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화
이제 슬슬 새해라고 하기에도 조금 모호한 겨울.
아이돌 그룹에겐 이 시즌에 거의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는 스케줄이 하나 있었다.
‘사실 작년에 그렇게 마무리를 해 놔서 올해는 출연 요청이 안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다. 바로 <아이돌 대운동회> 시즌이 1년 만에 돌아왔다.
올해도 출연 요청을 받아서 나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출연을 결정했다.
뉴마에는 지금 대신 내보낼 후배 그룹도 없고, ZBS에 안 좋은 인상을 남겼다간 불이익이 생길지도 모르고.
작년 촬영일에 재민의 복귀를 발표해서 소란을 일으켰던 우리가 안 나가면 완전히 척지겠다는 의사 표시로 받아들일 것 같았다.
퀘스트 기간이 1년도 안 남은 시점이라 최대한 그런 일은 피하고 싶었다.
작년엔 재민을 데려온 지 얼마 안 되던 차에 출연 요청을 받아서 바로 휴지통에 버려버리려고 했었는데.
‘작년의 그 패기는 어디로 가 버린 걸까…….’
소속사와 방송국이란 어느 한쪽이 눈치를 보거나 양쪽이 눈치를 보는 관계였고, 뉴마는 눈치를 보는 쪽이었다.
작년보다는 상황이 여러모로 나아졌지만 그만큼 시간이 촉박해져서 결국 이 사회와 타협을 해야 한다는 점이 조금 씁쓸했다.
그러나 꼭 퀘스트 때문에 출연을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멤버들의 의견도 물어봤는데, 이 <아이돌 대운동회>와 많은 일이 있었던 재민의 의견이 출연 결정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
[저 작년엔 관계자 통로에서 구경만 했잖아요.]
작년 촬영 날 재민이 관객석 아래에서 멤버들과 컬러즈를 빤히 올려다보던 모습은 내 뇌리에도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자신이 그 사이에 껴도 될지 불안해하던 그때로부터 1년이 지나 이번엔 아이돌로서 당당히 서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전엔…… 중간에 퇴장했었으니까. 이번에 나가서 깔끔하게 마치고 오면 좋지 않을까요?]
중간 퇴장이란 4년 전 재민이 촬영하다 부상 때문에 실려 갔던 일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걸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줄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 안 나가기도 뭐했다. 멤버들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다만 그건 우리 사정이고, 컬러즈는 또 뭐라고 할지…….’
작년엔 돌대회보다 뉴마를 먼저 폭파해야 한다던 그들이었다. 지금은 뉴마에 대한 인상도 많이 나아졌을 텐데 또 돌대회보다 못한 뉴마로 돌아가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돌대회 스케줄을 잡는다고 욕먹는 회사는 뉴마뿐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특히 잘못해서 욕먹는 게 아니고 불가항력이라 생각하면 조금 안심도 되었다.
올해 <아이돌 대운동회> 방청 신청 공지를 올리자 컬러즈는 역시나 그 이야기로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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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ㅏ,,, 이놈의 돌대회는 대체 언제까지 나가는 거지?
이제 안 부를 때쯤 되지 않았냐
└폐지가 빠를지도ㅎ..
└근데 작년에 그 욕 먹고 또 부르는것도 좀 웃기긴하다ㅋㅋ.. 몬클 크니까 이제 다시 보이나?ㅠ
└이건 애들이 마음이 넓어서 나가주는거다
└ㄹ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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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즈는 작년처럼 분개하기보다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다들 이 촬영이 멤버들에게나 컬러즈에게나 고생인 걸 알지만 그만큼 따라오는 장점을 차마 무시하지 못한 듯했다.
멤버들과 오랫동안 한 공간에 있으면서 다양한 모습을 지켜볼 기회는 많지 않으니까. 이때 찍힌 사진이나 영상들이 영업에 도움 되기도 하고.
‘컬러즈한테도 작년 돌대회 방영일에 신나게 영업했던 기억이 강렬하긴 했을 거야.’
스타일을 바꾼 해랑의 모습이 공중파를 타자 곳곳에서 반응이 터져 나왔었지.
오랫동안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던 컬러즈는 신나서 ‘모노크롬 백해랑입니다’ 하면서 여기저기 영업하러 뛰어다녔다.
사람 일은 모른다고, 컬러즈가 그렇게 이름을 알리고 싶어 했던 해랑은 지금 대중들에게 ‘손꼽히게 잘생기고 피지컬 좋은 아이돌 래퍼. 하지만 연기는…….’이라는 캐릭터로 정착되었다.
‘그땐 달리기 1등을 해도 분량을 얼마 못 받았는데 이번엔 좀 달라지려나?’
방송을 보고 뭐든지 인기도로 줄 세우는 업계란 걸 뼈저리게 느꼈었지. 인기 그룹은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리액션을 계속 잡아주니까.
그래도 이번엔 조금 희망적이었다. 아직 촬영이 시작하기도 전이지만 대우가 조금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저번보다 팬석을 더 많이 마련해주겠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과연 방송계, ZBS에서 보는 모노크롬의 현재 위치는 어떨까.
이번 <아이돌 대운동회> 촬영에 앞서서 남몰래 혼자 잡은 컨셉은 ‘돌대회 리벤지’였다.
***
“오늘도 ‘다치지 말자’를 모토로. 참여하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으니까 열심히 하려고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 거 알지?”
“누가 내기를 걸어오면 어쩌죠?”
저번처럼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멤버들에게 ‘다치지 말자’를 주지시키고 있는데 한이가 한 손을 들고 질문했다.
모노크롬에게 내기를 걸어올 만한 그룹이라면…….
“오늘 SPID도 나온대?”
“네. 일곱 명 중에서 셋만 나온다고.”
“하범도 나와?”
“네.”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해랑이 대답했다.
SPID도 모노크롬과 같은 7년 차. 게다가 SPID의 회사는 대형 소속사였기에 후배 아이돌 그룹도 있었다.
이쯤 되면 슬슬 돌대회에는 안 나올 연차라던데. 아마 컴백이 미뤄진 탓에 예정되어있던 활동 스케줄이 전부 취소되어서 대신 돌대회에 나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작년에 하범이 해랑이한테 달리기 1등 자리를 빼앗기고는 그 후에 음악 방송 대기실로 찾아와서 승부를 걸었었지.’
그때도 지고 돌아갔으니 오늘 또 해랑에게 승부를 걸어올 가능성이 있었다.
오늘은 정말 팬들과 소통하고 가볍게 적당히 하고 갈 생각이었는데…….
“그럼 무리는 하지 말고 이길 수 있으면 이기자.”
“무리하지 말고 이기자…….”
내가 ‘무리하지 말자’와 ‘이기자’를 한 문장에 넣어서 말하자 준해가 내 말을 되풀이하며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말하긴 했는데 그 뜻이 아니야.
“져도 나쁠 건 없는데 기왕이면 이기는 게 좋긴 좋으니까. 지더라도 상심하지 말고, 무리해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면 물러나도 된단 소리였어.”
내가 말을 풀이해주자 멤버들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할 만한 종목에는 아예 참가하지 않으니까 괜찮을 듯했다. 육상 종목도 바닥 상태만 제대로 정비해 놨다면야 문제없겠지.
멤버들은 작년처럼 입장 전 대기 장소로 향하고, 나는 또 구경을 하러 저번처럼 관객석 아래로 왔다.
‘작년엔 초상집 분위기여서 조용했는데 오늘은 무슨 얘기를 할까.’
작년, 모노크롬을 기다리며 유독 우중충하게 있던 컬러즈는 멤버들이 입장하는 것을 보고 곧바로 스타일 얘기로 불타올랐었다.
작년 돌대회는 해랑의 스타일을 변화시킨 후 첫 공식 스케줄이었기에 해랑에 관한 반응이 특히 컸었다.
참고로 <체크메이트> 활동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멤버들이 현재 머리 색은 아직도 활동 시와 비슷하게 유지되는 중이었다.
다만 백발은 탈색한 후에 푸른색이 돌게 염색해야 백발이 된다. 푸른색은 금방 물이 빠지기 마련이고.
활동이 끝난 지금은 굳이 새하얀 백발을 유지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푸른 기가 빠진 해랑의 머리는 현재 밝은 금발에 가까웠다.
‘백금해랑도 신선해서 반응은 좋을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작년의 기억을 더듬어 익숙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작년엔 정체를 숨긴 재민과 같이 왔었는데 오늘은 재민이 아이돌로서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혼자 도착해서 팬석을 올려다보니 그곳엔 컬러즈가 아니라 다른 팬덤이 자리해 있었다.
‘아차. 팬석이 많아져서 구역도 바뀌었나. 그럼 컬러즈 자리는…….’
팬석을 끝에서부터 눈으로 훑으며 컬러즈의 구역이 어딘지 찾았다.
내가 반대편부터 훑었는지, 컬러즈보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아이리스의 팬덤인 무지개였다.
아, 아이리스 오늘 나오는구나! 계속 해외에 있다고 해서 안 나오는 줄 알았는데.
회사 대표 무지개인 민형은 하필이면 오늘 휴가 중이었다. 연말 시즌과 활동까지 쉴 틈 없이 이어져서 마땅히 쉴 기간이 없던 차라 <체크메이트> 활동이 끝나고 바로 휴가계를 냈다.
‘민형 씨라면 아이리스가 돌대회에 나온다는 걸 미리 알고 있었을 텐데.’
직접 볼 기회를 포기하고 미련 없이 휴가를 가다니. 그만큼 워라밸뿐만 아니라 덕라밸까지 중시하는 사람이었나 보다.
저번에 사전 녹화를 구경하러 갔을 때도 마침 활동이 겹쳤고 스태프들이 할 일이 없던 시간이라 구경하러 갔을 뿐이었다. 본인 입으로도 자기는 거리감이 있는 게 좋다고 했었으니까.
그보다 작년보다 무지개 팬석이 작아진 것 같은데…….
의문이 들었으나 그 옆, SPID의 팬덤인 스피디의 구역도 전보다 작아진 것을 보고 그 이유를 바로 추측할 수 있었다.
‘SPID는 완전체 출연이 아니어서 팬석이 작아진 모양인데. 그럼 아이리스도 오늘 일부만 나오는 건가?’
연차가 높아지면 멤버들이 전원 출연하지 않고 일부만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이리스도 이제 5년 차니까 나름대로 ‘연차 있는 그룹’의 반열에 들어섰겠지.
언제 그렇게 컸나 싶어서 새삼스레 감회에 빠져 있는 동안, 내 시야에 드디어 우리의 컬러즈가 들어왔다.
컬러즈의 팬석은 좀 더 중앙 구역에 가깝게 배치되었고 자리도 많아졌다. 바로 아래로 다가가 살펴보니 오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 개 피곤해.”
“저도 오늘 연차 쓴다고 어제 늦게까지 야근했잖아요. 팀장 개…….”
……표현은 좀 거칠지만 그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느라 피곤하다는 말을 한다는 건 그 외에는 크게 불만 사항이 없다는 뜻이다.
지금 당장 머리채를 잡고 싶은 게 본인 직장 상사고 뉴마가 아니라는 게 이토록 고맙게 느껴질 줄이야.
덕분에 나도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촬영이 시작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다.
모노크롬이 입장할 땐 조금 깜짝 놀랐지만.
‘익룡이 거대 익룡으로 진화했나?!’
소수정예가 아니라 적당한 인원이 되니까 컬러즈 특유의 목청이 더욱 큰 효과를 발휘했다.
컬러즈는 작년처럼 시선은 멤버들에게 둔 채 손가락으로는 핸드폰 화면을 두드리며 열심히 중계에 나섰다.
[해랑이 머리 지금 화이트블론드자너?!??? 미쳐따]
[애들 오늘 기분 좋은가봄ㅠㅠㅠㅠ 폴짝폴짝하면서 등장함ㅋㅋㅋㅋ 개귀여워]
[재미니를 또 돌대회에서 보게 되다니,,,,,]
돌대회에서 재민을 보는 게 4년 만이라 과거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컬러즈도 있었다.
당시에도 팬이었던 컬러즈에겐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겠지.
그래서 재민이 더욱 출연하겠다고 주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좋은 기억으로 덮어주려고.
그래서인지 재민은 환하게 웃으며 양손을 들고 빙글빙글 돌며 입장했다. 어깨가 괜찮아진 것도 어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한이는 그런 재민을 팽이 돌리듯이 돌리고, 준해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통통 튀며 걸었다.
맏형인 우형과 체력 비축을 중시하는 해랑은 그런 동생들의 재롱을 웃으며 지켜봤다.
‘다들 왜 저렇게 신났어?’
멤버들이 신나 보이자 컬러즈의 분위기도 한층 더 살아났다.
오늘 돌대회 리벤지는 생각보다 수월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