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화
“갑자기 그 생각은 왜 해 봤어?”
내가 음악대상 목표를 밝힌 지 한 달도 더 넘었는데.
물론 내 목표를 긍정적으로 봐 준다면야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다시 이야기를 꺼내는 타이밍이 조금 뜬금없었다.
내 질문에 한이는 뭔가 일이 있었는지 “음…….” 하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대답했다.
“그냥 좀 생각할 시간이 있어서요. 남들이 제 직업을 좀 더 인정해 줬으면 좋겠더라고요. 아무리 열심히 해도 결국 직업이 아이돌이라고 성과를 무시하니까.”
“무슨 일 있었어?”
“아니, 뭐, 주변에 있어요. 고집 엄청나게 세신 분.”
스케줄이 없던 주말에 뭔가 일이 있었다면 회사 사람이나 일로 만난 사람은 아닐 테고. 가족이나 친척이려나.
‘그러고 보면 한이 가족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네.’
우형과 재민의 가족은 직접 만나본 적이 있고, 해랑과 준해의 부모님에 관해서는 전해 듣기만 했다.
그러나 한이는 딱히 가족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저 아이돌 활동에 큰 관심이 없고, 그 점은 한이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태도가 바뀐 것을 보니 뭔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차가 찰수록 본인이나 가족들이나 생각이 많아지긴 하겠지.’
음악대상이란 목표가 꼭 내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돌에 대한 편견을 지닌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 그룹을 유지하려면 그런 대외적인 타이틀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뭔가 저도 도울 게 있을까-, 해서 말씀드린 거예요.”
“일단은 네 할 일을 열심히 하는 것부터.”
“그거야 당연하죠.”
음악대상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준다고 해도, 지금은 열심히 하는 것 외에 따로 부탁할 게 없었다.
경기에서 1위를 하려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하고, 시험에서 1등을 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모노크롬이 음악대상을 받으려면 모노크롬의 활동을 열심히 할 수밖에.
라솔도 말했지만 음악대상은 음반 판매량으로 줄 세우는 게 아니고 기준이 명확지 않았다. 아는 것이라고는 그해의 음악인으로서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한다는 것뿐.
‘아니면 내가 엄청난 석유 재벌이 되어서 음악대상을 주최하는 QBC를 매수하거나…….’
게임 시스템이 갑자기 폭주해서 내게 세상의 부를 몰아주지 않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현실적으로 다른 방법은 없다는 소리다.
“아니면 네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건의해도 좋고. 올해는 많은 일을 하고 싶거든.”
“흠. 생각해 볼게요.”
한이는 남몰래 같은 일을 모의하는 동료라도 된 것처럼 작게 “파이팅!” 하고 주먹을 쥐어 보이며 먼저 카페를 나갔다.
음악대상은 원래부터 모노크롬과 같이 이뤄야 하는 목표이긴 했는데, 이렇게 먼저 적극적으로 나오니 고마울 따름이다.
‘배우팀이랑 여러모로 의견이 안 맞는 것 같아서 기분이 안 좋았는데 괜찮아진 것 같아.’
회사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차라도 한잔 마시러 나온 건데, 다른 곳에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
내 목표 때문에 멤버들이 무리하게 되는 게 아닌지 항상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이 남아 있었는데.
이 목표가 꼭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내게 원동력을 더해줬다.
***
2월은 새 학기, 새봄…… 여러 가지 새 시작을 준비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때, 모노크롬에게도 빼놓을 수 없는 이벤트가 하나 있었다.
‘이것도 새 시작이라고 쳐야 하나? 시작보다는 마지막이란 이미지가 강하긴 한데.’
준해의 대학교 졸업식.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대학 생활의 끝이지만 대졸 사회인으로서의 새 시작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보통은 졸업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를 시작하겠지만.
‘준해는 고등학생 때부터 아이돌이었고 지금도 아이돌이고 앞으로도 아이돌일 예정이라 해당 사항 없고.’
보통 졸업식이란 가족, 친척, 친구나 선후배들과 축하하기 마련인데, 아이돌 준해는 졸업식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컬러즈에게 무수한 졸업 축하 메시지를 받았다.
준해의 졸업식은 공식 스케줄이 아니라 따로 공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단군대 홈페이지에 학사 일정이 전부 나와 있었기 때문에 컬러즈는 당연하게 졸업식 일정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특히, 컬러즈가 오늘 졸업식에 기대하는 것이 따로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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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해 오늘 학사모 쓰는 날이구나
벌써부터 기대된다 내 동생 졸업식도 이렇게 흥미롭지 않았는데
└단군대 졸업가운 사진 봤는데 이쁘더라 헠
└오늘 준해 예상도 (이미지)
└ㅋㅋㅋㅋㅋㅋㅋㅋㄱㅇㅇ
└아니 졸업식 시작도 안 했는데 울 갱얼지 사진 벌써 돌아다니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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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겐 오늘이 멤버의 특별한 코스튬을 볼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이걸 코스튬이라고 치는 것도 좀 웃기긴 한데.’
살면서 한두 번 입을까 말까 한 복장이니까 기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우리도 아이돌 기획사로서 다양한 의상을 시도하지만 이건 우리가 보여줄 수 없는 의상이기도 하고.
그리고 어디서 구해왔는지 컬러즈는 학사모를 쓴 강아지 사진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나도 가끔 멤버들의 행동이 소동물처럼 보일 때가 있긴 했는데, 이들의 강아지 필터는 무엇보다 강력했다.
그리고 막내의 졸업이란 사실 자체로 감회에 젖은 컬러즈들도 많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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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막내 대학 입학한 것도 엊그제같은데 언제 이렇게 컸지ㅠㅠ
└고등학교 졸업이 아니라 대학교 졸업이라니 진짜 세기의 미스테리
└몬클이들도 딱 이대로 생각하고 있을 것 같음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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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준해가 벌써 졸업이라니. 아직도 고등학생 같은데.”
컬러즈의 예상은 멋지게 적중했다. 컬러즈가 예상한 대사를 우형이 그대로 내뱉었다.
“누가 들으면 네가 키운 줄 알겠어.”
“연습생 때부터 생각해 보면…… 저도 준해 성장에 지분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요?”
“키운 거 인정받아서 효도라도 시키게?”
“그러면 좋죠.”
연습생 시절부터 리더 역할을 맡아왔던 우형 입장에서는 항상 챙겨야 할 동생이었을 테니, 직접 키운 기분이 들기도 하려나.
“그런데 준해는 고등학생 때랑 크게 달라진 게 없어서 나이 먹은 게 더 실감 안 나지.”
“그건 그래.”
해랑의 말에 멤버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컬러즈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준해는 특히 과거 사진과 현재 사진을 나란히 두면 언제 적인지 구별이 잘 안 된다고.
‘컬러즈는 진짜 어린이 시절 준해 사진을 보고도 지금과 똑같다고 하지만…….’
그건 그냥 주접이고 실제로 똑같아 보일 리는 없다. 그러나 데뷔 후 사진은 정말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듯하다.
……내 플레이 탓에 스타일링이 내내 똑같았던 것도 한몫한 것 같지만.
그래도 해랑 같은 경우는 스타일링의 변화를 제외하고도 데뷔 초와 지금 인상이 조금 다르지 않은가.
컬러즈도 멤버들의 데뷔 초 사진을 보면 지금보다 어린 티가 나서 ‘애기’라는 단어를 붙여 부르곤 하는데 준해는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항시 아기였다.
“사실 난 준해 고등학교 교복 입은 걸 더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이것도 아직 고등학생 같다는 말인 줄 알고 ‘그게 대체 몇 년 전…….’이라고 말하려다가, 말한 사람이 재민이란 것을 깨닫고 다시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준해와 지내던 그는 몇 년 멤버들과 떨어져 있다가 대학교 졸업반이 된 준해와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재민이는 다른 멤버들보다 고등학생 시절 준해를 더 뚜렷이 기억하는 것도 당연하네…….’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예상치 못하게 업보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최근엔 업보를 크게 느낄 일이 없어서 방심하고 있었어.
다행히도 한이가 곧바로 분위기를 풀며 농담처럼 말했다.
“이제 시험공부 할 때 잠 깨겠다고 웃긴 짓 하는 거 구경 못 하겠다.”
“넌 동생을 무슨 구경거리로 알아.”
“형도 그때 웃긴다고 핸드폰으로 동영상 찍어놓고는!”
“……졸업 기념으로 공식 계정에 하나 풀어볼까-.”
우형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자신의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저러다 또 준해한테 멱살 잡혀서 짤짤 털리지. 올린다면 굳이 말리지는 않겠다마는.
오늘 공식 계정에 풀어야 할 것은 숙소에서 앞구르기를 하는 준해가 아니었다.
“웃긴 짓 말고, 학사모 구경하러 가자.”
시간을 보니 슬슬 출발할 때가 되었다. 멤버들도 오늘 준해의 졸업식에 잠깐 들르기로 했다.
준해가 초대한 게 먼저인지, 멤버들이 가겠다고 선포한 게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다 같이 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같은 팀의 멤버가 졸업한다고 다른 멤버들까지 총출동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 멤버들이 워낙 가족처럼 지내와서인지 당연하게 단체로 가게 되었다.
‘절친이 축하하러 가기도 하는데 멤버들이 못 갈 이유는 없지.’
사람들이 몰린 곳에 멤버들이 단체로 방문할 예정이니 매니저가 필요했고, 기왕 가는 김에 사진을 좀 더 예쁘게 찍어줄 스태프도 데려가고.
그렇게 챙기다 보니 가벼운 스케줄을 소화하러 이동하는 듯한 인원이 완성되었다.
먼저 학교로 출발한 준해에게도 매니저가 한 명 붙어 있었다. 오늘은 준해뿐만 아니라 모든 졸업생이 주인공인데 혹시나 주변이 혼잡해지면 상황을 정리해줄 사람이 필요하니까.
준해의 부모님은 졸업식 시간에 맞춰 학교로 오신다고 하고, 멤버들은 그 사이에 얼굴만 비치고 올 예정이다.
가는 길에 예약한 꽃다발도 찾아오고, 단군대 주차장 구석에 차를 대고 잠시 대기하니 준해와 함께 있는 매니저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당 나와서 산학협력관 앞에 있다는데?”
“아! 거기, 신셋 뮤비 찍었던 데요.”
멤버들도 신셋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할 때 단군대 캠퍼스를 돌아다닌 기억이 있어서 다행히 헤매지 않고 바로 준해를 찾을 수 있었다.
원래 학생들의 왕래가 잦지 않은 곳이어서 준해가 촬영 장소로 추천했던 곳이었다.
신셋 뮤직비디오로 괜찮은 촬영 스폿이 알려져서인지 주변에는 부모님을 데리고 이쪽까지 찾아와 사진을 찍는 졸업생들도 몇몇 있었다.
“졸업 축하한다!”
“뭐야, 이 꽃다발?!”
“우리의 마음을 합친 거야.”
멤버들이 준해에게 거대한 꽃다발을 건넸다.
멤버들 넷에 회사에서 보내는 것까지 꽃다발 다섯 개를 챙길까 하다가, 들고 다니기 힘들 것 같아서 풍성한 꽃다발 하나로 대신했다.
이것저것 욕심을 내다 보니 커다란 꽃바구니만큼이나 커져서, 꽃다발을 품에 든 준해가 꽃에 파묻힌 것처럼 보였다.
“동기나 선후배들이랑은 인사 다 했어?”
“네. 그리고 학교 홍보팀 인터뷰도 있어서 다 하고 나서 연락드린 거예요.”
“부모님은?”
“저기 옆에…….”
준해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준해의 부모님과 여동생이 조금 떨어진 곳 벤치에 앉아 있었다.
홍보팀 인터뷰가 있었다더니 잠시 자리를 피한 모양이었다.
‘조, 조금 눈치 보인다.’
부모님, 특히 아버님이 아들의 아이돌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신다고 했는데. 멤버들이 우르르 온 것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실지 예상하기가 두려웠다.
그건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빠르게 기념사진을 찍자며 모여들어 구도를 잡았다.
“헹가래 하자!”
“아니, 그거 위험하니까 하지 마.”
“그러면 이렇게 네 명이 나란히 서서 준해를 들고…….”
“그냥 평범하게 찍으면 안 돼?”
결국 멤버들은 평범한 사진을 몇 장 찍고는 마지막에는 정말 준해를 들고 찍었다. 좋은 카메라를 들고 나온 김에 준해의 개인샷도 찍고.
준해가 인사 메시지를 모노크롬 단체방에 올려주면 오늘 찍은 사진과 함께 공식 계정에 올려주기로 했다.
“사진은 회사 가면 정리해서 바로 너한테 보내줄게. 네가 부모님한테도 전달해 드려.”
“진짜 바로 가시게요?”
멤버들을 이끌고 온 지 얼마 안 돼서 다시 돌아가려는 기미를 보이자 준해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도 아쉽지만 오늘은 가족들과 축하하는 게 더 맞지. 우리가 너무 오래 있으면 준해의 부모님은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
봄이 다가온다고는 해도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 외부 벤치에 앉아 계신 부모님이 더 신경 쓰였다.
준해는 기껏 멤버들이 총출동했는데 얼마 안 있다 가는 것이 미안한지 눈썹이 조금 내려갔다.
“온 김에 구경이라도 좀 더 하지. 저번처럼 시험 기간도 아니고 사람도 많이 없는데.”
“어차피 잠깐 얼굴 보려고 온 거니까. 우리도 잠깐 나온 거라 연습용 옷 그대로 입고 나왔어.”
“나머지 축하 파티는 나중에 해.”
우형이 외투 안쪽을 보여주며 ‘잠깐 들른 것뿐’이라며 그를 안심시키고, 해랑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느라 조금 비뚤어진 학사모를 고쳐 쓰는 준해의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
우리는 부모님이 기다리시겠다며 준해의 등을 떠밀었다.
그를 보내놓고 우리도 다시 회사로 복귀하려는데, 가족이 있는 곳까지 갔던 준해가 다시 이쪽으로 뛰어왔다.
무슨 이유에선지 조금 웃음을 참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