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1화
“갑자기 이런 주제는 왜 나온 거야?”
“준해가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해서요.”
준해 성장 많이 했지. 내가 괜히 그를 성장캐라 부르겠는가.
최근에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역시 댄스였다.
그리고 섹시 컨셉이라면 댄스가 가장 중요하고.
“미로 단원 형님들이 그 얘기를 듣더니, 그럼 솔로곡 댄스를 섹시 컨셉으로 짜는 거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잠시 대화가 불타올랐어요.”
이번 스페셜 앨범에 수록할 멤버들의 솔로곡은 그냥 수록곡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활동 후에 이어질 콘서트에서 무대를 선보일 예정이다.
그래서 솔로곡 이야기를 하다가 안무 얘기까지 나온 모양이었다.
그런데 준해는 능력의 성장을 말한 것이지, 관념적 어른으로의 성장을 말한 건 아닐 것 같은데.
“그래서 이사님은 어느 쪽이신가요?”
“흐음…….”
모노크롬이 단체로 섹시 컨셉 무대를 한다면 멤버들의 시너지가 있기 때문에 준해가 그 사이에 있어도 자연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섹시 컨셉으로 솔로 무대를 펼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느낌이 매우 다르다.
‘컬러즈도 강아지, 아니, 아기 늑대가 갑자기 섹시해지면 당황하지 않을까? 이 유교 사회에서…….’
아니지, 그래도 준해가 지금 스물넷인데.
이제는 학생도 아니고 완전한 사회인이다. 나이를 생각하면 못 할 것도 없지.
하지만 역시 막내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갈팡질팡하는 마음으로 한이의 스마트폰 화면을 다시 보니, 나처럼 잘 모르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준해는 뭐라는데?”
“성장하는 거랑 성숙한 거랑은 다르다고, 자기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거라고요.”
똑똑이다운 깔끔한 정리였다.
그렇다면 준해는 아직 섹시 컨셉은 생각이 없다는 건데.
“……그럼 이 앙케트는 왜 하고 있는 거야?”
“재밌잖아요.”
“으음. 흥미로운 주제긴 해…….”
나도 듣자마자 ‘어?’ 하고 바로 정신을 빼앗겼으니.
컬러즈에게 이 주제를 던져보면 삼 일 밤낮 진지한 토론이 펼쳐질지도 모르겠다.
“여기 ‘완전 찬성’ 한 표는 누구야?”
“저요. 한번 보고 싶지 않아요?”
한이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준해도 딱히 생각이 없었다면…… 그냥 한이가 본인이 보고 싶다고 앙케트라는 명목으로 의견을 구하고 다닌 거였잖아.
“강경 반대는?”
“해랑이 형이요.”
연찬 때문인지 준해를 더욱 친동생 아끼듯이 대하던 해랑이라면 이해가 가는 대답이었다.
다들 각자의 막내 캐해석이 확실하군.
이런 소소한 투표 결과에도 멤버들 성격이 반영되어 있었다.
“섹시 컨셉을 할 거라면 막내보다 형들 쪽이 먼저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장유유서가 있으니까요?”
“섹시에 장유유서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그게 흐름상 자연스러울 것 같아.”
형들도 하고 동생도 하면 자연스러운데, 준해가 먼저 하면 ‘막내가 섹시 컨셉을 한다!’라는 사실에 퍼포먼스가 묻힐 것 같단 말이지.
신선한 충격도 좋지만 뭔가 보여줄 땐 확실히 보여주고 싶다.
“그럼 두목님 의견은 우형이 형부터 해야 한다는 건가요?”
“……그게 그렇게 되나?”
섹시 컨셉을 한다면 형 라인이 더 잘 떠오르기는 해.
우형은 눈매 때문인지 컬러즈에게 ‘무대 위의 모습이 섹시하다’라는 평을 받고 있었고, 해랑은…… ‘뭔들’이란 말을 달고 다녔다.
형 라인과 동생 라인의 중간에 껴 있지만 따지자면 생일이 빨라서 형 라인에 가까운 한이도 잘 어울릴 것 같고.
내가 굳이 부정하지 않자 한이는 혼자 정리를 끝냈는지 스마트폰에 메모를 추가했다.
“그건 또 다른 앙케트 답변으로 적어둘게요.”
“그래.”
맥 빠지게 만드는 그의 대화법 덕분에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다만 대화가 한차례 마무리되니 다시 죄책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좀 뜬금없는 질문인데 예전부터 하고 싶은 게 있었어? 가수나 모노크롬으로서.”
전부터 가수로서 뭔가를 이루고 싶다고 했던 한이니까 퀘스트가 발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특히나 한이는 내게 음악대상 수상을 좋은 목표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
‘그때는 내 대상 목표를 듣고 나서 생각해 봤다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지만…….’
퀘스트가 발생했을 그 시각에 대상을 받은 사람이 바로 라솔이었다.
한이는 라솔의 팬이라고 했으니 음악대상을 시청하고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혹시 한이의 소원이 아니었을까 궁금해졌다.
“하고 싶은 거라면 지금 하고 있는데요?”
“지금?”
“그냥 큰 걱정 없이 앨범 준비하고 노래하고 그런 거요.”
하고 싶은 게 안정된 아이돌 활동이라…….
‘어떻게 보면 그게 음악대상 수상과 연결된 것도 같고.’
한이가 예전에 말했던 것처럼 대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얻으면 남들에게 인정받게 될 테니까. 그러면 더 활동을 이어나가기 쉬울 테고.
그룹이 불안정한 상황에서는 ‘대상을 받고 싶다’라는 정확한 소원보다는 안정된 활동을 바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 정도의 소원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멤버 모두가 가지고 있지 않으려나.
‘그러면 퀘스트는 멤버 중 누구 한 명의 소원이라기보다는 모노크롬 전원이 바라는 게 복합적으로 적용된 건가?’
그런데 모노크롬 전원의 소원이라면 좀 복잡해진다. 당시엔 재민이 아니라 윤환이 모노크롬 멤버였으니까.
게다가 아이리스의 퀘스트는 모두를 위한 소원이더라도 가장 절실하게 원한 멤버가 한 명씩은 있는 듯했다.
퀘스트가 발생할 정도의 강력한 소원을 빌었다면, 그만큼 비참한 마음이었을 것 같아 신경 쓰여서 물어본 건데.
‘누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는지 가려내는 게 중요하지는 않지…….’
죄책감은 내가 감내해야 하는 거고, 중요한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
적어도 앞으로는 멤버들이 퀘스트를 발생시킬 정도로 마음에 뭔가를 쌓아두는 일은 없기를 바랐다.
“그럼 앞으로 더 하고 싶은 거 있어?”
“저요? 지금 바로 우형이 형한테 가서 두목님의 의견을 전하는 거요.”
“아니, 내 이름을 대고 섹시 컨셉을 강요하지는 마.”
그냥 한이의 물음에 답해줬을 뿐인데 섹시 컨셉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잖아.
장난 모드인 한이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이런 대답만 돌아올 듯해서 나는 그를 다시 연습실로 돌려보냈다.
***
퀘스트가 모노크롬의 소원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또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럼 내 소원은 어떻게 된 거야?’
소원 내용에 비해서 결과가 너무 극단적이라 좀 이상하다 싶긴 했어.
생일날 빌었던 대표의 소원은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
대표를 알던 최 비서의 존재만 제외한다면 정말 정직하게 소원이 이뤄졌다.
그런데 나는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지난 5년과 다르게 앞으로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소원을 빌었지.
‘이게 행복해진…… 건가?’
백수처럼 집에 틀어박혀 있을 적보다야 나아진 것 같긴 한데.
실은 대표처럼 나도 이전의 현실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걸리는 건 또 있었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인의 행복도 같이 빌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유일하게 이해해주던 엄마도 행복해지길 바랐지.
만일 이게 내 소원이 같이 이뤄지는 과정이라면…….
‘엄마에게는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한때는 엄마도 버리고 도망치고 싶어 했던 불효녀는 차라리 없는 게…….’
이 생각조차 너무나도 불효 같아서 나는 생각을 하다 말았다.
연락이 안 되는 현재 상황이 다시 떠올라 침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해랑이가 재민이 기타 치는 걸 구경하던 게 이해가 가.’
나는 지금 사내 복지 겸 민형, 윤희와 함께 모노크롬과 직원들에게 음료를 돌린 김에 연습실에 잠시 앉아 같이 휴식 중이었다.
내가 이곳에서 이룬 모든 성과는 모노크롬이 증명한다.
행복한 강아지들처럼 뛰노는 멤버들을 보면 확실히 마음이 편해졌다.
내 소원의 ‘행복해졌으면 하는 주변인’에 모노크롬이 포함되는 것이라면 어느 정도는 이뤄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퀘스트를 비롯한 소원을 들어줄수록 내 마음이 편해지는 것만큼은 확실해.’
힐링 영상을 보듯이 멤버들을 구경하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재민과 눈이 마주쳤다.
“뭐 필요한 거 있어?”
“신종 퀴즈예요?”
“퀴즈?”
“눈 마주칠 때마다 계속 물어보시길래 정답 맞힐 때까지 물어보시나 했어요.”
퀘스트의 정체를 알게 된 후로 멤버들에게 자잘한 소원이라도 없을지 자주 물어보긴 했었다.
그래도 마시고 싶은 게 있냐, 먹고 싶은 게 있냐 등등 배리에이션을 바꾸면서 물었는데 내 노력이 허무하게도 다 똑같이 들린 모양이었다.
“혹시 제가 예전에 얘기 들어주신 게 좋았다고 말씀드린 것 때문에…….”
옆에서 우형까지 헛다리를 짚고 나섰다. 자신이 내게 눈치를 준 게 아니냐면서.
우형이 했던 말이 떠올라서 죄책감이 조금 더 들긴 했지만…….
“아냐. 그냥 들어주고 싶어서 그래. 이게 내 취미야.”
이렇게 말하자 한이가 내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역시 주인님. 소원 들어주시는 것도 채워야 하는 할당량이 있나요?”
“……할당량 채워야 해서 물어본 거 아니야.”
그가 말하는 ‘주인님’이란 ‘토템’과 같은 의미였다.
내가 황당해하자 준해가 옆에 있던 해랑을 보며 물었다.
“할당치가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형도 부적이잖아.”
이미 해랑은 2대 토템으로 정착한 모양이었다.
모노크롬이 자립하기 전에 많은 역할을 맡길 생각이었는데 착실히 토템 후계자까지 생겨나서 다행이었다.
“그럼 주인 님 소원은 누가 들어줘요?”
“글쎄…… 내가?”
게임 시스템은 아무것도 안 해주는데 보상을 얻기 위해 내가 직접 발로 뛰고 있으니까 내가 직접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멋있다.”
가장 타당한 답변을 꺼냈는데 재민은 다른 쪽으로 해석했는지 눈을 반짝였다.
“우리도 주인 님을 본받아서 스스로 토템이 되는 거야!”
“그래! 소원은 비는 게 아니야. 이루는 거지.”
준해까지 분위기에 편승해 명언을 내뱉으며 의기투합하기 시작했다.
소원을 최대한 들어주고 싶어서 말을 꺼낸 건데 나한테 소원을 말하지 말고 직접 이루자는 결론을 내면 어떡하지.
‘얼마 전에 아이리스 멤버들한테도 뭐든 말하라고 했었는데.’
의도치 않게 자기 계발을 하는 멤버들을 보며 무작정 소원을 말하라고 하는 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
뉴마와 뉴레인을 오가며 두 그룹의 음반 제작 상황을 동시에 확인하는 것도 이제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모노크롬 컴백을 위한 회의를 마치고 바로 뉴레인으로 향하기 위해 가져갈 것들을 정리하려는데.
클리어 파일의 표면이 미끄러운 탓인지 위에 있던 파일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앗! 이거 떨어졌…….”
반사적으로 우형이 대신 주워준 것은 온갖 레퍼런스가 담긴 파일이었다.
파일을 집어 든 우형은 투명한 클리어 파일 속 내용을 확인했는지 움직임이 멈춰 버렸다.
하필이면 그가 본 것은 음산한 폐건물 사진이 잔뜩 모인 파일이었다.
“저, 전에 바라는 게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셨던 거…… 지금 말씀드려도 될까요……?”
우형이 내게 파일을 돌려주며 흔들리는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당황하면 무슨 생각 하는지 표정에 다 드러난다니까.
나는 바로 고개를 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이건 너희한테 뭐 시키려고 모아둔 거 아니야. 뉴레인에 가져가려고.”
“아아.”
우형은 내 대답에 바로 표정을 풀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곧 여름이라 혹시나 납량이라며 담력 테스트라도 할까 봐 걱정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모노크롬이 아니라 아이리스를 위해 모아둔 자료들이었다.
‘왜냐하면 너희의 공포 특집으로는 다른 게 준비되어 있거든.’
미리 알면 재미없으니까 굳이 입 밖으로 꺼내 말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