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4화
“웬 고자질?”
한이가 ‘두목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고, 왠지 장난스러운 느낌이기에 나도 가볍게 대답했다.
‘고자질은 뭐지. 멤버들이랑 소소한 일로 다퉜나?’
그런 생각부터 하다가 이곳이 초등학교가 아니란 것을 떠올리고 정신을 차렸다. 내가 멤버들을 너무 학생 보듯이 보고 있었나 봐.
시답잖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한이가 가져온 것은 생각보다 진지한 사안이었다.
“전에 누가 이상한 소리 하면 바로 말하라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지. 누가 이상한 소리 해?”
이야기가 길어질 듯하여 앉으라고 바로 손짓하자 한이가 안쪽으로 들어와 소파에 풀썩 앉았다.
“권 실장님이요.”
한이의 입에서 나오는 권 실장이라는 소리에 인상이 팩 찌푸려졌다.
“뭐라고 했는데?”
“제가 싫어하는 얘기를 그렇게 바로 꺼낼 줄은 몰랐네요. 뭐라고 할까 하다가 참았잖아요.”
한이가 싫어하는 얘기라.
최근 아버지와 천상식 때문에 아이돌을 무시하는 발언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었지.
“배우 활동에 집중하라는 식으로 말했구나?”
“네. 아이돌 하다가 배우로 전향한 사람들 생각하라면서. 저는 이제 자리 잡기 시작한 신인 배우라고요. 아이돌 활동도 한창인 건 안 보이나 봐요.”
권 실장의 대화 방식은 항상 그랬다.
가수보다는 배우가 낫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말하니까 아티스트팀 책임자인 나나 한이 입장에선 기분이 나쁠 수밖에.
한이를 회유하려고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하필이면 한이의 지뢰를 건드렸다는 건 본인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그럼 너 대본 들어온 건 그냥 넘기기로 한 거야?”
“지금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하나둘 잡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요. 일단 컴백 준비부터 하고 싶어요.”
사실, 배우 유한이에게는 지금이 배우 활동을 하기 가장 적합한 시기이다.
한이가 아이돌 활동을 우선하는 것은 나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의 선택지 하나를 일부러 뒤로 미뤄야 하는 상황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너도 배우 생활을 계속하긴 할 거잖아? 가수와 배우 활동 둘 다 지원해줄 수 있는 회사가 얼마 없는 것도 사실이라, 만약 뉴마를 나가면 이렇게 병행하기 어려울 수도 있거든. 네가 그런 점은 충분히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저 지금 이르러 온 건데 이사님이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되죠.”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나중에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도록 많이 생각해 보기를 바랐다.
그런 마음에 말했는데 한이가 약한 소리 말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고민하다가 고른 게 아니라 원래부터 제 우선순위는 이랬으니까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제가 지금 배우 활동에 집중하면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그럼 그렇지’라고 생각할 텐데 그러고 싶겠어요?”
“……응. 내가 말을 잘못했다. 누가 뭐라고 할 때 딱밤을 한 대 때리지 그랬어.”
“그건 좀…….”
한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아무튼 잘 말했어. 재계약 시기가 다가오면 그런 얘기를 더 자주 듣게 될지도 몰라. 염두에 두고 있어.”
“누가 또 그런 소리 하면 이번처럼 연기해서 넘어갈까요?”
“연기를 했어?”
“연기 배워두니까 좋더라고요.”
배우 출신이라는 권 실장을 연기로 속일 생각을 하다니, 역시 연기 레벨 9…….
이게 바로 생활 연기라는 걸까.
“그래. 탈뉴마는 최대한 숨기는 게 낫지.”
뉴마 내에서 재계약 얘기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전까지…….
‘회삿돈을 최대한 소비하자.’
머릿속의 탕진 계획 리스트를 훑고 있으니, 내 표정이 사악해 보였는지 “역시 두목님…….”이라며 중얼거리는 한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배우팀에서 그렇게 말해?”
“그래서 내가 할리우드 보내줄 거 아니면 꿈도 꾸지 말라고 그랬어.”
“…….”
“농담이야.”
진지한 표정으로 묻던 준해의 표정은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 얼굴을 본 한이는 곧바로 농담이라면서 숙소 거실 소파에 풀썩 앉았다.
부엌에 있던 우형이 이 이야기를 들었는지 바로 거실로 나와 한이 옆에 앉았다.
“그런데 진짜 대본 들어온 거 다 거절할 거야? 좀 더 고민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형은 무슨 두목님이랑 똑같은 소리를 하냐.”
“이사님도 그렇게 말씀하셔?”
“누가 이상한 소리 하면 딱밤 때리라고 하셨거든?”
한이가 주먹을 들어 보이자 우형은 옆으로 피했다.
그리고 숙소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멤버들을 거실로 불러 모았다.
“생각난 김에 말하는데, 우리도 한번 정확하게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을 것 같아. 우리 계약 기간 끝나면 어떻게 할지.”
다들 당연히 다 같이 가겠거니 생각하기만 했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은 없었다.
계약은 법적인 문제도 엮여있으므로 막연한 생각만으로는 부족했다.
“회사, 다 같이 나가는 거지?”
“조건이 많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해랑의 질문에 준해가 대답하고, 다들 같은 마음인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이 ‘뉴마는 그른 것 같다’라고 말하며 탈뉴마를 권장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2년 전, 지금과 구성원은 한 명 다르지만 첫 재계약을 생각할 때도 멤버들은 비슷한 마음이었다. 단지 그땐 뉴마 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었을 뿐.
그리고 지금은 기반도, 선택지도 생겼다.
“그리고 혹시, 다른 회사에서 제안이 들어오면 어쩔 거야?”
“여우 형 다른 회사에서 스카우트 들어왔어?!”
“아직 정확히는 모르는데…… 그런 기미로 말을 거는 데가 있어서.”
배우팀에서 한이에게 살갑게 대하며 자꾸 차기작을 들이미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형에게도 개인적으로 연락해 오는 회사들이 있다고 하니, 계약 만료 시기가 다가오는 것이 실감이 났는지 다들 진지해졌다.
“으와…… 그런 일이 있구나.”
준해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입을 뻐끔거리다가 이상한 감탄을 내뱉었다.
남 일 보는 듯한 말투에 우형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건 그냥 시작일 뿐이고, 너희도 생각해 봐야 할 일이야. 그룹을 유지해도 다양한 형태가 있잖아.”
리더로서 멤버들에게 콩깍지가 낀 게 아니다.
멤버들이 FA 시장에 나온다면 분명 연락해 오는 회사들이 있을 것이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의 모노크롬이라면.
그러니까 멤버들의 의사를 확실히 파악해 둘 필요가 있었다.
“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나는 그냥 지금이 재밌고 좋은데.”
해랑과 재민도 준해와 상황은 비슷했다. 지금 모노크롬의 형태에서 벗어난 다른 길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듯했다.
한이가 손뼉을 짝짝 치며 화제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결론 났네. 뭉치는 거로.”
“그리고…… 흩어지면 죽인다.”
“‘죽는다’가 아니고?”
재민과 준해는 ‘흩어지면 죽는다’의 ‘죽는다’가 자연사인지, 타살인지를 두고 이상한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금방 옆길로 새서 잡담 타임으로 넘어간 동생들을 보며 우형은 멍해졌다.
“이렇게 정한다고……?”
걱정 많은 우형의 성격을 아는 한이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돌리며 말했다.
“어차피 계약 기간 있잖아. 나중에 서로 보기 지긋지긋해지면 그때 다시 생각하든가. 지금은 그냥 이거면 됐어.”
이렇게 오래 함께 지내오면 성향이 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멤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우형은 결국 모노크롬식 결정에 바로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계약 종료 후, 그룹을 유지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첫 번째로는, 멤버들만의 소속사를 따로 만드는 방법.
이게 많은 아이돌 팬들이 가장 원하는 형태지만, 아티스트 활동 외에 다른 분야까지 직접 맡아야 하거나 적절한 담당자를 채용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믿을 만한 사람을 찾는 게 생각보다 상당히 어렵지.’
내가 윤희를 붙잡고, 송 피디를 스카우트하고, 민형을 데려온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믿을 만한 사람은 드무니까.
그리고 두 번째는 그룹 전체가 다른 기획사로 옮겨가는 것.
하지만 이건 선례가 너무 적다. 보통 그룹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기존 회사에 계속 남아있는 경우가 많다.
만일 그룹을 데려가기를 원하는 회사가 있더라도, 기존 회사가 반발해서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지금 이것저것 알아보느라 바쁜 거고…….’
계약 종료 후에 그룹명은 회사 소유라면서 못 쓰게 하는 케이스도 있다고 하니까.
세 번째로는, 멤버들이 각자 다른 회사에 속해 있으면서 따로 그룹 활동을 총괄할 회사와도 계약하는 것.
‘이건 그룹 활동을 우선하기 어렵겠지.’
멤버 개인을 데려가는 회사는 그룹 활동보다는 개인 활동을 바랄 테니까. 게다가 어디서 그룹 활동을 총괄해야 할지도 고민이다.
네 번째로는 뉴마에 그대로 남고, 저번처럼 회사가 그룹에 손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계약으로 정해두는 방법이 있는데…….
‘뉴마는 이제 못 믿어.’
그럴 바에는 회사를 따로 차리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멤버 전원의 탈뉴마를 상정해 둔 이상, 역시 실현 가능성이 가장 큰 건 회사를 세우는 방법이려나?
우리가 탈뉴마를 꾸미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데 다른 회사들이 적극적으로 접근해 오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우형이 상담하고 싶은 게 있다며 이사실을 찾아왔다.
“만나고 싶다고 연락하는 회사가 있어?”
“확신은 못 하겠는데 계속 다른 얘기를 꺼내면서 만나자는 거 보니까, 작곡 때문에 보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역시 업계인들은 다른 건가. 고민하고 있을 타이밍에 잘 찾아오네.
하긴 조금만 찾아봐도 재작년까지 뉴마와 모노크롬이 좋은 관계가 아니었던 건 충분히 알 수 있었겠지.
멤버들이 소속을 옮길 가능성이 있다고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 묻혀 있던 원석들을 예쁘게 꺼내놨는데 탐이 안 날 리가.’
복잡한 일이긴 한데, 그걸 떠나서 다른 회사에서도 멤버들의 재능을 알아봤다니까 왠지 뿌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 멤버들끼리도 얘기해 봤거든요. 만일 생각이 맞으면 다른 회사와도 대화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려면 저희한테 필요한 사항은 확실하게 정리해두고 만나는 게 좋으니까요.”
“그렇지. 필수 사항을 못 지켜 줄 회사라면 빠르게 결론 짓고 서로 갈 길 가는 게 나으니까.”
멤버들도 슬슬 모노크롬의 향방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머리 아픈 일이지만 계속 미룰 수 없고, 지금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룹 단체로 계약이 가능한지, 그리고 지금 함께 일하는 직원들을 포함해서 전담팀을 만들어줄 수 있을지를 물어보려고 하거든요.”
“깔끔하고 좋네.”
딱 모노크롬에게 필요한 기본 조건이었다.
만일 멤버 개인을 원해서 접근하더라도, 그룹이 단체로 소속을 옮길 예정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상대방도 회사로 돌아가 그룹 계약을 고려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저희 말고 직원들은 근로계약이 되어 있으니까 혹시 이직 제한 같은 게 있는지 여쭤보려고요. 저희가 근로계약서 내용은 모르니까.”
그렇지. 직원들까지 옮겨간다면 멤버들 계약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계약 또한 고려해야 했다.
보안이 필요한 경우, 퇴사 후 동종 업계 취업 제한을 두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매니지먼트팀, 프로듀스팀은 영업비밀을 다루는 곳은 아니었다.
“그건 아마 괜찮을 거야. 매니저는 원래 동종 업계로 자주 이직하니까 괜찮고. 송 피디님은…… 나도 뉴레인에서 빼 왔잖아?”
“아, 그렇죠.”
다른 회사에서 빼 와놓고 이직 제한을 걸면 양아치지. 근로계약서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송 피디 스카우트 현장에 있었던 우형도 그때 기억이 떠올랐는지 작게 웃었다.
우형은 마치 숙제를 확인하듯이 ‘이건 가능한지, 저건 어떤지’ 하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내 대답은 대개 ‘괜찮아’였다. 안 괜찮더라도 이사의 권한을 이용해서 괜찮게 만들 생각이었다.
준비해 온 질문들을 한차례 쏟아낸 우형은 물어볼 것이 더 있는지 조금 주저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저기, 그럼 이사님은…… 이사직에 있으신데 다른 회사로 옮기기 부담스럽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음……?
지금 화제에서 내가 이사인 게 관련이 있나.
우형이 조심스럽게 말하려는 건 알겠는데, 먼저 확인해야 할 것 같아서 나는 그의 말을 끊고 질문했다.
“그…… 혹시 내가 같이 가는 걸 전제로 말하는 거야?”
“예?”
“음?”
동시에 의문을 표하며 눈이 마주쳤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우형의 동공이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