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54화 (254/430)

# 254화

<송투유> 제작진들은 한이가 도착하자 밝은 얼굴로 그를 반겼다.

얼마 전만 해도 촬영 분량 파기라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느라 처져있던 현장 분위기는 촬영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봄이라도 맞이한 듯이 확 살아났다.

“한이 씨. 평소에도 멋지시지만 오늘은 더 멋지신데요?”

“그쵸? 오늘 메이크업 샵 가서 특히 잘 꾸며달라고 했어요!”

스태프들과 그런 인사를 나눈 한이는 햇빛이 잘 드는 창가를 찾아 스마트폰으로 셀프 카메라를 찍었다.

나중에 방송이 시작되면 모노크롬 공식 계정에 방송 알림 겸 올릴 사진이었다.

얼마 전만 해도 천상식이 ‘허여멀겋다’, ‘멋 부리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라며 투덜거리던 탓에 눈치가 보여 메이크업도 최소로 했는데.

‘이제 눈치 볼 일 없지.’

촬영장에 도착하기 전, 먼저 메이크업 샵에 들렀던 한이는 오늘은 특별히 평소보다 조금 더 메이크업한 티를 내달라고 부탁했다.

무대 메이크업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꼼꼼한 피부 표현, 평소보다 짙은 아이섀도 등은 누가 봐도 ‘아이돌 메이크업’이었다.

아이돌처럼 꾸미는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천상식을 향한 도발이자, 승리 패를 잡았다는 징표였다.

한이가 만족스럽게 셀카 여러 장을 남기고 있는 사이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PD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크흠.”

천상식도 촬영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조금 기분이 언짢은 표정이었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촬영을 거부하는 상황까지는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얼마 전에는 그가 방송인이 아니라 가수이기 때문에 방송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켜보다 보니 조금 달랐다. 그가 성질을 부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습이 가능한 선까지.

이번에도 한이는 며칠 동안이나 골머리를 앓았지만 방송에선 편집만 하면 끝이니까.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고 해야 하나…….’

주변인들도 그런 점을 예상하며 너그럽게 받아주고, 그래서 그의 마음대로 고집부리는 성향은 더더욱 강화되고.

그런 순환이 오랫동안 이어져 오다가, 한이라는 변수가 나타났다.

그는 평소에 모두가 자신의 편을 드는 상황에 익숙해져 있던 탓인지, 많은 이들이 그의 말에 반대 의견을 펼치자 의외로 기를 펴지 못했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가 자신의 행동을 지적하는 상황에 대처하는 법은 머리에 없었던 듯했다.

한이는 자신이 남들은 잘 모르던 천상식의 약점을 잡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내가 약점 잡았다고 악용할 것도 아니고.’

같이 방송을 잘 만들어나가는 데에만 활용할 것이니 그리 나쁜 짓을 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그도 바로 얼마 전까지는 ‘후배’라는 약점을 잡아서 자신을 마구 괴롭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천상식을 제외하고 밝은 분위기로 촬영이 시작되었다.

오늘의 촬영 내용은 곡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가며 편곡 방향을 정하는 것.

<송투유>는 기존에 나온 곡을 어떻게 편곡하느냐가 시청자들의 주목 포인트 중 하나였다.

“저희가 부를 <자전거가 있는 풍경> 말인데요. 사실은 영화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곡이라고 해요.”

“연기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한다는 놈이 그 영화를 안 봤어?”

천상식이 황당하다는 말투로 말했으나 한이가 태어나기 10년 전에 나온 영화였다.

거기에 가수 활동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었던 듯하지만, 이제 천상식의 말은 한이에게 아무 타격이 없었다.

“하하! 오늘 이렇게 선배님이랑 같이 보려고 아직 안 봤나 봐요. 마침 제작진분들이 편집본을 준비해주셨다고 하거든요!”

“내가 왜 여기서 너랑…….”

“이거 안 보시면 저랑 커플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 한 바퀴를 돌고 오는 코스가 마련되어 있는데~.”

한이는 이제 천상식이 자신을 꺼린다는 점까지 알뜰살뜰 잘 활용 중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짧지만 오붓한 영화 감상 시간을 갖게 되었다.

질색하는 천상식. 예의 바른 후배의 얼굴을 하고 막 나가는 한이.

이 이상한 온도 차를 보고 슬쩍 고개를 피하며 웃음을 참는 스태프도 있었다.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이라 더 웃음이 흘러나왔다.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메인 작가가 PD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희 생각보다 방송 잘 나올 것 같아요.”

PD도 동의하는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듀엣으로 같이 노래를 부르려면 여러 번 맞춰보며 조율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창법도, 음색도, 음역대도 다른 두 사람이 얼마나 조화롭게 한 곡을 완성시키는지가 관건.

첫 촬영에 부를 곡 후보를 미리 뽑아왔던 것처럼, 한이는 웬만하면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준비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전부 다 준비해 왔다.

그러나 천상식이 트로트가 아닌 다른 노래를 부르는 것은 희귀한 일이었기에 참고할 만한 자료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오늘, 한이는 그가 발라드를 부르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그대의 향기가-.)”

흡인력 있는 목소리에 제작진도 한이도 귀를 쫑긋 세웠다.

한이가 반란을 일으킨 탓에 촬영장에서는 ‘고집불통 선배’ 이미지가 강해져 버린 천상식이지만, 확실히 실력은 누가 뭐라 하지 못할 수준이었다.

‘와…….’

이 <자전거가 있는 풍경>은 그의 목소리 톤을 고려하여 골라온 곡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들으니 생각보다 더 울림이 있고 분위기가 좋았다.

그가 오랫동안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것도, 제작진이 그를 꼭 섭외하고 싶어 했던 것도 이 노래를 듣고 단숨에 이해되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예능 콤비처럼 천상식을 대하던 한이였지만 지금만큼은 후배 보컬리스트의 시선으로 그를 보게 되었다.

‘내가 저 옆에서 대등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아니, 묻히지 않을 수 있을까?’

걱정과 동시에 호승심이 들기도 했다.

처음엔 ‘왜 내가 여기 섭외되어서 이 고생을 하나’ 싶은 마음에 시간이 빨리 지나기를 바란 적도 있었는데, 그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건 확실히 좋은 기회였다.

이제는 섭외해 준 제작진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은 한이 씨가…….”

<송투유>의 편곡을 맡는 스튜디오 소속의 편곡가가 한이의 파트를 지정했다.

최근엔 편한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는데.

천상식의 노래를 듣고 난 후, 다시 그의 앞에서 노래를 부르려니 다시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이가 노래를 시작하자 앉아 있던 천상식은 눈썹을 작게 들어 올렸다.

“전에 들었던 노래랑은 스타일이 또 다른데요?”

“그러게. 분명 전에는 좀 더 요즘 노래 스타일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천상식의 가수로서의 모습을 보며 감탄하던 제작진은 이번엔 한이를 보며 또 제각기 감상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송투유> 촬영 초반. 한이가 천상식의 요구로 지긋지긋할 정도로 노래를 불렀던 탓에 현장에 같이 있었던 제작진도 한이의 목소리는 눈을 감고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한이의 노래는 또 다른 스타일이었다.

한이는 지금 천상식과 함께 노래를 부를 때의 모습을 상상하며 어울릴 만한 스타일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천상식 선생님도 지금은 별말 없으신 거 보면 괜찮은가 봐요.”

제작진은 천상식을 흘끔거리며 수군거렸다.

그는 다리를 꼬고 앉아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있었지만 저번처럼 ‘다시’를 외친다거나 노래를 중간에 끊지는 않았다.

뭔가 지적하고 싶은데 지적할 부분을 찾지 못해 기분이 언짢은 것처럼 보였다.

촬영 현장은 이내, 두 사람의 보컬 대결 현장처럼 변해 버렸다.

아까보다 목소리에 더 힘이 들어간 듯한 천상식, 거기에 맞춰 더 집중해 부르는 한이.

방금까지 서로의 성격을 고집하며 티격태격하던 두 사람이 지금은 프로 보컬리스트로서 자존심 대결을 펼쳤다. 그야말로 음악 프로그램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그리고 천상식은 한이의 노래를 듣다 드디어 뭔가를 잡아냈는지 벌떡 일어섰다.

“여기 음이 틀렸잖아, 음이!”

“아!”

편곡으로 인해 기존 멜로디와 달라진 부분이 있었는데, 원곡과 헷갈리는 바람에 시작하는 음을 잘못 잡아 버렸다.

책잡히지 않기 위해 자다가도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원곡을 듣다가 온 바람에 생긴 뼈아픈 실수였다.

그래도 편곡가조차도 긴가민가할 정도로 미세한 부분이었는데 천상식은 수십 년간 쌓아온 가수의 감으로 그걸 딱 잡아내 버렸다.

“나보고 노래 망칠 거냐고 아주 땍땍거리더니, 노래를 누가 망친다고?”

이건 한이가 처음 반항하며 한 말이었다.

그때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한 탓에 천상식은 그 말을 계속 마음에 담아뒀던 모양이었다.

‘……근데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네. 아, 하필 실수를 해서.’

원래라면 지금은 둘이서 가볍게 스타일을 맞춰보는 시간.

실수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은 당연했으나 이미 두 사람의 자존심 대결로 변질된 상태였다.

할 말이 없어서 기를 못 펴던 천상식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가 공부하란 소리를 그냥 한 줄 알아? 요즘 애들은 기초가 안 되어 있다니까!”

“저도 음악 공부한 기간이라면 남들한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요…….”

“뭐, 몇 년 잠깐 배웠나?”

20대 중반의 나이에 20년 넘게 음악을 접하고 배워왔으면 충분한 거 아닐까요.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카메라 앞에서 구구절절 집안 내력을 설명해야 했기에 한이는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나 천상식은 이런 한이의 태도를 다른 쪽으로 이해했다.

‘이 이야기가 나오면 할 말이 없나 보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그의 머리에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그러면 본 녹음까지 최대한 실력을 끌어올린다는 이유를 대며 학력이 아주 높은 사람, 자신의 편을 들어줄 만한 사람을 데려와 이 괘씸한 후배의 기를 눌러버리자.

성악을 전공한 그의 인맥 중엔 음악을 전공하여 교수까지 오른 이들도 있었다.

‘그 앞에서도 공부했다는 소리를 당당히 할 수 있나 보자.’

그러나 천상식은 그게 오히려 제 함정을 파는 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

“한이가 드라마 끝나자마자 형님한테 메시지 보내니까, 바로 한이한테 전화하시더라고요. 무섭다고.”

한이가 <송투유> 촬영으로 나가 있는 동안, 멤버들과 대화하다가 한이에 관한 화제가 나왔다.

드라마가 꽤나 화제를 불러일으킨 덕에 신진 배우로서 한이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매체가 있었다.

한이의 배우 활동을 담당하는 배우팀에서 그 때문에 연습실로 찾아왔다가, 한이가 예능 촬영으로 부재중인 것을 알고 다시 돌아간 참이었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대로 그날 숙소에서 드라마를 같이 봤을 때 이야기가 생각났는지 우형이 한이의 형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사이가 안 좋은가 했는데…… 그런 건 아닌가 보네?”

“네. 그냥 평범한 형제 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난 또. 공연 때 뵌 적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나 했었어. 가족 일은 내가 궁금하다고 물어보기도 좀 그러니까.”

“아, 그건 아마 한이가 초대를 안 해서…….”

……불러도 안 올 거라고 생각해서 초대를 안 한 게 아니라, 한이가 초대를 안 해서 가족이 못 온 거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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