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화
‘와, 생각보다 장난이 아니네……?’
한이는 천상식이 출연한 프로그램을 보면서도 ‘방송이니까 캐릭터성을 살리기 위해 더 자극적으로 편집했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방송계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다지만, 그래도 몇 년, 몇십 년이나 방송 일을 해 온 사람들은 그만큼 방송을 위하는 마음이 있으리라 믿었다.
이것도 어쩌면 방송을 위한 컨셉이 아닐까.
그렇다면 미리 얘기해줬다면 좋았겠지만, 컨셉이 아니라면 더 문제였기에 부디 컨셉이기를 빌었다.
“아, 아하! 오늘 처음 봬서 제 실력이 어떤지 잘 모르시니까 한번 봐 주신다는 거죠? 그러면 무반주지만 제가 뽑아온 곡 중 하나를 제가…….”
“이래놓고 환경이 안 좋아서 제대로 못 불렀다고 나중에 딴소리한다니까. 내일 우리 회사 녹음실로 와.”
“……오, 선배님 회사에 불러주시는 건가요?”
이건 회사에 초대한다는 말을 많이 돌려서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말뜻 그대로인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한이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그의 말을 열심히 포장했다.
그러나 천상식은 한이의 말을 제대로 들은 체도 안 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늘은 이만 됐고, 접읍시다.”
“네? 아, 저기, 선생님.”
당황하며 천상식을 부른 것은 PD의 목소리였다.
이 상황은 PD도 예상치 못했다는 뜻이었다. 제작진 전부가 짜고 치는 깜짝 카메라가 아니고서야.
그러나 이 <송투유>에는 그런 예능다운 연출이 필요하지 않다. 그 점은 한이도 TV를 봐서 알고 있었다.
“아, 아하하, 선생님. 한이 씨도 촬영하려면 미리 스케줄을 조정해야…….”
PD가 일어서는 그를 만류했다. 내일은 미리 촬영 일정이 잡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이렇게 일어서면 한이뿐만 아니라 촬영팀도 내일 다시 나와 준비를 해야 한다.
그래도 ‘제작진 사정도 봐달라’고 요구할 위치가 아니라 한이의 이름을 대자, 천상식은 한이를 보고 물었다.
“내일 일 있어?”
“아, 아뇨…….”
“그럼 시간 잡고 찾아와.”
분명 촬영 스케줄이 잡혀 있었으니 따로 바쁜 일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천상식은 자리를 떠 버렸다.
심지어 그의 매니저조차 난감한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제작진이 웅성거리는 와중에 천상식을 따라갔던 스태프 몇몇이 수완 없이 2층으로 다시 돌아왔다.
촬영이 결국 강제적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나 오늘 촬영하러 샵도 다녀왔는데 이렇게?’
제작진에게 듣기로는, 촬영 첫날엔 처음 만난 출연자들끼리 인사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둘의 취향을 조율해가며 선곡을 한 후 헤어지는 게 보통이라고 했다.
애초에 촬영이 길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인사가 제대로 되었는지도 모르겠고 선곡도 하지 못했다.
덩그러니 남겨진 한이는 멍하니 입을 열었다.
“……내일 스케줄이 있다고 말했어야 했나요?”
자신이 바로 ‘일이 없다’고 하는 바람에 이렇게 그가 휙 떠나버린 걸까.
적당히 쳐냈어야 했나 뒤늦게 고민하는 한이에게 PD는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아마 그랬으면 그걸로 뭐라고 하셨을 수도……. 선생님이 좀 까다로우시죠. 이해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한이의 귀에는 PD의 이런 말들이 ‘살려주세요’와 같은 구조 신호로 들렸다.
제작진은 천상식의 저런 성격을 알고, 이미 각오하고 촬영에 나선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사님이 촬영 일정이 묘하게 빠르다고 마음에 걸려 하셨었지.’
어쩌면 섭외 과정에서부터 트러블이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을 다시 해야 했다. 천상식은 방송인이 아니라 가수였다. 그것도 연예계에서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원로 가수.
연예인은 방송국에게 을의 입장인 경우가 많지만 그는 갑의 입장이었다.
방금까지 ‘방송이니까’라는 생각에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직접 겪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방송에는 편집의 힘이 있다. 실제보다 더 과장할 수도 있고 순화할 수도 있다.
한이는 천상식이 나온 방송을 보면서 자극적으로 편집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반대였던 모양이었다.
‘하아. 머리 아프네.’
바로 얼마 전까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으며 연기하고 있었는데, 본업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소박을 맞다니.
가수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한 직후에 잡힌 스케줄이라 더욱 잘하고 싶었다.
‘내일은 노래 들어주실 테니까 잘해보자.’
적어도 다음에 또 만날 약속은 하고 간 게 안심이었다.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내일은 노래를 들어줄 생각이 있으니 녹음실로 부른 것일 터.
첫 대면부터 불신을 보이는 원인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지만 7년 차 가수, 메인 보컬로서 확실히 실력을 보여주자.
그렇게 생각했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
“다시.”
“(Cause you make me so……)”
“음. 다시.”
한이가 노래를 부르면 천상식이 심드렁하게 ‘다시’를 외쳤다. 벌써 10번째 ‘다시’였다.
안무를 연습하거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 자주 듣던 소리이지만, 노래를 부를 때 이렇게 퇴짜를 맞는 일은 처음이었다.
‘이건 노래를 들어보겠다고 부른 게 아니라 기강 잡으려고 부른 거잖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사근사근하게 대했는데 굳이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나?
혹시 그는 살가운 후배가 아니라 깍듯한 제자처럼 굴기를 바랐던 걸까.
한이의 기를 먼저 팍 꺾어두려는 것 같은데 이쯤 되니 한이도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아주 다른 데 가 있구만?”
확실히 연차는 무시할 수 없었다.
노래는 전혀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잠깐 다른 생각을 하던 걸 귀신같이 알아챌 줄이야.
천상식의 매니저는 스태프와 함께 카페를 다녀오더니 한이에게 슬쩍 따뜻한 차가 담긴 테이크아웃 컵을 건넸다.
담당 가수의 성격을 아는지 이렇게 말없이 주변인을 챙기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한 사람의 고집 때문에 수십 명이 물밑에서 고생 중이었다.
“요즘 애들은 겉멋만 들어서 말이야. 가수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어디 패션모델 하러 가고 싶은 것처럼 허여멀게서는. 그런 데에 정신 팔려 있어선 음악을 제대로 배웠겠어? 다 기본도 안 된 것들이-.”
그가 ‘요즘 애들’ 얘기를 꺼내면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40대인 PD조차 천상식 기준으로는 요즘 애들이었기 때문이다.
한이는 그가 하는 말을 듣다가 문득 무엇이 그의 심기를 거슬렀는지 알아챘다.
‘……샵에 다녀온 게 문제였나?’
천상식이 출연했던 트로트 방송에서 그는 적어도 출연자들의 노래를 듣고 난 뒤 화를 냈지, 어제처럼 만나자마자 마음에 안 든다며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그 출연자들과 자신이 다른 점이 뭐였을까. 이미 가수로 데뷔했던 출연자도 있었기에 가수 후배인 것은 문제가 아니다.
지금 그가 ‘요즘 애들은 겉멋만 들었다’고 말하는 것을 봐서는…… 아마도 아이돌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게 아닐까.
게다가 ‘기본’이라는 말을 들으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작년의 그 트로트 방송에 성악을 공부한 출연자가 있었다. 천상식은 그의 프로필을 보더니 ‘기본은 되어 있다.’고 드물게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기에 인상에 남아있었다.
듣기로는 천상식도 아마 가수가 되기 전에 성악을 배웠다던가.
‘하아. 내가 여기서 지금 성악 배우다가 왔다고 말할 수도 없고.’
성악 공부를 포기하고 진로를 바꾼 탓에 10년 가까이 아버지와 냉전 중인데, 지금 그것을 방패로 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성악에 트로트, 그리고 아이돌을 보는 시각까지.
“이대로라면 난 방송 못 해.”
“……하하. 제가 내일 더 준비해서 올까요?”
아버지가 떠오르니 오기가 발동했다.
후배로서는 굽히고 들어갈 수 있겠지만, 유한이로서는 순순히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
우형이 통화를 끊고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로 화면을 쳐다봤다.
“스팸 전화라도 왔어?”
연예인의 개인 번호는 보안이 생명.
혹시 이상한 전화라도 받았을까 봐 걱정하며 물었는데, 우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표정을 풀었다.
“아뇨. 한이 전화였어요.”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막 ‘와하하하’ 웃다가 끊던데요?”
……괜찮은가?
촬영 첫날, 한이가 나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바로 회사로 복귀하길래 “촬영이 벌써 끝났어?”라고 물었더니 그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라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의견 조율에 시간이 걸려서 예상보다 촬영일이 늘어났다던가.
그런데 그다음 날, 스케줄에 동행한 매니저에게 전해 듣기로는 의견 조율이 문제가 아니라 무한 노래 지옥에 빠졌다고 한다.
윤희가 말했던 ‘인성질’이라는 세 글자가 뇌리를 둥둥 떠다녔다.
‘우리 메인 보컬을 소중히 대해주지 못할망정!’
제작진은 부디 나와달라고 사정을 해놓고 왜 이 상황을 방치한 거야.
회사 차원에서 뭔가 제스처를 취하려고 했는데, 한이는 왜인지 불타오르는 눈으로 “우선 저한테 맡겨주시면 안 될까요?”라면서 날 막았다.
그렇게 한이는 이틀째 천상식의 회사에 출근 도장을 찍었지만, 한이의 의욕과는 다르게 상황이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우형에게 이상한 전화를 하는 걸 보면.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또 다음 날, 기타를 연주하는 재민 앞에는 청중이 한 명 더 늘어났다.
한이의 그런 모습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저 형이 웬만하면 저러는 형이 아닌데. 요 며칠 새 이상해졌어요.”
같이 지내는 멤버들 눈에도 한이가 이상했는지 준해가 말했다.
요즘은 멤버들도 그를 신경 써서 잘 놀리지 않는다고 한다.
“숙소에서도 한이 컨디션이 별로야?”
“형이…… 말수가 줄었어요.”
그건 정말 큰일이다. 준해도 심상치 않다고 생각해서 내 옆으로 슬쩍 다가와 이 이야기를 전해준 듯했다.
한이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한 탓에 일단 가만히 있었지만, 가만두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이 옆으로 다가갔다.
“너 진짜 괜찮아? 계속 노래만 불렀다며.”
“네? 크흠. 일단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보고 있어요.”
멍하니 재민을 구경하던 한이가 내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말을 걸어서인지, 목이 잠긴 건지 그는 목을 한번 가다듬고는 말했다.
“혹시 목 상태 안 좋은 거 아냐?”
“괜찮아요. 목에 좋은 데이드링크의 이 생강차를 마시면…….”
한이는 카메라가 없는데도 들고 있던 음료병을 마치 광고처럼 들어 보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본인도 목이 상할까 봐 신경을 쓰는 모양이었다.
‘말수가 줄어들었던 건 말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목 보호하려고 그랬나 보네.’
매니저에게 들은 바로는 <송투유> 촬영은 천상식의 비협조적인 태도로 인해 여전히 진척이 없다고 한다.
한이도 처음엔 어떻게든 해보겠다며 패기 넘치게 말했으나, 지금은 얼굴에 피로가 약간 서려 있었다.
‘이러다 한이가 3주 내내, 근 20일을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건 아니겠지?’
1년은 12개월. 그중 거의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을 이렇게 보내야 하는 것은 너무 소모적이었다.
나는 한이의 노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걸 알기에 조심스레 조언을 건넸다.
“참을 인 세 번이면 화를 면한다잖아.”
“……그렇죠. 그래서 저도 최대한 하자는 대로 해 보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한이는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 섞어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에게 더 참아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참더라도 딱 세 번까지만 참으란 소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