 이번엔 대표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이리스는 조만간 계약이 끝나면 나갈 수도 있잖아. 회사에 불만이 많아 보이던데.”

“그러게 진작 잘하지 그랬……. 아니, 아이리스는 지금 활동이 절실하니까 아직 기회가 있어.”

이젠 내가 대표에게 반대로 제안하는 입장이 되었다.

걸그룹은 보이그룹보다 독립한 선례가 훨씬 적고. 선례를 직접 만들어야 한다면 난도는 더욱 높아진다.

무너진 신뢰를 완전히 회복하기는 어렵겠지만 개선의 여지를 보여주면 얼마든지 비즈니스 파트너의 역할은 맡을 수 있지 않을까.

‘모노크롬이 탈뉴마를 노리는 데는 배우팀 위주로 돌아가는 회사 구조도 영향이 있었고.’

뉴마와 다르게 뉴레인은 애초에 아이리스를 데리고 만든 레이블이니까 정신만 차리면 기회는 있다.

조직이라는 게 한 번에 확 바뀌는 건 아니라지만, 뉴레인은 대표의 의사가 절대적인 회사잖아? 대표는 회사를 꼭 키워야 하고.

지금은 급하게 퀘스트를 끝내려고 무리수를 두고 있지만 결국 정석적인 방법이 좋다는 것을 깨달으면 쉽게 바뀔 수도 있다.

“갑자기 아이리스 일에 끼어든다 싶더니. 그걸 알려주려고 그런 거야?”

“아이리스한테 위약금을 받았는데도 결국 목표치를 못 채우면 그다음은 어떻게 할 건데? 신인이 클 때까지 기다릴 거야? 아이리스를 데리고 있는 게 너한테도 좋을걸.”

대표와 대화를 하면서 아이리스 퀘스트의 보상이 ‘아이리스의 유지’인 것이 더욱 잘 이해되었다.

아이리스 멤버들에게 안정을 주는 것 외에도 대표에게 아이리스가 쓸모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던 거야.

“뭐, 오늘은 말해주러 온 거니까 바로 대답하라고 하진 않을게. 네가 이번에 아이리스 싱글 제작을 맡는댔지. 네 선택으로 아이리스가 어떻게 될지 그동안 생각해 봐.”

내가 아이리스를 키워야 할 이유를 열심히 설파했건만 대표는 귀담아듣지 않았는지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이리스를 인질 삼는 것도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이리스는 자기 아래에 있다 이거지.’

그렇다면, 나도 남겨둔 수가 있었다.

“내가 잘못되면 어쩔 건데?”

“뭐?”

“신주인이 잘못되어버리면 넌 어떻게 되는 건데?”

대표가 아이리스를 인질 삼는다면 나는 나를 인질로 삼는다.

대표가 원하는 신주인이란 신분은 지금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이런 생각은 안 해봤는지 당황하는 게 보였다.

“내가 퀘스트가 끝나기 전에 범죄를 저지르거나 돈을 횡령했다고 쳐. 네가 신주인이 돼서 나머지 감옥살이 할 거야?”

“야! 집도, 옷도 내 걸 받아가서 편하게 생활해 놓고 그런 소리를……. 아니, 잠깐.”

대표는 황당하단 얼굴로 말하던 도중에 뭔가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은 것처럼 잠시 멈췄다.

그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너 돈 썼어?”

“무슨 돈?”

방금은 예시였지, 아직 범죄를 저지르거나 횡령하진 않았는데. 회삿돈도 적법한 절차에 따라 썼고…….

그런데 대표는 내가 회삿돈을 맘대로 썼는지를 물어본 게 아니었다.

“신주인한테 원래 있던 돈 말이야.”

“아.”

그러고 보니 월급을 받기 전부터 신주인의 이름으로 된 재산이 있었다.

집이나 비서처럼 시스템이 안배해 준 거라 생각하고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게임이 준 게 아니었어?”

“내가 나중에 쓰려고 모아둔 건데!”

아, 내가 대표의 사재를 까먹고 있었구나.

자신이 신주인이 될 것을 생각해서 미리 재산을 옮겨둔 모양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통장에 구멍이 난 걸 알게 된 대표는 방금까지와 다르게 매우 동요했다.

‘나는 사이버머니처럼 느껴져서 마구 썼는데, 여기서 계속 살아가기로 한 대표한테는 소중한 돈이구나.’

하긴 나도 내가 회사에 다니며 힘들게 저축해둔 돈을 누가 야금야금 까먹고 있으면 엄청 황당할 것 같아. 그걸 막을 수도 없다면 허망하겠지.

내가 내일이 없는 것처럼 대책 없이 살수록 대표에게는 타격이 간다.

의도치 않게 대표의 새 약점을 찾아 버렸다.

“잘 생각해 봐야 할 건 이제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네.”

나는 대표가 내 앞에서 거만하게 굴던 것을 갚아주기라도 하듯이 팔짱을 끼고 당당하게 말했다.

***

대표의 약점을 잡아 판도는 조금 바뀌었지만, 서로의 약점을 잡은 상태에서는 누가 특히 유리하거나 불리할 것이 없었다.

그래도 동등한 입장에서 협상해 볼 여지는 생겨났지.

대표는 길게 대화해봤자 더 얻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근검절약하고 살라는 어르신의 말씀 같은 것을 남기고 떠났다.

뉘앙스는 좀 거칠었지만 돈을 작작 쓰라는 말뜻만큼은 확실했다.

‘베풀면서 사는 삶도 좋지 않을까.’

한 번 사는 인생 즐겁게 살자는 말도 있잖아.

신주인의 재산으로 남지 않는 형태로 돈을 지출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올랐다.

아니지. 반대로 돈이 남아 있다는 걸 보여줘야 재산을 인질로 삼기 좋으려나.

앞으로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고민하며 나는 다음 날을 맞이했다.

“어제 대표가 나한테 찾아왔어.”

출근길에 이런 소리를 꺼냈다간 최 비서가 핸들을 잡은 손을 삐끗할까 봐 나는 회사에 도착한 후에 이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대표에 관한 일로 상담할 수 있는 상대는 최 비서가 유일했다.

그는 얼마 전에 대표의 모습을 확인해서인지 내 이야기를 듣고도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별일 없으셨던 겁니까?”

“응. 집에 먼저 와 있어서 놀라긴 했지만. 최 비서를 부를까 했는데, 우선 대화를 해 봐야겠더라고.”

대표에 관한 일은 뭐든 쉽게 납득하는 최 비서는 내가 대표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보다는 다른 게 더 신경 쓰였는지 내게 물었다.

“대표님이 직접 집으로 찾아오셨다고요.”

“응. 거기가 대표 집이었다며?”

“그렇습니다만…….”

나는 최 비서를 작년에 처음 봤지만, 최 비서는 내 집과 회사를 더 오래 오갔을 것이다. 대표를 데리고 다니느라.

내가 모르던 시절에도 이어졌을 그의 노고를 상상하고 있는데, 최 비서는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더니 입을 열었다.

“비밀번호는…… 바꾸셨습니까?”

“응?”

“대표님이 집에 와 계셨다는 건 비밀번호를 알고 계신다는 거니까요. 그러면 얼마든 바꿀 가능성도…….”

“…….”

대표가 또 집 안에 들어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했지.

그런데 대표와 연락할 수단이 없는 지금, 대표와 만날 방법은 대표가 날 찾아오는 것뿐이니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집 안에 귀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자체가 대표의 약점인데 날 해하려 하진 않을 테고.

그런데 내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비밀번호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에이, 설마.’

내가 집에 들어가지 못하게 해서 뭐 하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서 비웃으려고?

남의 집에 불법 침입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살던 내 집이니까 들어가고자 한다면 아예 잠금장치를 바꾸고 들어갈 수도 있는데.

‘지금 서로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기인데 설마 그런 유치한 짓을 하려고…….’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유치한 짓을 했다.

신 대표는 그런 짓을 하는 애였다.

도어락은 연신 삑삑 소리를 내며 비밀번호가 틀렸음을 알려댔다. 문고리를 돌려 당겨 봐도 철컥철컥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아, 진짜 짜증 나네!”

별로 타격은 없지만 귀찮고 스트레스만 주는 괴롭힘이라니.

대표는 대표로 지내오면서 사람이 비뚤어져 버린 건가? 아니면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이라 신 대표도 내 성향을 이어받은 건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수리기사를 부를 생각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가, 다른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걸 이용해서 내가 반대로 대표를 괴롭히면?’

대표가 또 이런 짓을 하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한테는…… 대표가 가지려고 했던 재산이 있잖아?

열리지 않는 문은 깔끔하게 포기하고 호기로운 마음으로 다시 아래로 내려왔는데, 날 퇴근시켜준 최 비서의 차가 주차장에 그대로 있었다.

“아직 안 갔어?”

“다시 내려오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최 비서 말이 맞았어. 비밀번호를 바꿔 놨더라고.”

이 정도면 나보다 대표를 더 잘 아는 거 아닐까.

“수리기사를 부를까요?”

“아니.”

그럴 거면 내가 부르고 복도에서 기다렸지.

내가 다시 밖으로 나온 것은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비싸 보이는 호텔로 가서 며칠 묵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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