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화
“와. 여기 한적하고 좋다.”
“그치? 지금은 좀 삭막한데 봄 되면 푸릇푸릇해진대.”
문영이 집 주위를 둘러보며 말하자 한이가 자랑하듯이 말했다. 겨울은 겨울대로 뻥 뚫린 느낌이라 주변 풍경이 더 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기서 지내면 매일 연습실로 안 가도 되겠다, 야. 춤 연습 마당에서 하면 되겠네. 흙바닥 폭신하고.”
“근데 춥잖아.”
“야외무대 리허설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긍정 왕이네.”
주변에 있는 게 없었지만 노래하고 춤추는 아이돌에게 큰소리를 내도, 뛰어도 되는 공간이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물론 휴식 공간에서까지 24시간 연습을 할 건 아니지만.
SPID 멤버들의 집들이는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바로 착착 진행되었다.
오늘 집들이를 위해 몬클 하우스에 찾아온 멤버는 하범, 문영, 윤규, 이렇게 세 명이었다.
“형들 베개도 가져왔네요?”
“자고 갈 거면 가져오라길래.”
SPID 멤버들이 가져온 짐을 보고 준해가 물었다. 그들이 가져온 쇼핑백이 몇 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압축된 베개가 들어 있었다.
빈방도 있으니 자고 갈 거면 베개만 가져오라고 말해둔 상태였다. 그래서 SPID 멤버들은 정말 펜션에 놀러 오는 듯한 기분으로 몬클 하우스에 찾아왔다.
“너네 내일은 스케줄 없어?”
“어어. 그런데 자고 갈지는 상황 봐서. 베개는 두고 갈 테니까 모노크롬 써. 집들이 선물이야.”
해랑의 질문에 하범이 대답했다.
모노크롬은 원래 비활동기였고, SPID도 지금은 일정에 여유가 있었다. 이미 모든 앨범 활동 준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윤규의 사고로 컴백이 미뤄진 것이었기에, 컴백 일정이 다시 나올 때까지 더 준비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앨범 활동이 미뤄졌다고 모든 스케줄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회복을 위해 잠시 공식적인 활동을 멈췄던 윤규도 슬슬 다시 활동을 시작한 참이다. 그래서 다른 아이돌의 컨텐츠에 출연한다는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다들 마당 있는 집이란 것이 인상적이었는지 모노크롬이 처음 이 집에 왔을 때처럼 마당 구경만 한참 했다.
윤규가 담장 너머로 빼꼼 주위를 둘러보더니 농담처럼 말했다.
“우리도 회사에 말해서 옆으로 이사 오자. 우리 이웃사촌 해요.”
“너희가 집 세울 때쯤이면 우린 나가고 없을걸?”
“흐음. 그럼 새집 말고 저거 빈 집 사면 되겠다.”
우형의 대답을 듣고 윤규가 한 곳을 가리켰다.
원래 몇십 년 전에는 동네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라, 조금 떨어진 곳에 드문드문 집이 남아 있긴 했다.
그러나 대부분 담장 주변에 잡초가 길게 자라 자연에 융화되어 있어서 언뜻 보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그것만 봐도 적어도 몇 년은 사람이 살지 않은 집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윤규는 아무 생각 없이 가리킨 것이었으나 이미 그곳에 눈독을 들인 사람이 있었다.
“거기 우리 이사님이 상황실 만들면 좋겠다고 찜해놓으셨어.”
한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이전에 주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몬클 하우스의 뒤편에도 작은 방 크기의 창고가 있었다. 그러나 협찬 가구를 들여놓으니 생각보다 공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주인은 다른 건물에까지 관심을 보였다.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으나, 비워진 지 오래된 집이라 집주인과 연락되면 저렴하게 임대할 수 있을 거라며 구체적인 계획을 말하는 모습을 보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소소한 부분에선 조심스러운데, 커다란 계획은 진행이 빠른 그녀였기에 더욱 진담처럼 들리기도 했다.
“너네 소속사 엄청나다…….”
여러모로 일반적이지 않은 기획사의 자금 운용 방식에 하범이 혀를 내둘렀다.
‘예전엔 되게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연습생 시절 절친이었던 해랑의 일엔 관심이 많은 하범이었다.
분명 작년 초까지만 해도 해랑이 속한 모노크롬의 소식은 대개 안 좋은 것들만 들려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아닌 업계인데 무소식이던 시기도 길었다.
그런데 최근엔 그야말로 ‘희소식’들이 줄줄이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에 막혀 있던 통로가 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SPID의 소속사인 에이펙트 엔터테인먼트에서도 가끔 뉴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이들이 오늘 집들이를 하러 온다고 회사에 전달했을 때도 그랬다.
[모노크롬 새집에 놀러 가도 돼요? 시간 되면 놀러 오래요.]
[그거 진짜 집 맞아?]
[그럼 가짜 집이겠어요?]
모노크롬이 집을 구한 게 그저 컨셉이다, 아니다 하면서 직원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던 모양이다. 촬영할 때만 빈집을 구한 척하고 사실 평소엔 다른 사람이 사는 집이 아니냐며.
업계 사람들도 설왕설래할 만큼 특이한 행보라는 증거였다.
그래서 놀러 가도 되냐, 안 되냐 물었더니.
[모노크롬…… 모노크롬이면 괜찮겠지.]
보통은 경쟁상대로 보기 마련인데 모노크롬과 뉴마는 어디서나 예외에 가까웠다.
특히 SPID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모노크롬에게는 신세를 졌고 팬들도 대부분 모노크롬에게는 장벽이 낮았기에 회사 사람들도 괜찮다고 판단한 듯했다.
덕분에 정말 ‘나 잠깐 친구 집 놀러 갔다 올게.’ 정도의 기분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몬클 하우스에는 웰컴 드링크가 있거든. 자, 골라.”
“우, 우와.”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실내로 들어오자 재민이 스페셜 콜라보 음료 냉장고를 소개했다. 안에는 자판기처럼 다양한 음료들이 종류별로 줄지어 서 있었다.
다양한 광고를 찍어본 SPID도 이런 PPL 방식은 처음 목격했다.
“아참. 고기 사 온 건 어디 넣어둬?”
“저기 바로전자 스마트 센서 에너지 1등급 저소음 슬림 냉장고에.”
“스마트 뭐, 저소음 냉장고……?”
문영이 말하자 해랑이 래퍼다운 정확한 딕션으로 제품명을 줄줄 읊었다.
자세히 보니 음료 냉장고 옆에 일반 냉장고가 두 대 있었는데, 하나의 문짝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거기에 해랑이 말한 냉장고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둘러보니까 주방에도 포스트잇이 붙은 가전들이 몇 개 더 있었다. 예를 들면 전기밥솥 같은…….
“이건 뭐야?”
“협찬 제품이라 이름 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붙여놨어.”
뭐지, 이 속세에서 벗어난 듯하면서도 자본주의로 점철된 주택은?
모노크롬은 이미 광고주 감사 컨셉에 완전히 잡아먹힌 상태였다.
이래서 제품 협찬이 이렇게 들어온 건가. 본받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몬클 하우스에 오신 걸 환영하고요. 미리 말했지만 온 김에 분량만 조금 뽑고 쉽시다.”
한이가 사회자처럼 상황을 정리하며 말했다.
놀러 온 김에 할 건 하고 쉬자, 왜냐하면 컨텐츠용 숙소니까! 라고 미리 설명해둔 상태였다.
“그럼 우리 뭐 하면 되는데?”
“밥, 해 줘.”
“뭐?”
뭔가 게임이라도 하려나 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제안이었다.
“우리끼리 밥 해 먹으니까 혀가 무뎌지는 것 같아.”
“남이 해 준 밥 먹고 싶어.”
재민과 준해가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삼시 세끼 해 먹는 것도 처음 몇 번은 나름대로 재밌었는데 이제 귀찮다고.
그런데 따뜻한 집밥은 먹고 싶다고 한다. 그러니까 놀러 온 사람에게 시키겠다는 취지였다.
“보통 집들이는 집주인이 대접해 주는 거 아니야?!”
“여긴 몬클 하우스니까 몬클 법을 따라야 한다.”
“아니, 뭐 이런.”
“밥 해 줄 사람이 필요해서 기쁘게 초대한 거냐고!”
그러나 모노크롬 멤버는 다섯 명, SPID 멤버는 세 명. 모노크롬이 밀어붙이면 인원부터 열세인 SPID 멤버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결국, SPID 멤버들은 떠밀려서 앞치마를 매야 했다.
***
“자, 어때. 내 미니 온실. 내가 직접 만들었어.”
몬클 하우스의 주방은 여덟 명이 다 들어갈 정도로 넓지 않았기에 요리를 그나마 하는 SPID 멤버 둘과 도와줄 사람들만 남기로 했다.
그리고 요리를 못하는 윤규는 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 마당으로 다시 나와 재민의 온실 자랑을 들어야 했다.
“이걸 네가 직접 만들었다고? 완전 파는 것 같은데.”
“응. 파는 걸 사서 내가 조립했어.”
재민의 미니 온실은 작은 집 모양으로 뼈대가 세워져 있고 투명한 비닐 같은 것으로 덮여있었다.
뼈대 마감이 깔끔한 것을 봐서는 공장에서 나온 조립 키트를 사서 만든 듯했다.
“이건 토마토, 여기 상추, 바질…….”
“바질로 요리할 줄 알아?”
“아니.”
재민은 키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지, 키워서 뭔가 해 먹을 생각은 없었다.
외국 요리 방송에서 항상 텃밭에서 바질을 따 오길래 따라 해 보고 싶어서 심어봤다고 한다.
“이거 봐. 상추는 벌써 새싹 났어.”
재민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흙 사이에 아주 미세하게 푸릇한 무언가가 보였다.
새끼손톱의 반 정도 되는 크기의 상추 새싹이었다.
“이거 뜯어서 저녁에 고기 싸 먹자.”
“무슨…… 그런 말을 해?!”
윤규의 농담에 재민은 잔인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먹을 수 있는 식물 위주로 씨앗을 구해 심었으나, 새싹이 나는 것을 지켜본 재민의 머릿속에서는 ‘먹을 것’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재민은 혹여라도 누가 정말로 뜯어먹을까 봐 상추 새싹 주위로 작은 흙벽을 쌓았다. 나름의 방어진이었다.
혼자 경계하는 재민과 달리 윤규는 숙인 허리를 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할머니 집 온 것 같아…….’
멍하니 흙과 풀을 보고 있으니 확실히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옆으로 이사 오고 싶다는 말도 완전히 빈말은 아니었다.
윤규는 흙을 토닥이는 재민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를 불렀다.
“있잖아.”
“아니, 상추 없어.”
상추가 있으니까 먹자는 말은 아니었는데.
윤규는 피식 웃고는 SPID 멤버에게도 털어놓지 않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무대에 올라가기 무서우면 어떡하면 좋을까?”
사실 이게 묻고 싶어서 오늘 이곳에 찾아온 것이기도 했다.
같은 메인 댄서에, 부상으로 여러 일을 겪어 본 사람이라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재민이 이번에 앨범 활동을 무사히 마치는 것을 보고 실제로 마음의 안정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재민에게 무례한 질문이 될까 봐 따로 연락해서 묻거나 하진 않았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묻고 싶었다.
“……역시 좀 이상한 질문인-.”
재민이 별말이 없는 것을 보고 역시 이런 질문은 부담스러운가 싶어서 말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재민은 윤규 옆으로 다가와 그를 번쩍 들었다.
“이렇게.”
그리고 몇 발자국 걷더니 마당 한구석에 작게 설치된 데크에 그를 내려놓았다.
재민이 무대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을 때 준해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올라가면 돼.”
재민이 웃는 얼굴로 말하자 윤규도 웃었다.
“물리적으로 무대에 올려달라는 소리가 아니고.”
“아냐. 이렇게 했는데 괜찮았어. 정작 올라가 보니까 안 무섭더라고, 나는.”
윤규는 재민이 발목 부상으로 인해 트라우마를 겪은 것까지는 몰랐다.
그러나 재민이 하는 말은 윤규가 무슨 걱정을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자신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이렇게 괜찮다. 그게 윤규에게 가장 위로와 안심이 되는 말이었다.
“……혹시 무서우면 멤버들한테 들어달라고 한번 부탁해 볼게.”
“무거우면 안 들어줄지도 모르니까 운동해.”
“너 요즘 왜 그렇게 살 빼는 데 집착해? 살도 안 찌면서.”
“난 건강한 돼지보다 건강한 재민이 되고 싶거든.”
무슨 소린지 모르겠으나 이런 느슨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고민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을 재민의 존재가 강력하게 지지해주고 있었다.
상추 주위에 흙벽을 다 쌓았는지 온실 문을 닫는 재민을 보며 윤규가 말했다.
“넌 진짜 멋있는 놈이야.”
팬들이 느끼는 게 이런 감정이라면 팬 입장이 되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