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우형이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하더니 테이블로 시선을 내렸다.
“아……. 그렇, 당연히, 그게, 이사님이신데, 역시 저희가…….”
뭐라고 잘 말하고 넘어가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되는지 우형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단어의 나열에 가까웠다.
“그, 그렇죠. 저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너무 무리한 말을-.”
“아, 아니. 우형아. 잠깐만.”
갑자기 그렇게 바닥을 파고들어갈 건 없잖아.
우형의 자신감도 많이 회복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만났을 적 우형의 모습이 오버랩 되어서 서둘러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한 치 앞길을 모르는 건 모노크롬이 아니라 나였다.
“내 말은, 너희랑 같이 일하기 싫다거나 이사직이 더 좋다는 게 아니라. 회사에 억지로 붙어 있어야 할 상황이라는 게 있잖아?”
“……이사님은 원해서 회사에 들어오신 게 아니에요?”
“으음, 자의로 들어오진 않았지.”
“그럼 저희를 맡은 것도…….”
아니, 아냐. 모노크롬을 맡을 사람이 없어서 나한테 떠민 게 아니라…… 맞나?
아무튼 퀘스트는 퀘스트고, 지금은 나도 모노크롬이 잘되었으면 해서 열심히 일하는 거니까.
“아냐, 형식은 좀 다르지만 엔터 일에 원래 관심이 있었고 지금 하는 일도 만족도 높아. 그런데 나는 여기 취업해서 들어온 게 아니라 대표님 혈연으로 들어왔잖아? 내가 이 회사를 나가려면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이사님도 이 회사는 좋지 않다고 하셔서 저는 당연히 같이 나가시는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듣고 보니 ‘너희는 회사를 나가. 난 안 나갈 테니.’라고 말한 상황이었다.
자꾸 변명하려니 ‘이사직과 월급이 아까우니 눌러앉고 싶다’는 말을 빙빙 돌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같이 나가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고, 어느 정도는 솔직히 말해야 오해가 없으려나.
“너희랑 같이 일하고 싶지 않은 건 절대 아니야. 좀 복잡한 사정이 있는데 내가 여기서 뭔가를 해내야만 하거든.”
“그게 음악대상……인가요?”
내가 새해에 말했던 소원을 ‘복권에 당첨되어서 건물주가 되겠다.’ 정도의 큰 의미 없는 소원이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을 텐데.
멤버들은 다들 내 음악대상 목표를 진지하게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내 목표 중 하나긴 한데.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갈 방법을 찾는다고 해야 하나.”
요즘은 음악대상 외에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없을까 고민해 보기도 했다.
게임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대표를 만나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하던 참이었다.
대표와 연관되어 있는 최 비서가 비협조적이라 막막한 상황이긴 하지만.
“돌아갈 방법…….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시게요?”
“으응.”
“가서 안 오시는 거예요?”
“글쎄. 그 이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내가 생각한 미래는 딱 퀘스트 종료 시기에서 끝나 있다. 그 이후를 상상해 봐도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 나중 일은 나중에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미래 계획이 하나도 안 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이겠지?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책임자라는 사람이 생각보다 무계획해서 실망하지 않았을까?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에 빠진 우형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우형은 뭔가 결심한 듯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럼 저희랑 일하는 게 싫으신 건 아닌 거죠…….”
“그렇다니까.”
“그런 거라면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음?”
“그때 저희가 스카우트하고 싶어서요. ……물론 이사님이 그럴 마음이 있으시다면……. 저희가 그때 더 자리 잡아야겠지만…….”
이건 내가 송 피디를 스카우트할 때 했던 말인데.
우형은 같은 말을 제법 호기롭게 뱉었다가 소심하게 마무리해 버렸다.
방금 나눈 대화가 가벼운 내용은 아니었는데, 이런 모습이 너무나 우형다워서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내가 이 회사 와서 가장 열심히 한 게 회삿돈 탕진하는 거거든. 같이 일하면 감당할 수 있겠어?”
이건 농담이었는데 우형의 눈동자가 또다시 흔들렸다.
독립을 생각하고는 있지만, 아직 아티스트 활동 외의 회사 업무에 면역이 없는 그에게는 어려운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어, 어, 얼마나…….”
“아냐. 농담이야. 벌써부터 금액 걱정 하지 마.”
농담이라고 하자 우형의 동공이 제자리를 찾았다.
뉴마를 벗어난 후에도 탕진을 계속하면 곤란하다는 사실은 알게 되었다.
‘그럼 나중에 멤버들이랑 같이 일하게 되면 난 무슨 일을 하지……?’
뉴마에서나 대표 딸이라고 막 나가지, 밖에서는 그냥 일반인일 뿐인데.
회사 내부 일도 내가 아니라 최 비서 같은 사람을 찾아서 시키는 게 나을 것이다.
다음 앨범 프로듀싱을 상당 부분 멤버들에게 맡기려 하는 것도 멤버들의 자립 연습을 위해서였고…….
그런 생각을 하다가 퀘스트 종료 후에 뭘 할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는 건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나중에 전부 잘 해결되고, 다시 만났을 때 내가 백수라면 그때 다시 얘기해 줄래?”
지금은 확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약속하지 않아도 괜찮다면 이 정도는 말해도 되지 않을까.
고맙게도 내 미래를 대신 생각해 준 우형은 아까보다 가벼워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주인 님은 같이 안 가신대?!”
우형이 오늘 주인과 상담한 것을 멤버들에게 알려주자 재민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뉴마 건물 안에서 탈뉴마를 계획하는 건 이상한 것 같아서, 회사에 있을 땐 다음 앨범을 준비하고 숙소에 와서 미래 계획을 세우는 게 멤버들의 일상이 되었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거의 24시간 붙어있기에 가능한 일과였다.
그리고 그 미래 계획에는 누구와 함께 소속을 옮길지 고민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뉴마에 모노크롬이 없다면, 매니지먼트팀은 괜찮더라도 프로듀스팀의 직원들은 전부 이직처를 알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 아티스트팀 형태를 최대한 바꾸지 않고 소속을 옮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멤버들에게, 주인이 함께하지 않는 것은 큰 변동사항이었다.
“일단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실 생각이래.”
“외국이면 잠깐이라도 얼마든지 다녀오실 수 있는 거 아니야?”
물론 업무가 바쁘긴 하지만 며칠 자리를 비운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었다.
비행기 표만 있으면 어느 나라든 오갈 수 있고 웬만한 나라에선 스마트폰만 있으면 연락이 가능하다.
논리적인 이야기였으나 주인이 그 점을 모를 리는 없었다.
“회사나 대표님이랑 약속이 되어 있는 게 아닐까? 뭔가 정해진 걸 해내기 전까지는 못 돌아간다는…….”
“진짜 그런 거면 너무하다.”
주인이 ‘복잡한 사정이 있다’라고만 말했기에 더 자세히 묻지는 못했지만, 우형은 대표와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재민은 그 말을 듣고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회사에서 심한 대우를 당한 적 있는 재민이 이렇게 말하니, 주인이 오기 전까지 뉴마가 어떤 회사였는지 멤버들은 새삼스레 떠올리게 되었다.
“대표님 가족인데 그런다고? 그럼 대표님이 직접 그러셨거나 알고 계셨겠네.”
그녀 앞에서 아버지에 대해 투덜거린 적이 있던 한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세상엔 남보다 못한 가족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설마 주변 사람이 그런 경우일 줄은 몰랐다.
이야기를 듣다가 뭔가 떠오른 해랑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전에 이사님이, 아버지랑 사이가 안 좋아서 오래 안 봤다고 하신 적 있는데.”
“그런데 부모님한테 잘하라고 말씀하신 적 있잖아. 그래서 나는 이사님은 가족끼리 사이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단 말야.”
가출 건으로 면담 시간을 만들어낸 적 있는 준해도 말을 얹었다.
그러고 보면 주인은 멤버들의 부모님을 굉장히 많이 신경 썼다.
해랑은 팬미팅 때 부모님이 오지 않았냐며 묻던 주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랑은 잘 지내셨던 게 아닐까.”
“아! 주인 님이 예전에 나한테도 옆에 가족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말한 적 있어. 그런데 원래 살던 곳으로 가시려는 거면, 거기 계신가?”
새해 첫날, 멤버들은 ‘주인은 왜 음악대상을 목표하는가.’라는 화제로 대화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상하게 그 퍼즐 조각이 맞춰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인 대표에 의한 강제적인 부임. 목표를 이룰 때까지 만나지 못하는 가족. 그리고 목표를 이루는 기한은 그녀가 모노크롬을 탈뉴마시키겠다는 올해 말까지.
퀘스트에 관해서는 모르지만 우연히도 그들의 추론은 사실에 가까워져 갔다.
***
“나한테 뭐 말할 거 있어?”
내가 뒤돌자 거리를 두고 서 있던 재민이 다가왔다.
마치 집에 들어온 외부인을 경계 반, 호기심 반으로 바라보는 고양이처럼 따라다니기에 모른 척하기가 어려웠다.
“주인 님, 미국에서 살다 왔어요?”
“웬 미국……?”
“예전에 길게 휴가 간다고 하셨잖아요. LA도 가고 싶다고 하셨고.”
한이가 자주 ‘바보야!’ 하면서 놀리곤 하지만 재민은 바보가 아니다.
기억력이 좋아서 몇 달 전에 사소하게 나눴던 대화 내용을 이렇게 나중에 꺼내 들 때가 있었다.
‘이건 정말 대화를 모면하려고 꺼냈던 이야기라 나도 거의 까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어제 우형에게 했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모양이다.
외국에서 왔다고 알려진 내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한다고.
그런데 정확히 어느 나라에서 살다 왔는지까지는 정해두지 않아서 평소엔 ‘대충 이곳저곳.’이라고 하며 얼버무려왔다.
지금 재민이 그 부분을 자세히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곤란한데…….
“그, 그게 왜 궁금한데?”
“미국이면 놀러 갈 수 있잖아요. 일하러 갈 수도 있고.”
내가 한국에 돌아오지 않을 경우를 생각하고 말하는 건가?
대답하기 어려운 화제라 말을 잘못하다가 꼬일까 봐 경계하고 있었는데 맥이 탁 풀렸다.
사람 좋아하는 재민은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할 때가 있었다.
“만일 너희가 못 오는 데라면?”
“연락도요?”
“응. 전파도 안 닿고.”
그런 오지에서 엔터 산업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며 관심을 가졌다는 해괴한 설정이 되어버리지만 그게 사실이다.
재민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주인 님 우주에서 오셨어요?”
“응?”
“비슷하잖아요. 주인 님, 우주인님…….”
……이건 농담하는 거야, 진심으로 말하는 거야?
천재와 몽상가를 오가는 그의 상상력은 지구 스케일을 간단히 뛰어넘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추론인데, 그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름대로 정확하다는 게 더 놀라운 점이었다.
게임 속 세계에 들어왔다는 건 비과학적인 이야기지만,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내가 원래 살던 곳과 이 세계는 평행우주라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었다.
“으응. 맞아. 우주는 넓으니까.”
“그럼 지구에는 다시 어떻게 오시는데요?”
“글쎄. 별똥별을 타고 오나……?”
대체 무슨 대화인지 모를 이야기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내뱉고 있는데 재민은 의외로 진지하게 들었다.
“너 원래 그렇게 우주나 공상 과학 같은 거에 관심이 많았어?”
“아뇨. 여우 형이랑 준해한테 말해주려고요. 컨셉 기획할 때.”
“타이틀 컨셉 후보 정해졌어?”
“우주요.”
갑자기 우주 이야기를 왜 하나 했더니.
키워드 목록을 길게 뽑아놓고 고민하던 멤버들은 그쪽으로 방향을 잡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시답잖은 이야기가 돌고 돌아 컴백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내가 살던 우주는 한국이랑 별다를 게 없어서 별로 도움은 안 되겠다.”
“그럼 향수병은 덜하겠네요.”
“그러게.”
이건 또 신선한 해석이었다. 그러게. 별다를 게 없어서 이렇게 빨리 적응하고 정을 붙일 수 있었던 건가.
아무튼 이전에 살던 곳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가볍게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러다가 언젠가는 내가 게임 플레이어였다는 것까지 말하게 되는 거 아냐?’
나조차 잘 이해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상황을 누군가는 이해해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처음 해 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