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이 강제 힐링 기획은 우형의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했다.
[요즘 해랑이가 자주 재민이 기타 치는 거 구경하면서 멍 때리잖아요. 그러니까 아예 그런 자리를 마련하면 어떨까요?]
[해랑이 생일 선물로 재민이 기타 공연을……?]
[아뇨. 기타 연주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정도로 마음 편한 자리를 만들자는 거죠.]
생일 컨텐츠는 생일 당사자가 좋아할 만한 기획을 해야 하는 법.
그런 의미에서 힐링을 주제로 잡은 것은 아주 좋은 방향이었다.
‘맞아. 해랑이 특기가 ‘둥지 틀기’라고 그랬지.’
대기실 등, 숙소가 아닌 곳에서 해랑이 쉴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두고 그렇게 불렀다.
최근 동생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을 그에게는 가장 좋은 선물이 되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해진 ‘힐링’이란 주제는 우리의 기획 회의를 거친 후 치열한 힐링 게임으로 발전되었다.
이른바 ‘극상의 힐링을 찾아보자’ 게임.
그 촬영을 위해 멤버들은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모였다.
“잘 잤어? 해랑이는 어제 늦게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우형이 형이랑 해랑이 형 어젯밤에 잠도 안 자고 맥주 마셨어요.”
멤버들의 컨디션을 묻자마자 준해가 두 사람을 가리키며 일렀다.
“저한테는 개인기를 시키고…….”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을 봐선 그게 더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웬 맥주를?”
“사실 어제 얘기를 좀 하다가…….”
우형이 변명하듯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해랑과 눈을 마주쳤다.
촬영 준비 중이라 길게 대화할 시간은 없었지만 해랑은 어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얘기해 줬다.
연찬이 결국 해랑에게 선을 넘은 행동을 했고, 해랑은 동생에게 휘둘리기를 그만뒀다고.
이렇게 별일 아니라는 듯이 할 이야기가 아닐 텐데. 해랑의 표정은 그저 무덤덤했다.
‘지쳤던 만큼 빨리 마음을 놓아버린 건가…….’
미련으로 붙잡고 있던 일은 놓기가 힘들지, 놓은 후에는 의외로 깔끔하게 털어버리는 경우가 있었다. 해랑이 지금 그 상태인 듯했다.
“협조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죄송해요. 하마터면 문제가 일어날 뻔해서.”
“아냐. 뭔가 예감이 안 좋으면 피하란 소리였지, 완전히 무시하라는 얘기는 아니었으니까.”
모노크롬을 <뉴 스타 이펙트>에 내보내기로 한 것은 회사 문제 때문이었지만, 해랑의 가정사도 영향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해랑의 일은 이상하게 조기 종결이 되어버렸다.
‘이렇게 덤덤하게 얘기해도 속으로는 심란하겠지?’
그야말로 극상의 힐링이 필요한 날. 마침 오늘이 생일 컨텐츠 촬영일이라 잘됐다.
생일이니까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거야!
“오늘 기획이 기획이니까, 잠을 푹 잔 게 아니라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다.”
피곤한 상태에서 맛보는 힐링이 더 달콤한 법이지.
너무 편안해지는 바람에 잠드는 것도 힐링 게임의 목표로는 훌륭했다.
“숙취 있는 건 아니지?”
“숙취 생길 정도로 마시진 않았어요……. 딱 한 캔씩?”
민망하게 웃으며 대답한 우형은 뒤늦게 캔맥주의 주인이 “뭘 마셔?” 하며 나타나자 고개를 돌려 버렸다.
***
극상의 힐링 게임. 이는 준비된 아이템들을 사용하여 해랑을 가장 평온한 상태로 만드는 멤버가 이기는 게임이었다.
채점자는 당연히 해랑. 다만 주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니고, 해랑의 심박수를 가장 낮게 떨어트리는 사람이 이 게임의 승자가 된다.
“심박수를 0까지 떨어트리면요?”
“……체포되겠지?”
“아하.”
재민이 별생각 없이 질문하자 해랑이 무슨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심박수를 0으로 만들겠다는 것은 죽이겠다는 소리와 다름없었다.
그렇게 되면 오늘 촬영본은 미튜브가 아니라 수사 기관에 넘겨야겠지.
게임에 심취한 나머지 간단한 과학적 사실을 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승자한테는 생일인 제가 준비한 선물이 있습니다.”
“형 생일인데 우리한테 선물을 줘?”
“좋은 날인데 베풀 줄 알아야지.”
-라는 취지로 기획 회의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베풀어야 한다는 해랑의 말에 준해와 재민은 이미 생일이 지난 우형과 한이를 쳐다봤다. 두 사람도 뭔가 줘야 하는 게 아니냐는 눈빛이었다.
“내 생일엔 맛있는 거 많이 먹었잖아.”
“오케이. 한이 형은 통과.”
“나는…… 사인해 줬잖아.”
우형의 생일 기념 영상은 팬 사인회 컨셉이었다.
한이에 이어 우형이 소심하게 대답하자 준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우형은 그 시선을 외면하며 해랑에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선물이 뭔데?”
“비밀이야.”
“형 얼마 전에 헤드셋 새것 샀던데.”
한이를 시작으로 멤버들이 상품으로 해랑의 개인 물품을 탐내던 것도 잠시.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게임에 돌입했다.
“여기 있는 아이템들은 멤버들의 아이디어를 반영해서 준비됐대요.”
“와. 잠 안 들면 가만 안 두겠다는 것 같아.”
준해가 정해진 멘트를 읽으며 설명하고, 멤버들은 세트장에 무슨 물건들이 준비되었는지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한이는 촬영장 한편에 설치된 안마 의자 옆으로 다가갔다.
“이 효도 선물 같은 건 누가 골라온 거야? 형이지?”
“그건 회사에서…….”
“아, 아하. 너무 좋다.”
멤버들의 아이디어를 반영했다고 했지, 아이디어 그대로 준비했다고는 하지 않았다.
한이는 ‘어르신 같다’라고 놀리고 싶었는지 우형을 지목했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바로 꼬리를 내렸다.
‘비싼 아이템은 생각도 안 하길래 내가 골라온 건데.’
효도 선물 같다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하다. 원래 어르신들 취향이 힐링의 정점이니까.
힐링을 받아야 하는 해랑을 제외하고, 멤버별로 주어진 시간은 10분씩.
멤버들이 10분을 어떻게 활용할지, 어떤 아이템을 사용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해랑은 안마 의자에 앉아 효도부터 받기로 했다.
“형, 자면 안 돼. 이따가 내 순서 때 자.”
“…….”
“벌써 자는 거 아니지?”
준해가 안마 의자를 대신 조작해주겠다며 다가가 은근슬쩍 청탁했으나 해랑은 답이 없었다.
그 옆에서 “악!” 하는 짧은 비명이 들리기에 뭘 하고 있나 봤더니 재민이 발 마사지기를 체험 중이었다.
‘여전히 호기심이 이기는 타입이라니까…….’
재민은 이전에 예능을 촬영할 때 발 마사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본인도 그때 고통스러워했던 걸 기억할 텐데 자신을 또 고통으로 밀어 넣다니. 도전 정신만큼은 칭찬해 줄 만했다.
주변에서 잠시 소란이 있었으나 우형은 눈을 감고 나른하게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거 집에 있으면 하루 종일 앉아 있고 싶겠다…….”
이 말은 내 머릿속 탕진 필터를 거쳐 ‘사 달라’로 치환되었다.
‘몬클 하우스 거실에는 리클라이너만 있던가? 흔들의자도 하나 둬야겠어.’
몬클 하우스를 정리할 날이 오면 숙소나 본가로 가져가라고 해야지.
내가 소비 계획을 스마트폰으로 메모하는 사이, 한이가 말없이 우형이 앉은 흔들의자를 크게 흔들고 지나갔다.
우형은 넘어진다고 생각했는지 “악!” 하고 자세를 고쳐 의자를 멈춰 세우고는 가슴께를 부여잡았다.
분명 힐링 기획이었는데 벌써 두 번째 비명이었다.
‘다들 힐링을 스릴로 바꾸는 재주가 있어.’
장르를 자유자재로 바꿀 줄 아는 훌륭한 예능 인재들이었다.
해랑이 손목에 심박수 체크 기기를 달고 세팅하는 동안 멤버들은 앞 순서가 좋은지, 뒤 순서가 좋은지 토론하다가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첫 순서로 배정된 한이가 준비한 것은…….
“바로 자장가입니다.”
“자장가 음원?”
“아니지. 내가 메인 보컬인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해랑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준해가 앞에서 심박수를 확인하는 스태프와 잠시 뭔가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지금 해랑 형 심박수가 오르고 있대요.”
“왜. 두근두근하나?”
“혈압이 오르는 게 아닐까?”
그 반응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한이와 달리, 해랑을 포함한 다른 멤버들은 준해의 해석에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바로 옆에서 부를 테니 굳이 마이크가 필요하지 않지만, 한이는 에코 효과를 넣을 수 있는 장난감 마이크를 들었다.
안락의자에 앉은 해랑을 가운데에 두고, 한이는 다른 의자를 가까이 끌어와 바로 옆에서 자장가를 불렀다.
해랑은 가까운 거리 탓에 귀가 간지러운지 머리를 털어내고는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이건 힐링인가요……?”
지금 와서 그런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다니.
사실 힐링에 대결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부터가 조금 모순적이었지.
극도로 힐링을 추구하다가는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고, 컨텐츠를 생각하면 재미를 따를 수밖에 없다.
‘힐링은 조금 실패해도 컨텐츠로서 재밌으면 반 정도는 성공한 거 아닐까?’
예능 레벨 투톱에서 한 단계 위로 올라선 한이는 그 점을 캐치했는지 접근 방향을 달리했다.
“(잠이 들면 꿈속에서 꽃과 풀들이~)”
자장가를 불러도 해랑이 잠들 기미가 없어 보이자 한이는 장난감 마이크의 설정을 에코에서 외계인 목소리로 전환했다.
나른하게 자장가를 듣고 있던 멤버들은 멜로디를 알 수 없이 이상해진 노랫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푸하. 이건 거의 기권하겠다는 거 아냐?”
“(저는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 건데요~?)”
“웃기니까 노래하듯이 말하지 마.”
우형은 헬륨가스를 마신 듯한 목소리와 이상한 바이브레이션의 조합이 웃음 취향을 저격했는지 집중하여 한이의 무대를 관람했다.
이내 재민이 자기도 하고 싶다며 의욕을 보이는 바람에 자장가는 결국 듀엣이 되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노래방이 됐어.’
웃고 즐기는 것도 힐링은 힐링이지……?
즐기는 자는 이길 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지만, 카메라 뒤 심박수 체크 화면을 보니 아무래도 한이의 우승은 물 건너간 듯했다.
***
다음 순서인 우형은 안정 효과가 있다는 라벤더 아로마 향초를 켜 놓고 시집을 읽으며 ASMR 시간을 가졌다.
해랑은 의자가 편한지 잘 앉아 있었으나 다른 멤버들은 급속히 집중력을 잃고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으억!”
“그치? 아프다니까.”
“쉿. 우형이 형이 째려본다.”
방금 재민이 체험하던 발 마사지기를 체험한 한이가 이상한 소리를 내자 우형은 뒤를 돌아 그들에게 눈치를 줬다.
동생들을 조용히 만든 우형은 다시 해랑을 바라봤다.
“마음이 편안해지지 않아?”
“글쎄…….”
우형이 해랑에게 힐링을 억지로 주입하는 동안, 동생 세 사람은 저들끼리 ‘소리 내지 않고 발 마사지를 참아내기’ 미니 게임을 시작했다.
그다음 순서인 재민은 특기인 저속 기타 라이브를 펼칠 줄 알았는데…….
“숨을 내쉬면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듭니다.”
재민은 원석이 달린 펜듈럼을 흔들며 해랑을 전생으로 인도했다.
몽롱한 배경음이 분위기를 그럴싸하게 만들었으나 비전문가인 재민은 한국인답게 성질이 급했다.
“형은 전생에 양반집 아들이었을 거야.”
“전생 체험을 원래 그렇게 하나?”
주입식 힐링에 이어서 주입식 전생.
최면이라는 오컬트 방식에도 협조적이었던 해랑은 결국 황당함에 눈을 떴다.
아마 최면은 페이크였고 맥을 빠지게 만들어서 심박수도 같이 떨어트리는 게 원래 목적이 아니었을까.
“해랑 형이 아니라 여우 형이 자는데요?”
그 말에 뒤를 보니, 우형은 마음에 들어 했던 흔들의자에 앉아 자신만의 힐링을 즐기고 있었다.
시선이 모여든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는지 잠들지 않은 척 바로 눈을 뜨고 포즈를 바꿨지만.
뒤늦게 졸음이 몰려온 듯한 우형을 포함해서 모두를 잠에 빠트리게 만든 것은 준해가 준비해 온 다큐멘터리였다.
성우가 나긋한 목소리로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과학 용어를 설명하자 멤버들은 각자 의자나 빈백에 기대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오히려 이쪽이 최면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나도 위험해질 뻔했다.’
역시 가장 최근까지 강의를 듣던 애라 어떤 목소리 톤이 졸음을 유발하는지 확실히 아는 건가.
스태프들의 분위기도 같이 나른해지고, 나도 침침해진 눈가를 꾹 눌러 잠을 쫓았다.
모든 순서가 지나고 기록된 심박수로 순위를 정하는 짧은 시간 동안, 멤버들은 다시 가운데로 모여 상품 공개 시간을 가졌다.
해랑은 스태프에게 고급스러운 봉투 하나를 받아 멤버들에게 보여줬다.
“이게 처음에 말한 그 상품인데.”
“뭐야? 상품권?”
기대 어린 시선 속, 해랑이 봉투에서 꺼낸 것은…… 바로 백해랑 포토카드였다.
‘그것도 무려 포카!’
도한을 주축으로 한 일부 아이돌 후배들 사이에서 부적으로 통하는 전설의 포토카드.
내가 상품을 이것으로 하겠다고 하자 해랑은 “이게 상품이 될까요?”라고 의구심을 품었다.
하지만 늦덕 컬러즈들은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 없는 레어템이라고. 가치라면 충분했다.
“그리고 오늘 힐링 게임의 우승자는…… 현준해!”
“와, 와아…….”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
해랑에게 포토카드가 든 봉투를 선물 받은 준해는 리액션을 겨우 쥐어 짜냈다.
상품을 보고 다들 미련이 없어졌는지 멤버들은 우승자보다 더 신나서는 한마음 한뜻으로 축하를 보냈다.
촬영 종료 후, 거의 24시간 붙어 있는 동료의 얼굴이 박힌 포토카드를 어떻게 보관할지 고민하는 준해에게 재민이 해법을 제시했다.
“이거 장식장에 넣자.”
“미니크롬 옆에?”
“응.”
미니크롬이 트로피 소환 의식을 벌이고 있는 숙소의 장식장을 말하는 것이었다.
“숙소에 제단을 만들고 있는 거야……?”
“네. 그럼 더 큰 상을 불러낼 수 있지 않을까요?”
대상을 오컬트적인 힘으로 소환해내려는 걸까.
이상한 소리였지만 말하는 주체가 재민이어서인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