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6화
<기로>의 주인공이 받은 아버지의 수첩. 수첩에 적힌 마지막 내용은 평화 그룹 임원의 비리를 뒤집어쓴 협력사의 사장이 쌍둥이 형제에게 보복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그가 몬 트럭이 쌍둥이 형제를 탄 차를 덮치며, 이를 막으려 했던 주인공의 아버지 또한 사고에 휘말린다.
이날 이후 주인공의 아버지는 기억 장애가 생겨 형사 일을 지속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하게 된다.
이 사고가 중요한 ‘기로’가 되었다고 생각한 주인공은 과거 아버지의 몸으로 들어가 과거를 바꾸려 한다.
이 내용을 촬영하기 위해 촬영지에는 주인공을 맡은 배우 남상현과, 쌍둥이 형제를 맡은 김형운, 한이가 전부 모였다.
“어후. 상현 선배 추우셔서 어떡해요.”
날은 맑았지만 대본상으로 사고는 비가 오는 날 일어난다. 따라서 촬영이 들어가면 살수차를 이용해 비를 뿌릴 예정이었다.
겨울은 지났지만 옷이 젖은 채로 촬영을 하려면 꽤 추울 것이다.
다만 그 걱정을 하는 한이의 얼굴이 짓궂어 보여서 남상현이 그를 흘겨봤다.
“넌 차에 타 있으면 된다고 놀리는 거지?”
“저도 마지막에 잠깐 비 맞는데요?”
한문호와 종종 대화하던 한이의 옆에 있으면 자신도 자연스레 한문호에게 사인 요청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남상현은 그런 생각에 한이와 말을 텄다가 그의 인싸력에 휘말려서 이제는 꽤 친해진 상태였다.
“넌 NG 나면 머리 다시 말려야 하니까 한 방에 가자고.”
남상현의 말대로 한이는 차 안에 있다가 나와야 하므로 NG가 나면 젖은 머리를 다시 말린 후에야 다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점을 당부하자 한이는 걱정하지 말라며 검지를 세워 흔들었다.
“하늘 같은 선배가 비 맞고 있는데 제가 감히 NG를 낼 수 있겠습니까. 원샷원킬!”
“사고 장면 찍으러 가면서 ‘원킬’이 뭐냐.”
남상현은 한이나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나 사람을 편안하게 해 준다는 점에선 비슷하다고 느꼈다.
자신이 한이의 멜로 눈빛에 당한 것은 전혀 모르고 그냥 한이가 엄청난 호감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실상이 어쨌건 덕분에 연기에 몰입하기 쉬웠던 것도 사실이었다.
주인공 서주완이 과거에서 만난 최진우에게 마음을 연 것처럼, 남상현도 한이에게 금세 마음을 열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촬영할 것은 그 최진우가 죽게 되는 사고 장면.
과거 회상 장면이 새로 들어가지 않는 이상 최진우가 더 등장하는 장면은 없다. 한이는 오늘로 촬영이 마지막이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평소처럼 여유로운 한이의 모습을 보고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남상현은 다시 촬영 준비에 나섰다.
***
주인공의 아버지는 협력사 사장이 위험한 일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쌍둥이 형제를 구하러 간다.
평화 그룹에서 일어난 비리 사건이 원인이지만 그 죄를 갚아야 할 것은 비리를 일으킨 임원이지, 쌍둥이 형제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진우는 이 사고로 명을 달리해 주인공이 사는 현재엔 이미 고인. 과거의 아버지는 최진우를 구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미래를 아는 나라면, 과거를 바꿀 수 있다.”
주인공 서주완은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과거로 들어간 자신을 남몰래 도와줬던 최진우의 얼굴을 떠올린다.
비리에 관한 정보를 주며 정의로운 방향으로 행동했던 최진우가 생존한다면 평화 그룹은 많이 바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평화 그룹의 비리에 얽혀서 돌아가시게 된 아버지까지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고 지점이 기록으로 남아 있었기에, 주인공은 그 장소보다 앞서나가 일부러 접촉사고를 일으켜 협력사 사장을 어떻게든 막을 생각이었다.
그런 희망을 품고 과거로 돌아왔으나, 자신도 죽을 생각으로 트럭을 모는 이를 개인이 막아내기는 어려웠다.
“……으윽.”
협력사 사장은 주인공이 탄 차마저 막무가내로 치고 나가고, 주인공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사고가 일어난 뒤였다.
이 도로는 바로 옆이 절벽. 쌍둥이 형제가 탄 차는 도로 밖으로 삐져나갔으나 다행히 추락하기 전이었다.
하지만 하필 비가 오는 바람에 지반이 약해지면서 차가 굴러떨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주인공은 급히 사고 차량으로 다가갔다. 앞좌석은 이미 처참히 부서져 버렸다.
뒷좌석의 문을 여니 바로 앞에는 신음을 흘리는 동생 최진우, 그리고 그 안쪽에는 의식을 잃은 형 최진수가 있었다.
주인공은 가까이에 있던 최진우부터 끌어내린 후, 최진수도 구하기 위해 다시 차 안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런데 그때.
“……?”
누군가가 주인공, 아니, 연기를 이어나가야 할 남상현의 팔을 붙잡았다.
당황해서 뒤돌아보니 살수차가 뿌리는 비를 맞아 젖어가는 한이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왜 일어나?’
차에서 끌어내렸지만 사고 때 머리를 크게 부딪치는 바람에 결국 사망하게 되는 전개 아닌가?
그렇다면 한이가 이렇게 바로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있으면 안 된다.
대본상으로 그는 최진수를 구해야 했기에, 한이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뿐이지, 아래엔 이미 안전장치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위험해서 붙잡은 것은 아니었다. 한이나 남상현 본인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었고.
이 와중에 카메라는 지금도 자신의 표정을 잡고 있었다. 남상현은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은 채로 상황을 파악했다.
‘지금, 연기하는 거야?’
남상현은 김형운과 오랜 기간 친구 사이로 지내왔다. 그래서 스태프들이 김형운과 한이를 헷갈릴 때도 남상현만큼은 둘을 헷갈리지 않았다.
그런데 쏟아지는 비 때문에 흐려진 시야 탓인지, 아니면 한이의 표정이 바뀐 것인지, 한이의 얼굴 위에 김형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남상현은 이 드라마에 일란성 쌍둥이라는 어려운 설정이 필요했던 이유를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 드라마는 애초에 최진수가 아니라 최진우가 살아남는 전개다.’
그리고 작중 주인공도 이때 같은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은 과거를 바꾸지 못했다. 형 최진수는 이날 죽는다. 그리고 최진우는 살아남아서…….
“컷!”
감독의 컷 사인이 떨어지자 한이가 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같은 장면을 한이의 표정을 잡는 바스트 숏, 배경까지 크게 잡는 롱 숏까지 찍는 것으로 이 신의 촬영은 끝이었다.
신 촬영이 마무리될 때까지 남상현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남상현의 귓가에 한이의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원샷원킬!”
한이는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스태프에게 수건을 받아 남상현에게도 건넸다.
그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남상현은 벌떡 일어나 도망가는 한이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감독이 다가오는 것이 더 빨랐다.
“아-, 상현 씨, 이번에 표정 엄청나게 좋았어요.”
“저한테 일부러 안 알려주신 거죠?!”
표정이 좋을 수밖에.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충격을 받았으니까.
이후 장면들도 대본에는 형 최진수의 이름만 나왔기에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깨달았다. 이후 내용은 전부 동생 최진우가 일란성 쌍둥이임을 이용해서 형 최진수로서 살아가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형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동생은, 위험한 상황에 놓인 형을 보고 그 모든 걸 다시 돌려받을 방법을 떠올렸다.
“최진우 착한 놈인 줄 알았는데! 어떻게 절 그렇게 속일 수가!”
“바로 그겁니다.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 그 감정을 이어서 다음 촬영도 힘내 주세요!”
남상현이 배신감에 휩싸여 외치니 감독은 오히려 그 감정을 살리라며 부추겼다.
만일 남상현이 거기서 NG를 냈다면 다들 ‘대본과 다르니까 어쩔 수 없지’ 하고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보고 있는 와중에 연기자로서 시험을 받은 것이었다. 결국 그 시험에 통과했지만 분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그 화살은 뒤늦게 차 안에서 나온 김형운에게 향했다.
“야! 너 이게 마지막 신이었다고?!”
김형운은 남상현에게 붙잡혀 짤짤 털리는 와중에도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당연히 내가 계속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
“당연하지! 당연히 네가…….”
경력이 더 기니까. 배우로서는 더 유명하니까.
그에 반해 한이는 이제야 갓 연기에 입문한 신인 배우다. 그런데 어떻게…….
“시청자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
이어지는 김형운의 말에 남상현은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스토리만 반전인 것이 아니었다. 캐스팅까지 반전 연출의 일부분이었다.
“이 장면 공개되면 사람들 반응이 어떨지 기대되지 않아?”
김형운은 자신의 배역을 한이에게 넘긴 이 상황에서도 그저 드라마의 완성도만 생각하며 즐겁다는 얼굴이었다.
‘다들 연기에 미쳤어!’
조금 전, 표정을 싹 바꾸며 바로 형 최진수를 연기하기 시작했던 한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정신 안 차리면 이 드라마에 완전히 묻혀 버린다.
남상현은 뭔가가 뒤쫓아오는 듯한 오싹함을 느끼고 침을 꿀꺽 삼켰다.
***
“사업을 하려면 사사로운 건 포기해야 한다고요.”
“…….”
“저는 둘 다 가질 방법이 있다고 봐요. 아버지.”
이렇게 말하는 청년 최진우의 얼굴 위에 중년 최진우, 즉, 주인공이 아는 ‘최진수’의 얼굴이 오버랩되며 화면은 과거에서 현실로 넘어온다.
그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청년역 한이와 중년역 한문호는 한 공간에 모여 있었다.
한문호는 한이가 연기하는 장면을 내내 유심히 지켜봤다.
“계속 내 버릇들을 따라 하던데.”
한이는 촬영을 마치고 세트를 나오다가 한문호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일부러 그런 건가?”
“네. 혹시 그게 선배님께 실례가 되었을까요?”
“아니. 이유가 듣고 싶었을 뿐이야.”
한이는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 한문호의 이전 출연 작품들을 보며 호흡과 표정을 분석했다.
대사를 칠 때 나오는 사소한 움직임이나 버릇은 옆에서 같이 보던 재민에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메인 댄서답게 사람의 움직임을 민감하게 포착할 줄 아는 그였다.
그렇게 연구한 것들을 한이는 가감 없이 자신의 연기에 녹여내고 있었다.
“최진수의 과거, 형을 따라 하는 동생. 그러면 이렇게 연기하는 게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해서요.”
한이가 따라 하는 것은 한문호뿐만이 아니었다. 이따금 김형운의 표정을 따라 하기도 했다.
드라마 속에서는 같은 사람이지만, 한문호와 한이는 이번 드라마로 처음 만난 남남이다. 배우가 다르니 차이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러 인물을 조합한 한이의 연기는 ‘형 행세를 하는 최진우’라는 설정에 개연성을 만들고 있었다.
한문호는 그게 의도한 것인지 궁금해서 한이를 따로 불러 세워 물어본 것이었다.
“다른 사람처럼 보이는 것보다는 자기 연기를 하고 싶을 텐데. 욕심이 나진 않나?”
“흐음. 글쎄요. 제가 여기서 내세워야 할 건 배우 유한이가 아니라 최진우인데요.”
그 대답에 한문호는 마치 합격이라는 듯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
“한문호 배우님이 다른 배우들한테 그렇게 관심을 가지시는 분이 아닌데.”
“그래요? 연기 보고 조언도 많이 해주시던데요.”
“그러니까. 한이 씨를 아주 빤히 쳐다보시더라니까요.”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한이의 드라마 촬영 일정을 맡은 배우팀의 매니저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소문도 있거든요. 마음에 드는 후배가 있으면 같이 일하는 감독님들한테 엄청 추천한다고. 그, 왜, 이전에 한문호 님이 찍은 영화 남주인공도 그렇게 해서 캐스팅됐다는 얘기 있잖아요.”
“와. 역시 대선배님은 다르네요.”
“한이 씨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니에요? 마음에 들어 하시는 눈치던데.”
“에이. 왜 이렇게 절 띄워주실까요~.”
“빈말이 아니라, 한이 씨가 배우로 잘될 것 같아서 그래요. 이번 작품도 좋았지만 다음엔 더 비중 큰 역할이 들어올걸요? 내가 장담해.”
벌써부터 다음 작품을 예상하는 그의 말에 한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