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화
선조들이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있겠지. ‘참는 것도 세 번이 한계다’ 뭐 그런 거.
그런데 한이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양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그거 보통 참을 인 세 번이면 사람을 막 어떻게 한다고 하지 않아요? 세 번 넘으면 이사님이…….”
“아니, 내가 사람을 처리해 주겠다는 게 아니고.”
법치국가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한이도 농담이었는지 바로 손을 내렸다. 이런 농담이 나올 정도로 내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도 직장을 다니면서 상사를 어떻게 해 버리고 싶다는 상상은 자주 하니까. 현실에서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상상 속에선 그렇게 발현하곤 한다.
“모노크롬도 7년 차겠다, 팬들도 보고 있겠다. 후배라고 너무 자존심 굽히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웬만하면 넘어가겠지만 메인 보컬의 목 건강에 위기가 올 정도로 상대가 일방적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다면 상황이 달랐다.
회사가 해야 할 일은 아티스트 보호. 방송국이나 제작진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만큼은 천상식보다 한이를 우선해야 한다.
지금은 한이도, 뉴마도 아무 말도 안 하니까 제작진들도 그냥 방관하고 넘어가는 중이지만, 우리가 뭐라고 하면 그들도 잘 해결해보려는 태도는 보여야 한다.
‘자승자박이지.’
자기네들이 먼저 한이가 나온다고 기사를 내지 않았던가. 쉽게 발을 빼지 못하게 하려고.
아마도 아이돌은 그룹 이미지에 본인 이미지, 회사 의견까지 챙길 게 많아서 강하게 나오지 못할 걸 아니까 이렇게 뻗대는 것 같은데, 정 말이 안 통하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한이가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쩔 거야. 지금 급한 건 제작진일 텐데.’
‘드러워서 못 해 먹겠다!’라고 뒤엎지는 않더라도, 더는 못 하겠다는 사정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개인 사정으로 출연진이 바뀌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출연진이 갑자기 바뀐 이유를 우리가 아니라 천상식에게서 찾지 않을까. 그는 어린 출연자들을 울린 전적도 있으니까.
우리가 하기 싫어서 내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우리에게 큰 타격이 되지 않는다.
괜한 말이 조금 도는 것과 아티스트 보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아티스트 보호지.
한이는 내 말을 머릿속으로 곱씹어보듯이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더니 다시 내게 시선을 맞췄다.
“진짜 그래도 돼요?”
“네가 계속 당하고만 있는 모습은 팬들도 별로 보고 싶지 않을 테고. 참기만 한다고 좋을 건 없을 것 같아서.”
한이도 휘둘리기만 하는 건 싫어서 최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보려는 것 같은데, 그래서 천상식은 오히려 더 한이를 꺾으려고 요지부동인 것 같단 말이지.
지금처럼 한이의 의견이 계속 묵살되는 상황에서 이 촬영을 계속 진행한다고 생각해 보자.
한이의 보컬 실력을 보여주기 위해 수락한 섭외였는데, 천상식이 제대로 협조해주지를 않으면 한이는 최선의 환경에서 실력을 보여줄 수 없다.
방송에서도 적당히 묻히는 채로 지나가겠지. 컬러즈만 환장의 대파티를 벌일 테고.
게다가 천상식이 인성질하는 부분이 방송으로 나가더라도 시청자들은 ‘천상식이 또 저러네’ 하고 넘어갈 것이다.
“한쪽이 숙이고 들어가는 건 별로 좋은 그림도 아니고, ‘방송에 나왔다’라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아. 너한테만 부담이 가는 것도 좋지 않고.”
이대로 가다간 우린 스트레스만 얻지, 별달리 얻을 게 없다.
천상식도 큰 타격이 없고. 제작진은 이 상황에 묻어가고. 우리만 리스크를 크게 지는 상황이다.
‘방송계가 원래 그렇다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아.’
모노크롬이 외부에 휘둘리는 데에 익숙해지는 건 피하고 싶었다.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게임 플레이어의 뜻대로 움직일 때랑 뭐가 다르겠어.
항상 우리 마음대로 할 수는 없고 상황에 타협해야 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한이는 가늠이라도 해 보듯이 조용히 손가락으로 하나, 둘, 셋 하고 세더니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럼 두목님만 믿겠습니다.”
“두목이 누구야……?”
“저희 대장이시니까.”
한이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양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호칭이야. 그렇게 부르면 내가 진짜로 누굴 처리해줘야 할 것 같잖아.
“아마 다음 촬영 시작하자마자 이사님한테 연락 갈지도 몰라요.”
“상관없어. 네 구조 신호라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을게.”
“예. 두목.”
한이가 진짜 두목에게 인사라도 하듯이 장난스레 꾸벅 허리를 숙였다.
다시 일어난 그의 표정은 전보다는 확실히 후련해 보였다.
***
“으휴. 답답하다, 답답해.”
하나.
“연습을 하든, 공부를 하든. 멋 부릴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면 좀 좋아?”
둘.
“어린 애들 듣는 음악만 하니까 발전이 없지, 발전이.”
셋.
한이의 인내심이 짧은 게 아니었다. 이미 며칠이나 이런 소리를 견뎌왔으니 인내심은 충분히 증명된 상태였다.
천상식은 고집스럽게 한이를 들들 볶았지만 한이의 고집도 만만치 않았다.
두 고집쟁이가 맞붙자 상황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고 악화하기만 했다.
그리고 한이는 이제 확실히 때가 왔음을 느꼈다.
“별로야. 다시.”
“싫은데요?”
“뭐?”
천상식이 대체 몇 번째인지 세지도 못할 ‘다시’를 입에 담자, 한이는 지금까지처럼 억지로 웃던 얼굴을 싹 지우고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천상식은 제가 뭘 잘못 들었나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며칠째 같은 일만 반복하느라 제대로 된 촬영분을 뽑지 못하고 무의미하게 카메라만 돌리고 있던 제작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조장이 선배님일 필요가 있어요? 조별 과제 할 때도 결국 적극적으로 일 잘하는 사람한테 조장 역할 넘기는데. 귀찮으신 거라면 그냥 저한테 맡기시죠?”
두 사람은 멘토와 멘티로 모인 것도 아니다. <송투유> 출연자라는 대등한 관계로 모인 것이었다.
한쪽만 의견을 묵살당하고 말을 들을 이유는 없다는 소리였다.
“허허? 말하는 것 좀 봐라. 아주 나랑 맞먹으려고 하네. 아예 친구 먹자고 하지 그러냐?”
“그럴까요? 친구 하고 싶으세요? 친구 하자는 사람 많아서 저 친구 많거든요.”
능청스러운 대꾸에 천상식은 말문이 턱 막혔다.
한이의 말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이는 후배라서 사렸던 것뿐이지, 원래 말을 잘하고 많이 했다.
“이제 곡 정하고 준비합시다. 정말로 친구 먹자고 모인 것도 아니고, 노래하는 방송인데 계속 이러다가 그냥 노래 제대로 못 하고 끝내고 싶으세요? 우리 가수인데 노래 망쳐요?”
방금까지 ‘가수로서 기본이 안 됐다’는 말을 수십 번이나 했던 천상식이었다.
그런 상황에 한이가 가수의 본분을 얘기하니 그는 바로 받아치지를 못했다.
대꾸할 말을 못 찾았다기보다는 후배가 이렇게 나오는 게 처음이라 당황한 듯도 보였다.
천상식이 어버버하며 말을 제대로 못 하자 한이는 제작진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대에서 부를 곡은 제가 첫날에 뽑아왔던 곡 리스트 중에서 고르고 싶은데요. 팝송으로 정해도 괜찮나요?”
“아, 저희 방송 이름으로 음원도 내야 해서 웬만하면 저작권 협의하기 쉬운 국내곡 쪽으로 정해주시면…….”
입을 떡 벌리고 한이의 반란을 지켜보던 PD가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그도 이미 머릿속에서 판단을 끝냈을 것이다. 드디어 제대로 촬영을 진행할 기회라고.
“그럼 이걸로 하죠. 김청영 선배님의 <자전거가 있는 풍경>. 당시에 엄청 유행했던 곡이라 선배님도 잘 아실 거예요.”
“누구 마음대로…….”
“선생님. 이제 슬슬 곡을 정해야 저희도 음원이나 편곡을 준비할 수 있어서…….”
제작진은 한이의 말에 편승하여 천상식에게 양해를 구하며 부디 진행해 주십사 청했다.
천상식의 매니저도 작은 목소리로 천상식에게 ‘일정을 더 딜레이시키면 다른 스케줄에도 지장이 생긴다’라는 것을 설명했다.
진척 없이 촬영 일수만 늘리다가는 정해진 무대 일자까지 제대로 준비를 마칠 수 없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듀엣 무대를 뒤로 미루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천상식의 소속사에서도 원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 곡, 저도 좋아하고 저희 어머니도 좋아하시는 곡인데 선생님 음색에 잘 어울려서 시청자분들도 좋아할 것 같습니다.”
PD가 어머니 취향까지 들며 말하자 천상식은 “크음.” 하며 불편한 내색은 표해도 아까처럼 큰소리를 내지는 못했다.
방금까지 유아독존의 태도를 보이던 천상식이었으나, 순식간에 ‘천상식 대 나머지’ 구도가 되어버렸다.
본인이 말한 대로 일이 척척 진행되자 한이는 천상식에게 보라는 듯이 씩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한이 형이 다시 시끄러워졌어요.”
오늘은 한이 상태가 어떤가 보러 왔는데, 준해가 한이를 바라보며 피곤한 표정으로 말했다.
얼마 전만 해도 조용해져서 걱정되었는데 이젠 평소보다 시끄럽게 군다는 모양이다.
준해의 말을 증명하듯이, 한이는 지금 기분이 좋은지 재민의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우형이나 준해만큼 잘 치는 건 아니었지만 무반주로 노래를 부르기는 싫어서 기타를 잡은 듯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목을 보호하려고 말수도 줄인 그였는데 지금은 목 상태도 문제없어 보였다.
‘그렇게 말하고 단단히 마음먹은 표정으로 나가길래 한바탕 벌일 줄 알았는데.’
한이가 앞뒤 안 보고 뒤집어엎을 성격은 아니지만 그것까지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그런데 역시 카메라 앞이어서 적당히 할 말만 하고 넘어간 모양이었다. 수습하기 어려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촬영 현장에 따라갔던 매니저의 말로는 한바탕 벌이진 않았어도 말로 한 방은 먹였다고 한다.
게다가 이제 제작진도 한이의 말을 잘 들어준다고.
‘그래. 이게 올바른 거지.’
예의를 차리면 호구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니까. 강하게 나오니까 바로 편들어주는 것 봐.
한이는 노래 한 곡을 뽑고는 기타를 제자리에 돌려놓고 상쾌한 얼굴로 일어났다.
“가끔 이렇게 내일 없이 살아보는 것도 좋네요.”
“아니지. 이건 막막한 상황에 내일을 개척한 거지.”
계속 제자리만 뱅뱅 돌다가 이제야 나아가기 시작한 거니까.
“맞아요. 이 기회에 할 말은 다 하고 살려고요. 이사님이 책임져주신다고 했으니까.”
드라마 방영에 예능 출연으로 할 게 많은지 마침 매니저가 찾아오고, 한이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를 따라 연습실을 나섰다.
우형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말했다.
“……한이 예전 성격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저랬어?”
“자기 의견 무시당하면 항복 받아낼 때까지 쫓아다니면서 끝장을 보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대화 길게 끌기 싫어하는 해랑이랑 자주 싸웠던 건데…….”
“으음. 뭐, 지금은 남들한테 시비 거는 것도 아니고 참다 참다 안 돼서 터진 거니까.”
반대로 할 말을 못 하고 살던 시절이 있었는데, 다시 예전처럼 할 말은 하고 살 생각이 들었다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 게 아닐까.
연습생 시절처럼 해랑이랑 싸우는 게 아니라면야 괜찮겠지.
우형도 걱정되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정말로 예전 기억이 떠올랐던 것인지 작게 웃었다.
“시간 지나도 애들은 다 여전한 것 같아요.”
우형은 자기가 멤버들을 키우기라도 한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한두 살 많다고 이런 부모님 같은 표정이 우러나오다니. 항상 생각하지만 천생 리더 체질이었다. 부모님 체질 같기도 하고.
‘그럼 이제 이쪽은 문제없을 것 같고.’
한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골치가 아팠는데 잘 해결되는 듯해서 다행이었다.
동시에 진행하는 일이 많아서 하나가 삐끗하면 우르르 잘못될 것 같아서 불안했단 말이지.
다른 일들도 이렇게 술술 풀리면 좋으련만.
내게도 소원을 이뤄주는 토템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지금 진행되는 일들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