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쉰셋돌>의 뒤풀이 장소는 방송국에서 차로 조금 이동한 곳에 있는 한 식당이었다.
모노크롬은 한창 <체크메이트> 활동 중이라서 내일은 또 음악 방송 스케줄이 있었다.
다음 날 컨디션에 지장이 가면 안 되니 자리가 파하기 전에 먼저 나오게 되겠지만, 한 방송을 같이 만든 동료로서 회포를 푸는 자리에 빠질 수는 없었다.
“내일 또 스케줄 있으니까 술은 안 되는 거 알지?”
“네.”
“아-, 아쉬운데. 딱 한 잔은요?”
멤버들은 다 얌전히 끄덕거리는데 한이가 기분이 좋은지 괜한 투정을 부리고 나섰다.
“못 마시면 죽겠다 싶을 정도라면 어쩔 수 없지만, 다 네가 책임져야 해.”
“뭐를요?”
“네 목숨을.”
“아니, 난 목숨까지 어떻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목숨이라는 대답은 내가 아니라 해랑이 한 것이었다. 난 그저 내일 숙취나 라이브를 말한 거였어.
연습생 땐 자주 싸웠다더니 해랑은 한이에게 특히 냉정한 말을 던지는 장난을 칠 때가 있었다.
내가 한 대답도 아니건만 한이가 나를 보며 과장되게 놀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난 오래 살고 싶으니까 이사님 말씀 들어야겠다.”
“오래 살려면 금주가 좋긴 하지…….”
나도 오늘만큼은 적당히 풀어주고 싶지만, 이런 자리에선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옆에서 또 권하는 법. 아예 차단해 놓는 것이 나았다.
“그리고 다들 알아서 잘하겠지만 속 안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과식도 금물. 아, 아니. 재민이 너보고 말한 거 아니었어.”
그냥 멤버들 전체를 보며 말하는 중이었는데 ‘과식’이란 단어를 말할 때 우연히 재민과 눈을 마주쳤다.
내 다급한 변명에 멤버들은 웃고 재민이 입을 쀼루퉁하게 내밀었다. 얼굴이 동그래졌다고 했을 때부터 가끔 신경 쓰던데 말을 잘못했어…….
한이가 또 틈을 타 2절, 3절까지 놀릴까 봐 우리는 서둘러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입구 바로 앞 카운터에서는 식당 사장님이 사인을 요청했는지 만호가 종이와 펜을 받아들고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냥 식당 이름으로 써 주면 돼요.”
“어디서 오셨어요?”
“네? 아유, 고향은 저기 춘천이지.”
중년의 식당 사장님은 만호가 그냥 사담을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거 팬 사인회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배운 것을 알뜰살뜰 써먹다니. 역시 연예대상이야.
다들 그 장면을 구경하느라 입구에 정체되어있자 스태프 한 명이 “이동하실게요-.” 하면서 만호를 밀어내고 스태프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연예인이 대거 들어와서인지 다들 자리를 잡고 앉은 후에도 사인 종이가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모노크롬도 A4 종이 하나에 멤버 전원의 사인을 마치고 펜을 돌려주려는데.
“저기, 선배님들.”
멤버들 옆으로 제오가 슬쩍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다른 종이와 펜이 들려 있었다.
“저희 멤버, 그러니까 브이스타일 멤버한테 부탁받았는데 혹시 저도 사인 받아갈 수 있을까요. 걔 누나가 팬…… 컬러즈래요.”
방송으로 모이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기도 하고 마침 사인하는 분위기라 이때다 싶어서 찾아온 모양이었다.
컬러즈라고 확실히 팬덤명을 말하는 것을 봐선 빈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동생이 아이돌인데 다른 그룹 팬일 수도 있구나. ……아니, 동생 그룹 팬인 게 더 이상하려나.’
모노크롬이 제오에게 사인을 해 주는 것을 보고 진짜 컬러즈 도한도 이쪽으로 다가왔다.
“왜 제오한테만 사인해 주세요? 컬러즈는 제가 먼저 됐는데.”
“먼저 된 게 문제가 아니라…… 사인 요청한 게 제오였으니까 해 준 거지.”
“그럼 저도 사인해 주세요.”
우형의 말을 들은 도한이 사인해 달라며 자신의 지갑에서 꺼낸 것은…… 해랑의 포토카드였다. 그것도 작년 앨범 포토카드.
그간 모노크롬이 컨셉츄얼한 앨범을 많이 내와서 때와 같은 상큼, 청량한 버전의 포토카드는 희귀했다. 그래서 뒤늦게 입덕한 컬러즈들이 구하느라 혈안이 된 바로 그 포토카드였다.
뜬금없이 등장한 포토카드에 준해가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입을 떡 벌렸다.
“지갑에 그걸 왜 넣어 다녀?!”
“제 부적인데요?”
“……내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도한의 부적이 된 해랑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가지고 다녔는데 그때부터 진짜로 이것저것 잘 풀리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부적 삼기로 했어요.”
보통 ‘그냥 가지고 다닌다’라는 발상 자체를 안 할 텐데.
때면 아마 도한의 데뷔 시기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럼 그냥 잘 풀린 시기가 맞아떨어진 거 아니야?
그래도 다른 이의 토템이 된 멤버를 보는 것도 제법 신선하니 그냥 그렇게 믿게 두기로 하자. 믿다 보면 정말 효과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쪽이 소란스러워지자 다른 출연진들도 무슨 일인가 궁금했는지 모노크롬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결국 사인을 해 주느니 마느니 하는 상황은 라솔, 모노크롬, 신셋이 서로의 사인을 교환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
제작진과 출연진, 나처럼 그 출연진에게 딸린 직원들이 전부 모여서 뒤풀이 자리는 상당히 복작복작했다. 성운과 민후, 신셋의 연습을 도왔던 팀 미로의 단원 몇몇이 합류하기도 했다.
반대로, 안타깝게도 중간에 일하러 방송국으로 돌아가는 방송국 스태프도 있었다.
<쉰셋돌> 마지막에 가까워질수록 방송 내용과 실제 시간이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편집할 시간이 많이 없다고 한다.
먼저 떠나는 사람이 한둘 나오자 우리가 먼저 자리를 뜰 것을 알고 있는 라솔이 내 옆으로 왔다.
“이사님도 오늘 술은 안 하세요?”
“네. 원래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라솔 씨는요?”
“저도 내일 일이 있어서요. 아마 중간에 나가긴 할 것 같아요.”
라솔은 고개만 살짝 돌려 식당을 한 바퀴 둘러보며 말했다.
“뭔가 시원섭섭하네요. 다들 정들었는데 졸업하는 느낌?”
“라솔 씨는 이전에도 방송에 장기 출연해 보시지 않으셨어요?”
이전에 서바이벌 프로그램 심사위원도 맡은 적이 있다고 했으니까. 이런 상황은 익숙하지 않을까.
“네. 그래서 잘 아니까요. 다들 연락하자고는 말하지만 계기가 없으면 생각만큼 자주 못 만나는 거. 이번엔 좀 재밌기도 했고 특별해서 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 같아요. 특히 모노크롬 후배들과는 오래 함께해 왔던 기분이 들어서.”
나도 그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라솔과 같이 일할 기회가 계속 생겨서 자주 만나왔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자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사람들에게 용기를 얻어 가수로 복귀했다는 그녀니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타입이었으니 이렇게 아쉬워하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라솔이 말하는 것은 출연진들과의 인연뿐만이 아니었는지 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사님은 또 언제 뵙죠?”
“저요? 저야 언제든 한가하니까 라솔 씨가 시간이 되면 만날 수 있죠.”
라솔과 밖에서 개인적으로 만난 것은 딱 한 번. 그것도 완전히 개인적인 일은 아니고 이 <쉰셋돌> 섭외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또 어떤 일로 만나야 할지 모르겠지만…….’
만날 계기나 이유를 찾는 나와 다르게 그녀는 이유는 중요치 않은 모양이었다.
“이건 빈말이 아니고, 그냥 안부 묻고 지내요. 성향이 비슷해서인지 이제는 왠지 친구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앗, 제가 나이도 많은데 이건 좀 아닌가요?”
“네?! 아, 아뇨. 저야 물론, 좋죠.”
그녀가 나를 높이 평가해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렇게 친근하게 생각해 줄 줄은 몰랐다.
모노크롬에게도 신셋에게도 친절해서 기본 성격이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러나 그녀는 정말로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치, 친구 생겼다…….’
이 세계에 와서 처음 이름을 들은 사람과 친구 같은 관계가 되다니. 난 이제 이승에도 친구가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주변 분위기 때문인지 왠지 더 허물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화를 나누는 라솔과 내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저어, 선배님, 이사님.”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이담이 있었다.
“개인적으로 너무 신세를 져서 뭐라도 답례하는 게 좋겠다고 회사에서……. 아, 아니, 회사에서 시킨 게 아니고 제가 감사해서요.”
그렇게 말하며 작은 쇼핑백을 나와 라솔에게 하나씩 건넸다. 그 안에는 더클랜의 사인 앨범 몇 장과 핸드크림, 티백 세트가 들어 있었다.
‘스승의 날 은사가 된 기분이야.’
울먹이는 그를 다 같이 달래준 일을 신세를 졌다고 표현한 듯했다.
그 후에도 괜히 마음이 가서 더 신경을 쓰긴 했었다. 내가 신경 써 줄 수 있는 일은 그의 회사와 스타일링을 변경해도 좋을지 상의하고 조율한 것 정도였지만.
라솔과는 몰라도 아마 이담과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지 않을까. 모노크롬과 스케줄이 겹치지 않는 이상 타 소속사 임원인 나와 따로 만날 일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격려의 한마디를 건네주기로 했다.
“넌 정말 앞으로 더 잘될 거야. 내가 예감은 좋은 편이거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앞으로 많아질 테니까 좀 더 자신감을 가져.”
“가, 감사합니다.”
이담은 쑥스럽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성격도 괜찮고 그 많은 시청자 앞에서 제 실력이 발굴되었는데 앞으로 더 잘되지 않을 리 없지.
‘……회사가 일을 정말 못하지 않는 이상은.’
그저 더클랜의 소속사가 뉴마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담이담, 이리 이리.”
한이가 나와 이담의 대화가 끝난 것을 확인하고 그를 불러갔다.
모노크롬은 술을 안 마셨는데도 분위기에 취해 알아서 잘 즐기고 있었다.
활동 기간에 이렇게 아무 걱정 않고 떠들며 쉬는 건 드문 일이라 더 마음껏 즐기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담이 멀어진 대신, 이 자리의 주최자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만호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좋은 경험 시켜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특히 그 담력 체험 시리즈. 아주 신선했어요.”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이네요.”
류현은 그것 때문에 나만 마주치면 도망가던데. 한 사람이라도 좋아했으면 됐지.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가려나 했는데 그는 남이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라도 하듯이 자세를 낮췄다.
“마음처럼 되는 일은 아니라지만 젊은 친구들 기회 빼앗기지 말아요.”
내가 갑자기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자 만호가 이어 말했다.
“연예계가 뭐 다 그래요. 이름이 없으면 뭘 빼앗겨도 주장하기가 참 어렵거든.”
그 말을 듣고서야 그가 남이 듣지 못하게 자세를 낮춰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타이틀곡 투표 얘기하는 거지?’
이렇게까지 이야기한다는 건 더 자세한 내막을 알고 있다는 뜻인가?
나도 안 PD가 엮인 게 아닌지 의심한 적은 있었는데 정말 그게 사실인 걸까.
만호 입장에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라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해 주지 못하고 이 정도로만 언질을 주는 모양이었다.
“젊으신 분이 책임자라길래 그냥 노파심에 한 소리인데 혹시 오지랖처럼 느껴졌다면 미안합니다.”
“아뇨. 새겨들을게요.”
그는 그 말을 남기고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시크하게 작별 인사 포즈를 취하며 본인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코미디언답게 웃기지만 멋진 퇴장이었다.
‘그럼 전에 시청자들한테 데모곡 얘기했던 것도 우리를 신경 써서 그랬던 게 맞나 봐.’
연예계는 다 그렇다고 비정한 업계처럼 말했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연예대상을 받은 걸까. 자꾸 생각이 대상으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정말 내가 만나온 대상들은 확실한 대상감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눌 사람들과 다 나눈 후, 오늘 뒤풀이에 동행한 직원들과 모노크롬은 너무 늦지 않게 자리를 떴다.
멤버들에게 푹 쉴 것을 명하고 식당 앞에서 바로 해산.
나도 귀가를 위해 택시를 탔는데, 출발하려 할 때 무심코 창문을 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음? 저 사람…….’
우형과 예전에 방송에 같이 나왔던 사람인데 여기는 왜…….
아, 러너스하이의 프로듀서랬지. 류현이 러너스하이고.
당시 방송은 우형의 분량도 별로 없었고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어서 잠시 잊고 있었다.
그는 류현의 프로듀서로서 뒤늦게 뒤풀이에 합류하려는지 식당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흐음. 뭐, 인사하는 거야 평범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식당 안에 있을 안 PD와 싱어송라이터 출신 프로듀서, 그 조합이 이상하게 자꾸만 신경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