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밸런타인데이 다음 날이 생일이란 것을 알았을 땐 참 한이답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멜로 눈빛이 강력한 그인데 생일까지 로맨틱한 날에 붙어 있다니.
컬러즈에게는 한이가 바로 밸런타인이었고 밸런타인데이란 그저 한이의 생일 전날이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겐 달랐다. 2월 15일은 그저 밸런타인데이 다음 날일 뿐이었다.
많은 이가 기념하는 날이 끝나고 나서야 자신의 생일이 온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이는 데뷔 초 뷰이라이브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조금만 일찍 태어날 걸 그랬다. 그쵸? 좋은 날에 생일이면 덩달아 좋잖아요. 이상하게 난 뭔가 하나씩 어긋나는 것 같아.]
그 말에 컬러즈는 14일 정오부터 15일 정오까지, 한국과 12시간 차이 나는 브라질 시간으로 밸런타인데이를 보내기 시작했다.
결론은, 한이의 생일은 모노크롬과 컬러즈에겐 밸런타인데이란 뜻이다.
‘그러면 당연히 이걸 해야지.’
생일 기념 초콜릿 만들기!
누구나 떠올릴 수 있을 만한 뻔한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당연히 한 번쯤 해 봤으리라고 생각해서 넘기려고 했건만, 과거 뉴마에게 ‘당연’이란 없었다.
두 기념일을 한 번에 같이 챙기는 게 옳은 일일까? 하는 고민에 밸런타인 기획과 생일 기획을 따로 할 생각도 해 봤으나, 그렇게 하면 멤버들의 일이 두 배로 늘어난다.
그리고 한이가 단것을 좋아해서 더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럼 만든 건 제 선물이니까 제가 다 먹어도 되는 건가요?]
라며 한이가 좋아하기에 뻔한 기획이라도 그냥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또 주방으로 찾아왔다. 우형의 떡국 요리부터 시작해서 광고 촬영에 오늘까지. 이상하게 올해 들어 멤버들이 주방 앞에 설 일이 많아졌다.
본격적인 새 숙소 리얼리티가 시작되면 아마 또 직접 요리할 일이 생길 텐데.
‘이러다가 요리 레벨…… 아니, 정신 차리자.’
여기가 지금 현실인데도 오히려 점점 게임에 과몰입하는 것 같아. 방심하면 자꾸 이렇게 게임 뇌가 되고 만다.
아무튼, 오늘 멤버들은 바리스타 의상이 아니라 사복 느낌의 편안한 의상이었다.
앞치마도 허리에 두르는 것과 어깨에 매는 것은 이미지가 많이 다른 법. 이번엔 어깨에 매는 앞치마로 다섯 개 준비해뒀다.
앞치마를 매는 모습도 포인트라고 해서 촬영 시작하면 입으라고 조리대 위에 올려만 뒀다.
“오. 단 냄새 난다.”
“여기 직원분이 미리 케이크 시트 구워주셨거든.”
오늘의 주인공인 한이가 마이크를 차면서 숨을 들이마셨다.
오늘은 초콜릿뿐만 아니라 다양한 디저트를 같이 만들 예정이다.
여러 베이킹 도구가 필요해서 베이킹 교실을 겸하는 쿠킹 스튜디오를 빌렸는데, 덕분에 직접 구운 케이크 시트를 얻을 수 있었다.
오븐 안의 공기가 순환되면서 공간 전체에 달콤한 빵 냄새가 퍼져 한층 분위기가 포근해졌다.
그래서 한이는 더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마이크 장착을 완료한 한이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옆에 있던 준해와 대화를 나눴다.
“빵 냄새 향수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냐? 누가 개발해 줬으면 좋겠다.”
“계속 빵 냄새 맡으면 배고파지지 않을까?”
“후각이 은근히 뇌를 잘 속인다잖아. 샐러드를 먹으면서도 빵 냄새를 맡으면 빵 먹는 기분을 낼 수 있는 거지.”
“자린고비야?”
거의 1년 내내 체중을 관리해야 하는 아이돌이 할 만한 슬픈 대화였다. 온갖 베이킹 재료들이 모여 있는 이 공간과 안 어울리는 대화이기도 했다.
지금은 비활동기니까 활동기보다는 식단 관리가 느슨하기 마련. 이참에 당분간 안 먹어도 될 만큼 질리도록 먹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스태프들이 카메라나 조명 등을 점검하는 동안 화제는 빵에서 한이의 생일로 넘어갔다.
“너는 생일도 있어서 옛날부터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 많이 받았을 것 같아.”
“그러네요. 그냥 초콜릿으로 선물 퉁치기 좋으니까.”
“그건 좀 안 좋았겠다.”
“아뇨. 이상한 거 받을 바에 차라리 그게 나았어요. 그리고 다른 애들은 그냥 안 챙기는 경우도 많은데 전 초콜릿이라도 받았거든요.”
본인이 초콜릿을 좋아하니 모두가 행복한 결말이었다.
‘꼭 생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여학생들한테도 많이 받았겠지?’
그 멜로 눈빛이 몇 년 사이에 갑자기 생겨난 건 아닐 테고. 어릴 때부터 발동했을 것 같단 말이지.
한이 말고도 다들 많이 받지 않았을까? 해랑처럼 남학교를 나온 멤버도 있지만…… 교문 앞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받을 정도인데 눈에 안 띄었을 리는 없고.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학창시절을 보냈을 멤버들을 상상해보면 왠지 신기했다.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촬영 세팅도 완료되어서 멤버들은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예정대로 카메라가 켜진 후에 앞치마를 착용하고, 나란히 서서 준비된 재료들을 눈으로 훑었다.
생일용 케이크 시트는 하나가 아니라 각자 꾸밀 수 있도록 작은 사이즈로 다섯 개가 준비되었다.
“재밌겠다!”
“케이크가 다섯 개라는 건, 저도 만드는 건가요?”
의욕 넘치는 재민 옆에서 한이가 스태프에게 물었다.
“그냥 가만히 있으려고?”
“나는 뭐, 심사 같은 거 하는 줄 알았지.”
“우리가 만든 건 네가 먹고, 네가 만든 건 우리가 먹을게.”
해랑의 말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는지 한이는 바로 “오케이.” 하며 수긍했다.
케이크 재료로는 다양한 모양의 짤주머니와 레터링을 할 수 있는 크림 등이 준비되어 있었다.
‘요리보다는 미술 교실 같네.’
멤버들의 데코레이션 실력은 그림 실력과 비슷했다.
우형은 직원분의 도움을 받아 크림을 꽃처럼 짜는 방법을 배워서 꼼꼼하게 꾸며나갔고, 해랑은 색색 크림을 물감처럼 발라 감각 있는 케이크를 완성해냈다. 색상 조합이 막방 기념용 케이크와 비슷했다.
준해는 조금 꾸미다가 생각만큼 잘 안 되었는지 아예 레터링용 크림으로 편지처럼 글씨를 줄줄 적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고른 크림이 새빨간 색이어서 무서워졌지만.
‘그리고 한이랑 재민이는…… 역시 예능 투톱이야.’
한이는 자기가 먹고 싶은 데코용 과자를 전부 가져와 젠가 하듯이 쌓았고, 재민은 이번에도 모든 재료를 사용하는 게 목적인지 재료의 무덤을 만들어냈다.
그나마 케이크는 기본 틀이 있어서 케이크의 형태를 벗어나지는 않았는데, 초콜릿은 우리가 알고 있던 초콜릿의 상식을 뛰어넘는 작품들이 나왔다.
귀여운 몰드들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다들 거기엔 눈길도 주지 않고 한이를 그려주겠다며 쿠키와 초콜릿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초콜릿 복근이다.”
“내가 너 그거 만들 줄 알았다.”
재민이 초콜릿 펜으로 복근을 그리자 예상했던 그대로였는지 우형이 웃었다.
재민은 식스팩이 아니라 트웰브팩이 되어버린 초콜릿을 냉장고에 넣어 굳혀오더니 유산지 위에서 조심히 떼어냈다.
“그리고 이걸?”
“이걸?”
“케이크에 꽂으면?”
“대박이다.”
준해는 재민의 케이크가 점점 더 괴이해지는 과정을 바로 옆에서 직관했다.
요리보다는 공예에 가까웠던 과정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각자가 만든 결과물들을 모아서 진열해보니 같은 재료로 만든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제각각이었다.
마지막에는 케이크를 하나만 골라서 다 같이 나눠먹기로 했는데 한이는 먹으면 저주받을 것처럼 생긴 재민의 케이크를 골랐다.
“생긴 건 이래도 맛은 좋을 것 같다.”라는 이유였는데, 사실은 빨리 먹어서 없애버리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완성품은 카메라로 인서트 샷을 찍었지만 촬영이 끝난 후 우형은 따로 본인의 스마트폰으로 자신이 만든 케이크 사진을 찍었다.
나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인 그에게 다가갔다.
“전에 취미 만들고 싶다고 했잖아. 베이킹을 한번 배워볼래?”
비활동기를 맞이해서 컨텐츠 소재도 얻을 겸 하고 싶은 게 있냐고 멤버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다들 취미를 만들까 하길래 우형에게 요리를 배우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슬픈 눈으로 날 쳐다봤던 기억이 있다.
베이킹은 다른 요리보다 레시피를 충실히 따라야 하니까 맛이 이상해질 확률도 낮을 테고, 미각보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우형에게는 그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제가 베이킹 하면 한이가 살찔 것 같은데…….”
“만들면 내가 먹는 거 확정이냐고.”
자연스럽게 자기를 엮어서 언급하자 한이가 황당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먹지 않겠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보통 운동할 땐 단백질 위주의 식단을 유지하던데, 베이킹으로 만드는 것들은 탄수화물과 지방 위주의 음식이었다. 다이어터에겐 천적과도 같았다.
“그럼 해랑이한테 운동시키라고 하자.”
“저를 건강한 돼지로 사육하실 생각이신가요?”
해랑이 자신의 이름이 들렸는지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이는 그 시선을 피하려는 듯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만든 완성품들은 포장하기 위해 놔두고 스태프들이 나머지 남은 재료들을 치우고 있는데 재민이 스튜디오를 빙 둘러보더니 내게 다가왔다.
“주인 님, 여기 몇 시까지 예약이에요?”
“응? 한두 시간쯤 남았을걸. 왜?”
“단것 많이 먹으니까 짠 거 먹고 싶은데 라면 하나만 끓여 먹고 가면 안 돼요?”
입 안에 남은 단맛은 아메리카노 정도로는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말했던 용도와 다른 취사도 가능한지 직원에게 물어보니 허락을 넘어 아예 구비된 라면까지 꺼내줬다. 쿠킹 클래스를 하는 곳이라 그런지 뭐든 다 있구나.
“단짠단짠 조합 미쳤다.”
단것을 좋아하는 한이도 단것만 먹어서는 뭔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그렇게 멤버들은 다시 주방 안으로 들어가 먹부림 2차전을 마음껏 즐겼다.
***
한이는 오랜만에 본가로 찾아왔다. 명절이나 휴일엔 본가에 오기 싫어서 대신 할머니 댁으로 가곤 했기에 더욱 이곳이 오랜만이었다.
집으로 찾아오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이 있었다. 형은 이미 독립했지만 아마 세 사람은 종종 이렇게 이 집에 모여 식사를 했을 것이다.
한이가 소외된 것은 아니고, 한이가 집에서 연락이 올 때마다 바쁘다며 거절했다. 통화 너머로 잔소리를 들었으나 직접 와서 듣는 잔소리보다는 훨씬 간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한이의 생일을 축하하자는 자리여서 빠질 수가 없었다.
조용히 식사가 시작되고, 아버지가 탐탁지 않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고집부리더니. 배우로 전향할 생각이냐?”
그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었다. 한이는 이번에 새로 드라마 촬영에 들어가게 되어서 생일 직전에 캐스팅 기사가 난 참이었다.
이번엔 주인공은 아니고, 주요 인물의 청년 역이었다. 팬들은 겹경사라며 파티를 벌였는데 같은 소식을 이렇게 건조하게 들을 줄은.
최근엔 가수로서 성과를 더 많이 냈는데 가수 활동에 관한 것은 일언반구도 없고 이제 조금 나온 배우 활동 소식부터 꺼내니 기가 찼다.
“성에는 안 찬다만 하겠다면 차라리 배우가 낫겠구나.”
“왜 전향한다고 생각하세요? 요새 아이돌이 얼마나 연기를 많이 하는데요.”
“쯧. 뭘 하든 아이돌, 아이돌 꼬리표가 붙을 거다.”
“아이돌, 아이돌 해 주면 전 듣기 좋은데 왜요?”
“한이야.”
한이가 퉁명하게 대답하자 어머니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곤조곤한 목소리였으나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오랜만에 모인 식사 자리에서 꼭 그렇게 대꾸해야겠니.”
“아니, 아버지가 먼저 제 직업으로 뭐라 하시니까.”
항상 대화가 이런 식으로 흘러서 가족들과의 식사 자리를 피해왔던 건데.
뭐라고 말하든 먹힐 것 같지가 않아서 한이는 크게 숨을 내쉬고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이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 관심 받으려고 아등바등 노래하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내가 어딜 가도 사람들 볼 낯이 없어.”
“대중가요가 그렇게 싫으시면 아버지 좋아하는 트로트도 듣지 마시든가요.”
“……한이야.”
다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작은 한숨이 섞였다.
그러나 그녀도 두 사람의 언쟁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아이돌이니 뭐니 다 어린애들이 한때 하는 거 아니더냐.”
“아, 예에. 그런 편협한 시선으로 고귀한 음악 하셔서 참 좋겠어요.”
“…….”
이제 어머니는 한이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다.
형은 이 피곤한 대화에 끼고 싶지 않은지 익숙하다는 얼굴로 조용히 식사만 이어나갔다.
의견 차이가 있을 땐 서로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한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았다. 사이는 나쁘지만 고집이 센 건 제법 닮은 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