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아티스트팀은 무시하면서 모노크롬은 출연시키고 싶으니 협조해 달라?”
이건 우리를 무시하는 거야, 아닌 거야? 아니, 무시해서 이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건가?
게다가 뉴레인이 무시한 건 아티스트 팀뿐만이 아니었다.
일차적으로 아티스트 레이블을 분리하면서 모노크롬을 데려가지 않았고, 이차적으로는 모노크롬 멤버였던 윤환을 우리와 상의 없이 데려갔다.
‘그런데 지금은 좀 나아 보이니까 섭외로 손을 내밀다니.’
모노크롬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을 실감할 때면 뿌듯함이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저 기가 찼다.
“뉴레인에는 이미 직속 선배로 아이리스가 있잖아?”
“아무래도 보이그룹 데뷔 기획이라 걸그룹보다는 보이그룹을 우선해서 섭외하는 것 같습니다.”
“으음. 같은 걸그룹이면 몰라도 보이그룹의 멘토로 계속 출연하기는 어렵다는 거지.”
“네. 그리고 에이펙트 엔터테인먼트에서는 SPID 멤버들이 출연 논의 중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신인 보이그룹 데뷔 방송을 볼 시청자는 원래부터 보이그룹에 관심이 있을 확률이 높다.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는 같은 보이그룹을 출연시키는 게 더 맞겠지.
뉴레인에는 솔로 아티스트가 된 윤환도 있었지만, 에이펙트에서 SPID가 나온다면 뉴레인도 그룹을 내보내야 균형이 맞는다.
‘그런데 그걸 이렇게 날 무시하는 티 팍팍 내면서 알려줘야 하냐는 말이지!’
다들 대표 빽 낙하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도 이사인데.
대체 무슨 자신감이 있어서 ‘이야기는 우리가 다 해놨어. 너는 사인만 해.’라는 식의 요청을 한단 말인가.
‘결정은 내가 할 테니 너희는 따르기만 하거라.’ 스타일인 대표 아래서 일하던 사람들이라 그런가? 아주 뉴마다운 사람들이었다.
“안 나간다고 바로 답장……, 아니, 아니지.”
아무리 상대가 무례하게 느껴져도 일단 비즈니스는 지키자.
빠른 일 처리를 지향하지만 너무 칼같이 거절하는 건 좋지 않다.
그리고 답장을 기다리게 하면서 우리가 부르면 달려가는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게 해주고 싶다.
사실 비즈니스보다는 후자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
“일단 내용 확인했고 검토하겠다고 답장해 줘.”
“네. 알겠습니다.”
최 비서는 내 확인을 받고 이사실을 나갔다.
내가 아티스트팀의 일을 직접 처리하니까 쉽게 보는 건가 싶어서 사내 업무는 이렇게 간접적으로 처리하면서 최종적으로 결정할 때만 나서는 중이다.
뉴레인은 일단 뉴마와는 다른 회사지만, 전부터 자기들 필요할 때만 한 회사처럼 굴었다.
신인 보이그룹의 선배로 당연하게 모노크롬을 부르는 것도 그렇고.
‘뉴레인…… 뭔가 계속 찝찝해.’
윤환을 뉴레인으로 떠나보낸 것은 뉴레인이 뉴마보다 그의 솔로 활동을 더욱 잘 지원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뉴레인도 아티스트에게 그리 좋은 환경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가 플레이어이자 대표로 있는 게 아닌 이상 뉴마도 뉴레인도 이전보다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현실적으로 같은 소속사와 길게 계약을 이어나가기도 어렵지만, 소속사를 옮기는 것도 만만찮게 어렵다.
그래서 모노크롬의 이후 거취를 고민하며 뉴마와 뉴레인 모두 선택지로 남겨두었는데, 그 생각은 점점 흐릿해져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찝찝한 것은 뉴레인이 해랑의 동생을 연습생으로 들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신인 보이그룹을 기획 중이라 하고.
뉴마의 연습생을 데려가면서까지 연습생 인원을 늘리는 것을 보면, 해랑의 동생이 나올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해랑이한테 직접 물어보는 건 좀 그렇겠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리더인 우형과 먼저 대화해보기로 했다.
민형에게 메신저로 연락하여 다른 멤버들에게 알리지 말고 우형만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이사실로 올라온 그에게 물어보니, 그도 이미 대충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 전에 SPID 애들 놀러 왔을 때 언뜻 들었는데…… 그땐 공식으로 나온 얘기가 아니라 말씀을 못 드렸어요.”
“아니, 개인적으로 들은 이야기면 말 못 하는 것도 이해하지.”
따지자면 회사 내부에서 들은 정보를 외부에 알리는 것은 올바른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하범은 개인적으로 모노크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그도 해랑의 동생과 관련된 일을 알고 있고 신경 쓰여서. 그리고 이들이 이렇게 누군가에게 발설하지 않을 것을 믿었기에.
멤버들이 내게 말했다면 ‘사적인 일’ 범위를 넘어서서 회사 일로 커져 버렸겠지.
그리고 이제는 회사에 공식으로 연락이 들어왔으니 감출 필요 없었고.
‘나는 뒤늦게 듣고, 멤버들은 아예 다른 경로를 통해 들었다니.’
보통이라면 가장 먼저 회사를 통해 듣는 게 맞을 텐데, 다들 비정상적인 루트로 먼저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회사는 대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인가 생각하게 되는 거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고 해서…… 그냥 이야기만 조금 오가는 단계라고 생각했거든요.”
우형이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불확실한 것은 언제든 엎어질 수 있는 업계니까. 결국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을 수도 있고.
다른 그룹인 하범도 해랑을 걱정해서 몰래 정보를 전달해준 건데, 같은 팀인 멤버들 마음은 어떻겠어.
“뉴마로 섭외가 들어왔어. 데뷔 서바이벌에 모노크롬이 나와줄 수 있겠냐고.”
“아, 결국…….”
건너 들었던 정보가 확실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우형의 표정이 확연히 어두워졌다.
‘보통은 멤버들의 의견을 물어보겠는데 이건 너무 좀…… 그렇잖아.’
회사와 우리의 관계를 차치하고, 보이그룹 선배로 모노크롬 출연을 원하는 것까지는 알겠어.
그런데 만일 해랑의 가족 관계로 화제성을 끌어오고 싶어 하는 거라면 바로 사절이다.
들어오는 일은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는 우리지만 이건 상황이 달랐다.
“해랑이는 얘기 듣고 뭐래?”
“동생이 나온다고 확실히 정해진 게 아니라……. 그래도 개인적인 사정이 일에 영향 미칠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어요.”
나는 우형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장 곤란한 건 해랑이겠지.
우리가 해랑과 동생의 일을 알고 있고, 그게 모노크롬과 아티스트 팀의 일에 영향을 준다면 그로서는 더 불편할 것이다.
“거절할 생각으로 답변은 미뤄뒀거든. 내가 알아서 잘 말해둘게.”
“그래도 저희가 거절하면 회사 입장이 조금…….”
“아냐. 회사 걱정은 할 필요 없고.”
뉴레인도 다른 사람을 구하느라 수고스러워지거나 뉴마의 입장이 곤란해지는 건 상관할 바 아니다.
다만 방금 최 비서와 대화한 것처럼 뉴레인 신인 그룹의 멘토로 가장 적절한 것은 모노크롬이다.
그 모노크롬이 불참한다는 것이 외부에 어떻게 비칠까가 문제인데.
‘일부 사람들 눈에는 모노크롬이 뉴마와 관계를 이어나갈 생각이 없어서 안 나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려나.’
재계약 시즌이 되면 팬들의 불안감을 조성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자연 발생 한다고 한다.
이걸 빌미 삼아 재계약에 관한 근거 없는 추측을 하는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바빠서 못 나가는 거로 가자.”
어쨌든 모노크롬이 지금 뉴마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모노크롬이 하는 일은 전부 뉴마와 함께 하는 일.
회사 안에서야 파벌이 갈려 있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그냥 뉴마와 바쁘게 일하는 것으로 보이겠지.
뉴레인이 분리하면서 모노크롬을 데려가지 않은 이상 우리에게 출연을 강제하긴 어렵다. 이건 그들의 업보다.
“인터뷰처럼 일정 조정 가능한 스케줄이 들어오면 그 시기에 몰아서 하거나. 아니면 아예 해외 로케라도 나갈까? 때처럼.”
내가 소풍 가듯이 해외 로케를 가야겠다고 하자 우형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이내 웃었다.
“곡을…… 빨리 만들어놔야겠네요.”
“……아냐. 재촉할 생각은 아니었어.”
지금 모노크롬 앨범의 타이틀곡은 전부 우형이 만들고 있다.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한 해외 로케가 잡히면 그가 바빠지는 게 당연했다.
다음 타이틀곡을 빨리 내놓으라고 간접적으로 말한 것 같잖아. 우형도 농담이었는지 웃으며 말했지만.
‘그러고 보면 뮤직비디오 촬영하러 LA에 다녀온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네.’
일 년에 한 번 이상 출국해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기회가 되면 해외에 한 번쯤 나가고 싶긴 하다.
그래. 시간이 있으면 뉴레인을 위해 쓰기보다는 우리를 위해 쓰고 싶어.
뉴레인은 우선순위 저 아래로 내려놓고 편한 마음으로 있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엮일 운명인지, 또 일이 생겼다.
***
평소 일어나는 시간대로 일어났다가, 주말이란 것을 깨닫고 곧바로 누워 다시 잠이 들려던 참이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바로 베개 옆에 엎어둔 스마트폰에서 알림이 아니라 다른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침침한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스마트폰에 나타난 글씨를 확인했다.
“레드……?”
예명이 익숙하다 보니 실명을 금방 까먹을까 봐서 [아이리스 레드 홍수연]이라고 저장해 둔 그녀의 연락처.
이게 스마트폰 화면에 떴다는 건…….
‘메시지만 주고받았지, 따로 통화한 적은 없었는데.’
그런데 이 주말 아침에 무슨 일일까. 난 부스스 일어나 잠긴 목소리를 풀고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건 것은 레드 본인이면서 내가 전화를 받은 것에 놀랐는지 “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이사님…….]
“……무슨 일 있어?”
그녀가 보내는 메시지는 항상 밝은 느낌이었다. [네!]라거나 [감사합니다~]라는 말에 귀여운 이모티콘을 붙여서 보내곤 했으니까.
그런 느낌을 상상하고 전화를 받았는데, 스마트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그마했다. 왠지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했다.
[갑자기 전화 드려서 정말 죄송한데 회사 말고 도움을 부탁드릴 데가 없어서…….]
***
전화로 설명하기에는 복잡한 일이 생긴 듯하여, 나는 찾아오라고 집 주소를 알려줬다.
전화를 건 시점에 바로 나올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건지, 몇십 분이 지난 후에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여니 급히 나온 건지 아침의 찬바람에 얼굴이 조금 붉어진 레드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사님. 주말 아침부터 진짜 죄송해요.”
“어차피 일어나 있었어. 그래서…….”
‘무슨 일이야?’라는 말 대신 나는 레드의 뒤를 쳐다봤다. 그녀의 뒤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아이리스의 막내 퍼플. 본명 한보라. 그녀가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누구한테 먼저 알려야 할지를 몰라서…….”
“일단 들어와.”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 봐야 한다고 해서 내 집으로 부른 것이었다.
단순히 연예인이라 시선이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면 안 되는 일이 생긴 모양이었다.
뉴레인보다 내게 먼저 연락한 것을 보면 회사가 알면 좋지 않은 일인 듯했고.
일단 급하게 온 듯해서 두 사람을 거실 소파에 앉히고, 찬바람을 맞고 온 것 같아서 따뜻한 차를 준비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편하게 있어.”
나는 테이블에 머그컵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퍼플은 아직도 후드를 푹 뒤집어쓴 채로 바닥만 내려다봤다.
“보라야.”
레드가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안심시키듯이 말했다.
그러자 퍼플은 말없이 깊이 뒤집어썼던 후드를 벗었다.
“……!”
그리고 드러난 예상치 못한 광경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데뷔 때부터 유지하던 긴 머리는 퍼플의 시그니처와도 같다는 얘기를 본 적이 있었다.
내가 게임에서 완성한 스타일링에 대한 반응이었기에 확실히 기억했다.
그런데 그 장발이 지금은 목덜미가 보일 만큼 짧은 길이로 들쭉날쭉하게.
마치 가위로 아무렇게나 자른 듯이 짧아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