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화
한번 시작된 기 싸움이 금방 사그라들 리는 없었다. 결국 식사 자리는 냉한 분위기로 끝나 버렸다.
한이는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라왔다. 분명 숙소보다 넓은 집인데 훨씬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침대에 기대앉아 스마트폰을 만지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형이었다.
외모도 성격도 어머니를 닮은 형을 보면, 반대로 자신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유한이.”
“왜.”
무뚝뚝한 얼굴로 대답하자 형은 미소 지으며 침대 발치에 걸터앉았다.
“사인 한 장만 해 줘라. 지수 친구가 네 팬이래.”
“형수님한테 점수 따려고 동생을 팔아먹으시겠다?”
지수는 형과 결혼을 준비하는 여자친구의 이름이었다.
부모님은 한이가 아이돌로 활동하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젊은 나이인 형과 그의 여자친구는 그나마 이해하는 편이었다.
한이도 그걸 알아서 방금 아버지와 언쟁할 때보다는 유순한 말투가 되었다.
“사인을 받고 싶으면 앨범이라도 사 오는 정성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챙길 정신이 없었어.”
“있기는 하고?”
“지수가, 꼭 사 오더라고.”
그럼 형은 안 샀냐고 대꾸하려다가, 한이 또한 가족에게 줄 앨범을 따로 챙기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앨범도 사줬다는데 거절할 정도로 냉정하지는 않았다. 한이는 책상에서 종이를 하나 찾아 사인을 하고, 그 아래에 감사하고 행복하시라는 멘트도 충실히 적었다.
“아버지 앞에서 부탁하지 그랬어. 나 요즘 인기 있다고 자랑하게.”
형은 대답 대신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아, 머리 쓰다듬지 마세요. 회사에서 관리해주는 귀한 머리거든요?”
동생의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형은 피식 웃었다. 그나마 예전보단 까칠한 성격이 많이 나아진 한이였다.
“아버지한테 좀 고분고분 굴어. 그만큼 너한테 거신 기대가 컸으니까 상심이 더 크신 거지.”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게 있잖아.”
형에게는 강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음악가 집안에서 자라온 두 사람은 부모님의 전공을 따라 음악을 배워왔다. 애초에 진로 선택 범위가 좁았던 것은 형도 같은 상황이었다.
다만 형은 어머니를 따라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에 만족했고, 한이는 다른 진로에 끌렸다는 점이 달랐다.
“솔직히 나도 네가 언제까지 그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방금 아버지와 비슷한 이야기로 말다툼을 벌이고 온지라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였으나 이것은 정말 현실적이고 객관적인 이야기였다.
아이돌 그룹의 수명은 평균적으로 짧다. 오래 이어나가는 선례가 없지는 않지만, 많지도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한이 또한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지는 않았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완전히 설득하지 못하고 그냥 고집이 세서 잔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아들 포지션을 유지했다.
“만일…… 네가 그럴 마음이 있으면 다시 성악 공부하러 돌아와도 늦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 됐어. 아버지가 신경 쓰이면 효자인 형이 성악 하든가.”
“그럼 피아노는 누가 치냐.”
“누가 치긴……. 누구든 치겠지.”
어린 시절의 한이는 사실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변성기가 오기 전까지는 주로 악기를 배웠고,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기에 막연히 자신은 피아니스트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성악가의 대를 꼭 잇고 싶어 했다. 한 명은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결국 한이는 형의 재능에 밀렸다. 비교당해 밀려나는 것을 못 참는 성격은 아마 이때가 원인이었으리라고, 한이는 생각했다.
***
결국 한이는 가방을 들고 불퉁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후식을 먹으며 아버지와 또 한바탕 언쟁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본가에 온 김에 하룻밤 정도는 자고 가도 됐지만,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하루 더 있다가는 말다툼이 최소 두 번은 더 일어날 듯했다.
마당으로 나오니 테라스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견부터 대를 이어 이 집에서 키우고 있는 강아지, 맥스였다. 한이는 할아버지견의 이름을 따 장난처럼 순복이 3세라고 부르기도 했다.
겨울의 찬바람을 피해 테라스 한구석의 선룸에 있던 맥스는 한이가 나오는 것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반겨주는 건 너밖에 없다.”
오랜만에 와도 한이를 기억해주는 정 많고 똑똑한 강아지였다.
너무 얼굴을 안 비쳤다가는 이런 똑똑한 강아지도 자신을 잊는 게 아닐까. 본가에 오는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었다.
“아참. 형한테 마당 있는 집 생겼거든. 여기 있지 말고 나랑 같이 갈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맥스는 꼬리만 흔들었다. 한이는 그저 해맑기만 한 맥스의 얼굴을 보다가 그 몸통에 팔을 둘러 들어 올렸다.
“읏차. 한 20kg 하겠네. 이 정도면 들고 갈 수…….”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니 팔로 들어 무게를 측정하는 기술이 생겼다.
정말로 들고 갈 건 아니었지만 잠깐 놀아줄 겸 맥스를 번쩍 들고 걷던 한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 깜짝이야!”
어쩐지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진다 싶더니, 아버지가 창문 안쪽에서 흉흉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 집 안까지 목소리는 안 들렸겠지만 강아지를 들고 가려는 행동이 다 보였을 것이다.
허튼짓하지 말라는 신호인 듯해서 바로 맥스를 땅에 내려놓았다.
“갑니다, 가요. 맥스도 추우니까 들어가.”
추우니까 들어가라고 했으나 맥스는 한이가 대문을 닫을 때까지도 바로 앞까지 나와서 배웅했다.
시간은 많이 지났지만 아이돌 지망생이 되기 전, 이 집에서 등교하며 대문을 나서던 때 항상 봐 왔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변함없는 풍경 속에 있는 가족들도 언제까지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속이 답답해졌다.
***
“그럼 더 알려드릴 사항이 있으면…… 메일로 드릴까요?”
“……편하신 대로 제가 바로 볼 수 있게만 전달해 주세요. 저도 꼭 확인해야 하는 일이니까.”
배우팀의 권진헌 기획실장이 서글서글하게 웃었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 사람은 내가 ‘웬만한 일은 메일로, 급한 게 아니면 최 비서를 통해 연락하라’고 했던 걸 떠올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회사 내부 업무라면 얼굴 볼 일 없이 메일로 받아서 적당히 처리하고 싶지만…….’
멤버의 스케줄과 관련된 일이라면 상황이 달랐다.
이번 작품을 촬영하는 동안은 배우팀이 한이의 매니지먼트를 온전히 맡게 되었다. 그 때문에 권 실장이 아티스트팀과의 조율을 위해 이사실로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카메오 촬영이야 처음에 배우팀으로 연락이 오긴 했어도 ‘아이돌 한이’의 특별 출연이었기에 별로 도움받을 일이 없었다.
웹드라마는 뉴마 소속 배우인 도아가 함께 촬영하였으므로, 여러모로 같이 일정을 잡고 움직이는 게 편하고 합리적이어서 배우팀에게 많은 일을 맡겼다.
그런데 이번엔 한이의 단독 스케줄. 한이가 속한 모노크롬은 전적으로 아티스트팀이 맡고 있지만 배우 활동은 달랐다.
‘나야 아티스트 매니지먼트 일은 이제 익숙해졌지만 연기 활동은 어떻게 서포트해 줘야 하는지 잘 모르니까…….’
경험이 많은 배우팀에 맡기는 것이 낫다는 점은 나도 동의했다.
그런데 이걸 하필 배우기획실의 권 실장이 최종으로 내게 확인받으러 왔다는 게 찝찝한 현실이었다.
‘하필이면 아이돌 배우를 탐내던 사람이, 회사 첫 아이돌 배우인 한이의 일로!’
객관적으로 이게 맞는 선택이라는 건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쩐지 지는 기분이었다.
이사실을 나서는 권 실장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어린 듯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인가.
“……최 비서도 배우 쪽 일은 잘 모른댔지?”
본인의 자리로 돌아가는 권 실장의 뒷모습을 보며 괜히 아쉬운 마음에 최 비서에게 한번 물어봤다.
“네. 대표님도 아티스트 업무를 맡으셨고 전 대표님을 보조하는 역할이었다 보니…….”
“……그렇지.”
그건 나도 잘 알지. 마이 엔터는 연예인 기획사가 아니라 아이돌 기획사 대표가 되어보자는 게임이었고, 플레이어였던 나도 그 컨셉대로 아이돌만 관리했으니까.
그런데 현실화하면서 배우팀은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건지 모르겠다.
뉴레인이 분리되어 나간 지금, 배우팀이 있는 덕분에 회사가 자금에 허덕이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배우팀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괜한 불안감도 같이 커졌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하나……. 한이를 좀 빼앗기는 기분이야.’
한이의 스케줄에서 모노크롬의 일정은 뺄 수 있어도 드라마 촬영 일정은 뺄 수 없다.
그룹 일정보다 배우로서의 일정을 우선해야 하는 상황이라 더욱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그런데도 드라마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을 때 적극적으로 잡은 이유가 있었다.
한이 개인의 커리어를 위해서이기도 하고, 마이 엔터에 멤버의 능력치로 연기 레벨이 표시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능력치는 다양할 텐데 광고나 요리 레벨은 안 뜨고 연기나 예능 레벨은 뜬단 말이지.’
보컬이나 랩처럼 아이돌에게 필요한 능력치만 표시되는 와중에 나타난 연기 레벨.
한마디로 시스템은 연기 활동을 해도 아이돌 활동의 일부로 본다는 것이었다.
이게 음악대상을 향한 유일한 지침이라고 생각하니, 캐스팅 제의가 왔을 때 가수 활동에만 치중하겠다고 거절할 수 없었다.
‘으. 어렵다…….’
권 실장과 대화하느라 기가 빨려서 심신이 안정되는 따뜻한 차라도 마시려고 카페로 내려왔는데, 마침 그 한이와 마주쳤다.
“흐아아암. 안녕하세요.”
“주말에 안 쉬었어?”
하품하며 나타나는 걸 보니 커피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주말이 끝나고 출근한 건데 잠을 많이 못 잔 얼굴이었다.
“이걸 쉬었다고 해야 하나, 일했다고 해야 하나. 공부 삼아서 같이 출연하는 배우님들 전작을 몇 개 몰아 봤는데 드라마도 있어서 띄엄띄엄 봐도 분량이 꽤 되더라고요.”
“공부하는 건 좋은데 촬영 전까지 컨디션 잘 관리해.”
“괜찮아요. 전 지금 건강한 돼지라 이 정도 촬영 일정은 좀 무리해도 문제없습니다.”
한이는 피곤해 보이던 표정을 지우고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건강한 돼지……. 잘 먹고 잘 운동하며 잘 관리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지금 잡혀 있는 한이의 드라마 촬영 일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다른 배우의 촬영 일정에 맞추느라 좀 들쭉날쭉할 뿐.
이번에 한이가 찍게 된 드라마는 타임슬립 소재가 들어간 스릴러물. 등장인물의 청년역인 한이는 과거 장면에만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드라마 찍는 동안 다른 팀이랑 일하잖아. 혹시 누가 이상한 소리 하면 바로 나한테 말해.”
“혼내주시게요?”
“응.”
그룹과 개인이 따로 움직이다가 우리도 모르게 얘기가 진행되어서 사람을 빼앗긴 적이 있지 않던가. 바로 작년 초에.
한이도 아마 그때 기억을 떠올렸는지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장난스레 웃었다.
“그쵸. 제가 막 탐나는 인재고 그렇죠? 감독님이 보고 할리우드 같이 가자고 하면 곤란한데.”
“……할리우드 정도면 한번 같이 생각해 보자.”
그의 맥 빠지게 만드는 대화 기술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푸는 데도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내가 시킨 차보다 한이가 시킨 커피가 빨리 나왔다. 인사하고 먼저 나가려나 했는데 한이는 다시 내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음악대상 말이에요.”
드라마 촬영 얘기를 하다가 웬 음악대상 얘기?
화제가 갑자기 바뀌어서 의아한 눈으로 한이를 봤는데, 그는 아까보다는 조금 더 진지한 얼굴이었다.
“제가 주말에 좀 생각해 봤는데, 참 괜찮은 목표 같아요. 음악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