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손에 망한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243화 (243/430)

# 243화

뉴레인 방문 후, 허용석 기획실장은 나를 경계 대상에서 제외한 듯 보였다.

내가 모노크롬을 키우며 뉴마에서 입지를 다진 것이 그에겐 위협으로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는 허 실장의 예상과는 반대로 회사에 오래 있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

대화 한 번 했다고 태도를 갑자기 바꾸는 그의 태도에 ‘너무 쉬운 거 아냐?’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대표의 수하 노릇을 하는 사람이란 걸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 나는 ‘혈연으로 들어온 낙하산’이나 ‘회사를 물려받을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대표 딸’이기만 할 테니까.

[그럼 대표님이 해외 순방을 마치고 돌아오신다면 이사님은……?]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때쯤엔 제가 회사에 없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호…….]

이런 대화를 나누며 허 실장의 눈이 번뜩이던 것을 보면, 그는 내가 ‘대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뉴마에 영향력을 보이기 위해’ 임시로 부임했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리고 허 실장과 나눴던 대화를 전해 들었는지, 배우팀의 권진헌 기획실장도 나와 마주치자 이 화제를 꺼냈다.

“아하, 그래서 신인 육성은 생각이 없으시다고 하신 거군요?”

“아. 네, 뭐 대충 그렇죠.”

내가 권 실장의 신인 육성 이야기에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던 건 그의 의도가 불순해서였다.

그런데 권 실장은 내가 회사에 오래 있지 않을 예정이라 신인 육성이라는 장기 프로젝트를 맡기 어려워서 거절했다고 해석했다.

‘이거 편리하잖아……?’

조금 순순히 나왔다고 이렇게 확 태도가 달라지다니.

나도 직장 생활을 해 봤지만 그때의 나는 거의 을의 입장이었다.

순순히 굴면 호구 취급당하고, 웃으면 ‘왜 웃냐. 우습게 보이냐.’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그렇다고 딱딱하게 굴면 사회생활 못하는 직원이라고 낙인찍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내가 윗사람이어서 그런지 다들 알아서 좋게 포장해주고 있었다.

‘권 실장이나 허 실장이 찾아왔을 때 아니꼽게 굴었는데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나 보네.’

그냥 나를 좀 별난 사람으로 보는 듯했다. 이건 아마 외국에서 왔다는 설정이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권 실장도 곰곰이 생각해보니 뭔가 걸리는 게 있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노크롬은 열성적으로 지원하셔서 아티스트 육성에 계획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제가 해외에 있을 때 아이리스를 좋아했어요. 아이돌에 원래 관심이 있었죠.”

“아, 그래서 아티스트팀으로 부임을…….”

팬은 팬심으로 기상천외한 일을 벌이기도 한다.

같은 팬은 그 마음을 알기에 이해하고, 팬이 아닌 사람은 이해를 못 하니까 그냥 신기한 일도 다 있다며 넘어가고.

팬이라는 이유가 붙으면 모두가 대충 납득하고 넘어가는 세상이라 다행이었다.

‘뉴레인에 처음 방문했을 때 아이리스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한 적 있었으니 신뢰가 갈 거야.’

허 실장에게 확인해 보면 신빙성이 올라갈 것이다. 그때 깔아둔 복선이 지금 도움이 될 줄이야.

“전 뉴레인 신인 기획 때문에 일이 있어서. 먼저 올라가 봐도 될까요.”

“아아, 네. 바쁘신데 잡아두고 있었군요.”

당신들이 떠민 그 일 때문에 가보겠다고 하니 그는 바로 한 발자국 물러서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권 실장은 연기자 출신이라 허 실장보다 대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가 프로파일러는 아니지만 표정을 분석할 줄 아는 사람이니 왠지 거짓말을 하다간 표정으로 들킬 것 같아서.

‘연기라도 할 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가끔 비즈니스 미소를 지어낼 때도 있지만 권 실장 앞에선 그냥 무표정으로 가는 게 낫겠어.

탈뉴마라는 대형 프로젝트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은 회사에 들키고 싶지 않으니까.

‘퇴사한다고 하면 갑자기 대우가 안 좋아지는 회사가 있는데 아마 뉴마가 그럴 것 같단 말이지.’

재계약을 논의할 시점에는 회사도 알게 되겠지만, 그때까지는 최대한 숨기기로 했다.

나갈 땐 나가더라도 회사에서 뽑아낼 수 있는 건 잔뜩 뽑아내고 나가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바쁜 것도 사실이었기에 나는 바쁜 걸음으로 내 자리로 향했다.

***

데뷔 서바이벌과 관련해 미리 이야기할 사항이 있다고 해서 나와 모노크롬은 뉴레인으로 향했다.

선배로 출연하는데 방송에서 연습생들과 초면인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얼굴을 한 번쯤은 보기도 해야 했다.

오늘은 한이가 드라마 촬영으로 외부에 나가 있어서 그를 제외한 네 명만 대동했다.

뉴마 건물을 나와 약 십몇 미터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지만 모노크롬에겐 초행길.

‘여기 올 때마다 모노크롬 생각하면 마음이 좀 그래…….’

누가 봐도 처음 오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는 멤버들을 보니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뉴마가 좀 정상적인 회사였다면 모노크롬도 작년 초에 진즉 이 건물로 옮겨왔겠지.

차별 대우를 받아온 멤버들 생각에 기분이 좀 처졌는데, 멤버들이 두리번거리던 이유는 따로 있었는지 뒤에서 재민이 준해에게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걔 있는 거야? 난 만나기 무서워.”

‘걔’라는 건…… 해랑의 동생 말하는 건가.

‘멤버들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다고 그랬나? 준해 빼고.’

준해는 회사 앞에서 연찬과 마주친 적이 있다. 나도 두 번이나 마주쳤고.

팬미팅 때는 해랑이 가족들에게 초대권을 보냈건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소문으로만 오래 들어왔다면 전설의 동물 보는 기분이려나. 연찬이 나타날까 봐 보디가드처럼 해랑을 에워싸고 퇴근하던 멤버들이니 긴장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오늘은 예전에 컴백 일정 문제로 내게 찾아온 적이 있었던 뉴레인의 기획팀장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녀의 안내를 받아 연습실에 들어서니 한창 연습 중이던 연습생들이 있었다.

그들은 거울을 보고 우리가 들어온 것을 알아챘는지 바로 뒤돌아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후배들에게 인사를 받는 상황은 음악 방송 스케줄이 있을 때마다 겪었기에 익숙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방송국이 아니라 연습실. 그보다 더 기강 잡힌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잠시 흠칫했다.

“다들…… 기합이 바짝 들었네요.”

“데뷔 기회가 앞에 있는걸요. 제일 에너지 넘쳐야 할 시기죠.”

기획팀장이 내게 작게 대답했다.

뉴레인에는 연습생이 더 있지만 데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은 여기 모여 있는 10명.

얼굴이 낯익은 연습생도 있는 것을 봐선 아마 뉴마에서 옮겨간 연습생인 듯했다.

그리고 물론 낯익은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지만 이곳엔 해랑의 동생, 연찬도 있었다.

다른 연습생들이 선배를 마주해서 긴장한 얼굴인 것과 달리 연찬은 이쪽에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게 오히려 눈에 띄어서, 얼굴을 모른 채로 여기서 해랑의 동생을 찾으라고 해도 바로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선후배 관계로 마주하는 건 본인도 껄끄러운가 보네.’

해랑은 어찌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흘끔 옆을 쳐다봤는데 그는 큰 반응이 없었다. 연찬을 잠시 쳐다보다가 시선을 바닥으로 돌릴 뿐이었다.

당사자 둘 사이엔 미묘한 기류가 흐를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 오히려 다른 멤버들이 더 긴장한 얼굴이었다.

우형도 해랑을 힐끔 쳐다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고, 재민과 준해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저들끼리 대화를 나눴다.

“사진으로는 봤는데 진짜 해랑이 형이랑 정반대 스타일이다.”

“나도 처음엔 못 알아볼 뻔했다니까. 행동이라도 동생 같으면 몰라, 저러고 있는데 누가 동생이라고 생각해.”

바로 내 등 뒤에서 허리를 숙이고 숙덕거리고 있어서 둘의 대화 내용이 내 귀에도 다 들려왔다.

“얘들아, 내 뒤에 숨으면 숙덕이는 거 다 보여.”

내가 작게 말하자 두 사람은 슬금슬금 우형의 뒤로 옮겨갔다.

잠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연습생들의 안무 연습 장면을 뒤에서 구경했다.

‘항상 5명 대형만 봐오다가 10명 대형을 보려니 눈이 따라가질 못하겠네.’

센터 위주로만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10명 전부 실력이 빠지진 않는 것 같은데.

내게 댄스 실력을 가늠할 눈은 없었기에 전문가 재민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다들 어떤 것 같아? 데뷔하기에는.”

“오래 춤춰온 것 같은 연습생들은 확실히 눈에 띄고요. 전체적인 균형을 무너트리는 사람은 없어서. 데뷔하기에 괜찮냐 물어보시면…… 그건 데뷔 직전까지 얼마나 연습하는지가 중요하죠.”

아, 재민은 어떻게든 되게 만드는 사람이었지.

‘데뷔할 실력이 되는 것 같냐’고 물으면 ‘실력이야 어떻게든 만들면 된다.’라고 대답할 게 뻔했다.

해랑이 ‘연찬은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한다’고 했기에 보컬 위주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댄스도 크게 문제는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뉴레인에 들어온 지는 얼마 안 됐지만 그전까지 다른 회사 연습생으로 있었댔지.’

그러면 당연히 춤도 배웠겠지. 가수 지망생이 아니라 아이돌 지망생이니까.

그렇다면 뉴마에서 배우 지망생으로 있다가 옮겨온 연습생들은 어떤지 궁금해지는데.

“여기 배우 지망생이었던 연습생들도 섞여 있는데 실력은 크게 차이 안 나?”

“으음. 춤 배운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사람은 있는데, 아예 처음 배우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내가 뉴마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땐 뉴마에도 도한과 같은 아이돌 연습생들이 남아있었다.

뉴레인도 회사를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어수선할 때였기에 아이돌 지망생들을 바로 데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후에 뉴마에 남아 있던 연습생들은 차차 뉴레인이나 타 기획사로 소속을 옮겼고, 아니면 아예 배우 지망으로 노선을 틀기도 했다.

뉴마에서 옮겨 온 배우 지망생들도 원래는 아이돌 지망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흐음. 뉴마도 가능성이 있으니까 골라서 보낸 거겠지.’

그렇게 우리는 연습 장면을 조금 지켜보다가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기획팀장은 우리에게 연습생들의 프로필을 건네주며 말했다.

“방송 전에 자세히 정리해서 전달 드리겠지만, 저희가 원하는 신인상은 ‘인상에 남는 특색 있는 그룹’이에요. 그걸 염두에 둬 주셨으면 해요.”

어느 그룹이든 인상에 남고 특색이 있고 싶은 건 마찬가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프로필을 확인해 보니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할 수 있었다.

‘유니크한 보컬 스타일…….’

연찬의 프로필에 적힌 문구였다.

모노크롬의 전 메인 보컬이었던 윤환이 유니크한 보컬 스타일을 지니고 있었지. 반대로 한이는 대중적인 스타일이고.

뉴레인이 데뷔조로 모아둔 조합은 주요 보컬 멤버로 연찬을 두고 그에 맞춰 꾸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보컬 메인인 연습생이 생각보다 적은 걸 보니까 경쟁자 자체를 얼마 안 두려고 했나 보네.’

출연할 연습생 선정부터 뉴레인의 의도가 반영되었기에 우리가 개입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 후로 우리는 기획팀장에게 대략적인 일정 등을 전달받은 후 뉴레인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는데 그 전에 누군가와 마주쳤다.

“엇, 아, 안녕하세요!”

복도에 나와 있다가 우리를 보고 후다닥 다가와 인사를 하는 것은 뉴마에서 건너간 연습생 세 명 중 한 명.

데뷔조에 포함되지 못한 그 한 명이었다.

그런 그가 이어서 하는 말은 의도치 않게 내 양심을 쿡 찔렀다.

“저 사실 선배님들처럼 되고 싶어서 여기 지원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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