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화
“말씀대로 했더니 형이 제 말 잘 들어주더라고요.”
“그, 그래? 잘됐네.”
전과 같은 이유로 <뉴 스타 이펙트> 미션 심사 현장에 찾아왔는데, 저번엔 고민이 있다던 보현이 그새 고민을 해결했는지 인사하러 와서는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는 칭찬했지만 내심 당황했다.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내 말대로 했다고 하는데…… 내가 뭘 하라고 했더라?
연기하는 것처럼 방송에 임하라고 했었던가. 그게 카메라에 잘 잡히는 방법이니까.
그래도 콕 집어서 연찬을 어떻게 대하라고 지령을 내린 기억은 없었다.
‘아니, 잘 지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한 적은 있었지.’
그러나 그건 보현이 연찬과 잘 지내지 못해서 상심하는 바람에 소극적으로 바뀔까 봐 그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연찬 본인에게도 그런 성격이 방해가 되리라는 건 사실이기도 했고.
연찬을 견제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보현은 그 말에서 힌트를 얻었는지 연찬과 소통할 효과적인 방법을 찾은 듯했다.
“태도가 금방 바뀌었다니 예상 밖이네.”
연찬이 쉽게 꺾일 상대는 아니란 것은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조심스럽게 의문을 표하자 보현이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듯이 설명했다.
“형은 제가 같은 보컬이라 신경 쓰였나 봐요. 그냥 친해지고 싶다고 진심으로 전하니까 알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건 혹시…… 황당해서 전투력을 상실한 게 아닐까?
라고 묻고 싶었으나 보현의 밝은 표정을 보니 내가 초를 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보현에 대한 평가를 약간 수정하자.
얘는…… 누군가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애가 아니다.
얼마 전에는 하범이 모노크롬 멤버들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우리 회사 애들이 그러는데…… 뉴레인에 또라이 같은 애가 있다던데?]
또라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준해가 또라이라고 부르던 연찬이었다.
그러나 연찬을 아는 하범이라면 ‘또라이 같은 애’가 아니라 이름을 정확히 말했겠지.
‘긴가민가했는데 그게 아무래도 보현이였나 봐.’
이 정보의 출처는 이번 미션에서 연찬, 보현과 같은 팀이 되었던 에이펙트 엔터의 연습생이었다.
옆에 있으면 악마의 편집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요주의인물이니 엮이게 되면 긴장하라고 자기들끼리 정보를 공유했다나.
내가 미션 준비 과정을 지켜본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보현이 예측할 수 없는 존재였다는 사실뿐.
‘나도 모르게 방송 괴물을 만들어낸 건 아닐까…….’
뉴레인이 잘 만들어놓은 어항에 보현이라는 조약돌을 던져서 파장을 일으킬 생각이었는데, 알고 보니까 콜라병에 멘토스를 던져넣는 짓이었던 거지.
모노크롬을 닮고 싶다던 보현은 모노크롬의 태풍의 눈 특성부터 닮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폭주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
“너한테 좋은 흐름으로 바뀌고 있다면 네가 맞는 방향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 넌 충분히 잘 해내고 있는 것 같아.”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우리가 배출해낸 급발진 힙합인은 마침 잘 맞는 소속사를 찾아서 날개를 펴고 있는데, 만일 보현이 데뷔하게 된다면 뉴레인이 그를 감당할 수 있을까?
‘……뭐,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지.’
아이돌계도 몇 년마다 3세대, 4세대 하면서 세대별로 나누고는 하는데, 요즘 신인들은 모노크롬과 다른 세대로 분류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우리는 치열한 신인들 경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필요가 없단 얘기지.
다음 세대 아이돌 생태계는 각자 알아서 잘하라고 하고, 나는 한 발 떨어져서 관망하기로 했다.
***
<송투유> 방영 이후로 한이와 모노크롬의 이름이 심심치 않게 언급되는 사이, 또 다른 일로 모노크롬이 소소하게 언급되는 일이 있었다.
이번엔 한이가 아니라 우형과 관련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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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셋 작곡팀 앨범 냈네??
발라드 위주인데 노래 좋음ㅋㅋ
└아 깜짝이야 신셋 앨범 나왔다는줄
└신셋 노래 취향이라 해체 아쉬웠는데ㅠㅋㅋ작곡팀은 계속하나보네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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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형과 성운은 작곡팀의 이름을 따로 만들까 고민하더니, 이미 각자의 이름으로 작곡 활동을 시작한 상태인지라 본명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정말 심플하게, ‘Prod. 우형, 성운’이라는 정보가 곡명 뒤에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커뮤니티에서는 이들을 ‘신셋 작곡팀’이라고 불렀다.
‘역시 팀으로는 이름을 좀 더 알릴 필요가 있어.’
그런 점에서는 본명을 쓰는 게 좋은 방법이었다.
꾸준히 활동하다 보면 사람들도 두 사람의 이름을 점점 인식하게 되겠지.
모노크롬의 리더인 우형이 참여해서 컬러즈 대부분이 관심을 가지며 들었고, 성운도 ‘믿듣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으며, 발라드 가수로 자리 잡은 한은아가 참여했으니 청자는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앨범으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한은아와 같이 가수로 참여한 서정수였다.
“제가 꼭 얼굴 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발매 얼마 후, 약속을 잡아 뉴마로 찾아온 서정수는 은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우형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형은 손이 붙잡힌 채로 머쓱하게 웃었다.
“제가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이 아닌데요…….”
“아뇨! 제게 가수의 길을 열어주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이번에 제작한 우형과 성운의 프로듀싱 앨범은 1번 트랙으로 한은아의 곡, 2번 트랙으로 서정수의 곡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발라드 가수였기에 우형과 성운이 함께 작곡한 두 곡 모두 발라드.
이미 리스너층이 있는 한은아의 곡은 물론이고, 서정수의 곡도 발라드 취향의 대중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하게 업계 사람들에게도 좋은 어필이 된 듯했다.
“OST라니…… 정말 유명 가수들만 얻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거든요.”
서정수가 OST 가창 제의를 받은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게다가 가수 전문 소속사에서도 연락을 해와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고 한다.
우형은 자신에게 거듭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서정수의 얼굴을 보고, 마음에 걸려 있던 것이 사라진 듯이 웃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뵀을 때 가수가 아니라고 소개하셔서 너무 아쉬웠거든요. 계속 노래 불러주셨으면 했는데.”
서정수는 그 말을 듣고 말없이 우형의 손을 더욱 꽈악 잡았다.
‘서정수 씨가 감동받아서 글썽거리는 건 알겠는데…….’
우형이는 왜 따라서 글썽거리는 건데.
최근 눈물 흘릴 일이 줄어들긴 했으나 그의 눈물샘은 지금도 여전했다.
여기서 눈물이라도 흘렸다간 나중에 민망해질까 봐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내가 끼어들었다.
“회사를 옮기시게 되면 지금 속해 계신 지인분 회사와는……?”
“아아, 저희 사장님은 오히려 좋아하는 편입니다. 제가 다른 소속사로 가면 작곡가로서 연줄을 댈 수 있는 게 아니냐면서요.”
“잘됐네요.”
자유로운 분위기라고 하더니 큰 문제 없이 잘 해결된 모양이다.
탈뉴마를 앞두고 있어서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소속사와의 계약 해지가 이렇게 수월하게 되면 머리 싸맬 일 없겠지.
연거푸 고개를 꾸벅이는 서정수를 배웅한 후, 우형은 뭔가 가슴에 벅차올랐는지 얼굴이 약간 상기된 것처럼 보였다.
“전 정말 이 일이 좋은가 봐요.”
데뷔하지 못했다면 프로듀서가 될 생각을 했다는 우형.
그는 아이돌 우형이 아닌 작곡가 우형으로서 뭔가 이뤄낼 때 이렇게 눈이 반짝반짝했다.
“너는 프로듀서를 했어도 잘했을 것 같아. 작곡 실력뿐만이 아니라, 같이 일하면서 서로 좋은 영향을 받는다고 해야 하나? 네 곡 받은 사람들은 다들 좋아하잖아. 실제로도 잘됐고.”
만일 그가 아이돌이 되지 못한 평행세계가 있더라도 마냥 불행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점이 왠지 안심되었다.
상상 속에서 안심을 얻는다는 게 좀 이상하지만.
물론 지금 이곳의 우형은 아이돌도 하고 프로듀서도 하니까 더할 나위 없지.
“많은 도움을 받아서 좋아하는 일 할 기회를 얻었으니까, 저도 다른 사람한테 기회를 줄 수 있으면 주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는 우형은 조금 더 먼 미래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에게는 아이돌로서의 목표 외에도, 프로듀서로서의 목표도 생긴 듯했다.
***
우형과 성운의 프로듀싱 앨범 발매 후에 다른 회사에서 개인적으로 연락을 받은 것은 서정수뿐만이 아니었다.
라솔과 협업하는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던 성운에게는 원래 작곡 의뢰가 들어왔으나, 아이돌 그룹에 속해 있는 우형에게는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엔 우형에게도 연락이 들어오곤 했다.
전부 겉으로 보면 평범한 내용이었지만.
“솔직히 몇 개는 다른 목적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
윤희의 말에 우형은 앉아 있던 의자를 빙글 돌리며 그녀와 마주 봤다.
뭔가가 걸리는데 확신이 가지 않아서 윤희의 의견을 구한 참이었다.
“이번에 프로듀싱 앨범을 낸 것도 있겠지만 이 사람들이 너 예전부터 작곡하는 걸 몰랐겠어? 꼭 만나서 얘기 나누고 싶다는 것도 그렇고, 시기가 의심 가지.”
시기. 바로 재계약을 고려할 시기를 말하는 것이었다.
만일 다른 소속사가 모노크롬과 접촉해서 다음 계약을 논의하고 싶다면 미리 움직여서 포석을 깔아놔야 할 테니까.
‘그래. 이상하게 작곡 이야기는 두루뭉술하고 만나는 걸 우선하고 싶어 하는 느낌이야.’
이게 모노크롬 단체를 향한 러브콜이라면 한 번쯤은 이야기를 들어볼 법도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리고, 이런 제안이 다른 멤버들에게도 오고 있다면.
아직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형은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
<기로>를 함께 촬영한 김형운, 남상현과 한이의 공동 인터뷰 스케줄이 잡혔다.
대중들에게 연기력을 인정받은 김형운과 남상현, 그 사이에 신진 한이가 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있었다.
배우팀 직원들과 일정을 조율하고 돌아가려는 한이를, 권진헌 기획실장이 붙잡았다.
“배우 한문호가 극찬한 청년 배우들. 타이틀이 좋은데요.”
“거의 한문호 선배님이 잡아주신 스케줄이나 다름없죠.”
주인은 회사에서 권 실장을 보면 방향을 홱 트는 등 마주치기 꺼리는 것 같았지만, 한이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칭찬은 많이 들어둬서 나쁠 것 없으니까.
“이렇게 가파른 성장세로 빠르게 화제성을 잡는 신인 배우는 처음 봅니다. 이제 2년 차잖아요?”
“가수로서는 7년 차지만요.”
“그러고 보니 전에 따로 전달해드린 대본은 읽어 봤나요?”
“아, 조금 보긴 했는데 역시 저희 다음 컴백 일정이랑 겹칠 것 같아서-.”
한이가 모노크롬의 일정을 말하자 권 실장은 잘 생각해보라는 듯 천천히 말했다.
“제가 십 년 넘게 이 업계에서 일하면서 가장 뼈저리게 느낀 건, 배우는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는 거예요. 좋은 작품은 항상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만큼 주목받는 상황이 또 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고요.”
<기로> 종영과 <송투유>의 방영이 거의 같은 시기였기에 지금 뉴마에서 가장 화제가 된 사람을 꼽자면 단연 한이였다.
한이가 앞으로 활동하면서 이 정도의 흐름을 또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이사님이 그룹 활동은 융통성 있게 봐 주시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배우 활동은 이제 시작이잖아요. 아이돌 거쳐서 배우로 자리 잡은 분들을 생각해 보세요. 확실히 배우로 자리 잡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도. 한이 씨는 자리 잡을 수 있는 시기가 빨리 온 겁니다.”
권 실장은 아까보다 한결 진지해진 한이의 얼굴을 보고는 내심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을 리가 없지. 그 점을 파고든 것은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생각해 봐도 될까요?”
“그러시죠.”
권 실장은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답하고는 자리를 떴다.
멀어져가는 권 실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이의 표정엔 혼란이 담겨 있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한 미련이 섞여 있기도 했다.
권 실장이 복도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서서 보던 한이는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두목님. 고자질하러 왔는데요.”
연기하던 얼굴을 싹 지우고 바로 이사실로 직행한 한이가 열린 문틈으로 빼꼼 얼굴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