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화
<아이돌부 방학캠프>와 <쉰셋돌> 출연 멤버의 그룹들은 <가요 페스타>에 전부 모였다.
<뮤직더라이브> 연말 결산에도 같이 출연한 그룹들은 있었다. 하지만 가요제가 아니라 1년 총결산 방송이었고, 연차 때문인지 녹화 시간이 꽤 차이가 나서 만나지 못했었다.
이번엔 엔딩에 전 출연자 등장 순서가 있어서 무대 앞뒤로도 대기 시간이 꽤 길었다.
그 시간에 자신의 대기실에서 쉬는 아티스트도 있는 반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아티스트도 꽤 많았다.
모노크롬은 1년 후배인 유니온맥스 멤버와도 촬영하면서 친분이 생겼는지 서로 인사하며 지나가기도 했다.
‘우리 대기실은 거의 오픈되어있네.’
모노크롬의 대기실에 처음 자리 잡은 것은 SPID 멤버들이었다.
항상 빠지지 않는 하범, 하범과 자주 같이 다니는 듯한 SPID의 메인 댄서 윤규란 멤버가 들어와 앉고, 몇 명이 왔다 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은 인사나 수다 목적으로 왔다기보다는…… 해랑을 놀리러 온 듯했다.
“와하하핰! 형, 방송에서 잘하더라. 거의 연기자던데.”
윤규가 해랑을 가리키며 신나게 웃자 한이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같이 놀림에 참여했다.
“연기 포지션 내 자린데 그걸 또 탐낸다니까.”
“…….”
이는 <쉰셋돌>에서 해랑이 만호와 함께 펼쳤던 온갖 상황극을 말하는 것이었다.
멤버들에게 자주 몰이를 당하는 한이는 당한 만큼 복수하려는 것인지 멤버들을 놀릴 상황이 생기면 누구보다 의욕적이었다.
그 옆에서 해랑의 친구인 하범까지 가세해 방송 감상을 내뱉었다.
“와, 우리 멤버들도 보고 다 기함했다. 그 백해랑이 이렇게 예능인으로 성장하는구나.”
“그 백해랑이 뭔데?”
하범은 마치 자신이 해랑을 키워오기라도 한 것처럼 미간에 손가락을 대고 눈물을 참는 척했다.
그가 자기 할 말만 이어가자 해랑도 ‘네 말에 전혀 집중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하듯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고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범을 피해 돌아가던 시선이 순간 나와 마주쳤다. 그러자 해랑은 눈동자만 굴려 대기실을 쓱 둘러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시끄럽게 할 거면 너희 대기실로 돌아가.”
“사람이 왜 이렇게 매정하냐. 방송에서 보여준 모습은 다 가식이었던 거야?”
방송 잘 봤다는 이야기 같아서 좋은 마음으로 구경했을 뿐인데 혹시 내가 시선으로 시끄럽다고 눈치 주는 줄 알았나.
“좀…… 시끄러워도 괜찮은데.”
“…….”
옆에서 윤희가 마침 재밌는 장면을 건져 보려고 비하인드 카메라를 들고 촬영 중이기도 하고.
바로 돌아가 버리면 아쉬울 것 같아서 한마디 얹자 해랑은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래. 너만 눈치 준다니까.”
이미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어서, 내가 모노크롬 팀의 책임자라는 것을 하범도 알고 있었다.
책임자인 내가 괜찮다고 하자 하범은 다시 기세등등해졌다.
해랑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인 것을 봐선 그냥 나를 방패 삼아 SPID 멤버들을 내쫓고 싶었던 걸지도.
“내가 너희 공연 보러 갔을 때 만호 선배님한테 잘 부탁드린다고 했지. 백해랑은 등 근육만 키우지, 입꼬리 근육은 안 키운다고 하니까 선배님이 그건 자기 전문이라고-.”
하범은 결국 제 노력을 알아달라는 말을 하려는 것 같은데, 반쯤은 친구를 아끼는 본인의 멋짐을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해랑은 이제 무슨 소리를 어디까지 하나 보겠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널 생각해서 내가 이렇게 신경을…….”
누가 막지도 않겠다, 눈까지 감고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해 있던 하범은 눈을 떴다가 순간 해랑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멈춰 버렸다.
“……뭐, 뭐냐, 방금?”
해랑은 ‘대충 다 들었고 이해했고 적당히 끝내자’라고 말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누가 봐도 제대로 귀담아들은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 미소만큼은 파급력이 엄청났다.
‘오. 매력 11짜리 미소.’
나도 TV로나 봤지,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인데.
해랑이 얼굴 쓰는 방법을 조금 터득했다고 해도 성격까지 바뀐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본 그의 웃음은 이전보다 좀 밝아진 ‘씩’, ‘피식’ 정도였는데, 지금은 상큼하고 청량한 ‘싱긋’이었다.
이 정도면 그냥 미소가 아니라 미소를 이용한 공격에 가까웠다. 사람들도 좋은 걸 보면 심장 어택이라고 하잖아?
‘미소로 공격할 정도로 듣기 귀찮았나 봐.’
제대로 먹혀들었는지, 신나서 놀리던 하범은 당황해서 해랑에게 낯을 가리며 한 발짝 물러섰다.
그 옆에서 우형이 웃는 건지 질색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말했다.
“얘 요즘 가끔 이런다니까! 자기 생각대로 안 되면 웃음으로 무마하는 거.”
“으으. 갑자기 표정 싹 바꾸는데, 보고 있으면 다른 사람 된 것 같아서 무서워.”
준해가 양손으로 자신의 팔을 쓸어내리며 닭살을 가라앉혔다.
하범도 해랑을 오래 알아 왔고 원래 이렇게 웃는 사람이 아니란 걸 잘 알기에 더 당황한 것 같았다.
준해의 말을 듣고 재민이 뭔가 생각났는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른 사람……. 설마 여기 있는 형은 도플…….”
“크흠, 재민아.”
내가 기침하는 척 작게 그를 불러서 입술 근처에 검지를 세워 보이자 재민은 입을 합 다물었다.
재민은 주어진 설정을 여기저기 잘 활용하는 편이었다.
그건 좋은데 일단 스포일러니까. 남들은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다행히 멤버들은 재민의 아무 말에 익숙한지 스포일러가 나올 뻔한 상황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SPID 멤버들도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알았는지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혹은 해랑의 미소 공격에 당해서 다른 말이 귀에 안 들어왔거나.
그만큼 평소 해랑에게선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면모가 생겨났다는 거겠지.
‘컬러즈랑 시청자들은 좋아하던데 멤버들이나 지인 눈엔 다르게 느껴지나 봐.’
적극적으로 해랑을 놀리던 하범이 당황하느라 놀림이 끊긴 덕분에, 이들은 곧바로 다음 화제로 넘어갔다.
“모노크롬도 1월 컴백이랬나?”
“응.”
준해가 대답하자 윤규가 머릿속으로 날짜를 세는지 빈 벽을 쳐다보며 손가락을 접었다.
“활동 끝 무렵에 우리가 컴백이니까, 잠깐 겹치겠네.”
아이돌 그룹이 새 앨범을 내면 대략 한 달쯤 전엔 티저가 공개되기 시작한다.
이제 12월 말. 모노크롬을 포함하여 1월 컴백 라인업은 거의 나온 상태였다. 그중엔 SPID도 끼어 있었다.
‘올해야 우리는 적당한 시기 골라서 앨범 냈지만, 내년부턴 주변 컴백 그룹이 좀 신경 쓰이지.’
음악대상은 ‘올해의 음악인’을 정하는 시상식이었다. 올해는 차근차근 올라가는 것이 목표였지만 내년부터는 활동 하나하나에 신경 써야 했다.
음원 순위가 기준이 아니라지만 한 해의 시작인 1월부터 인기 그룹과 겹쳐서 주목도가 떨어지는 상황을 만드는 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신셋이 워낙 폭풍 신인이라…….’
신셋이 앨범 발매 일정을 발표하고 나자 그 이후로 1월, 혹은 2월 초 컴백 소식들이 여럿 올라왔다.
많은 그룹이 신셋과 활동 기간이 겹치는 것은 피하고 싶었는지 눈치 싸움을 한 듯했다.
같은 1월 컴백인 SPID도 그야말로 탑 아이돌이지만 굳이 신셋과 컴백이 겹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을 것이다.
신셋의 프로듀서로 활약한 모노크롬은 그 주목도에 조금 편승할 수 있어서 상황이 다르지만.
확정된 일정을 보자면 신셋은 1월 중순에 데뷔하여 짧게 활동하고, SPID는 1월 말일에 가깝게 컴백하여 거의 2월에 활동. 모노크롬의 컴백은 그 중간에 있었다.
“그럼 그때 또 보자고.”
SPID는 조만간 보자면서 인사를 나누고 우리 대기실을 뒤로했다.
다음에 만날 약속 장소가 방송국이나 무대 위라니. 아이돌은 역시 일반인과 다르다는 것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휴. 조용해졌네요.”
“네가 제일 시끄러웠어.”
제일 신나서 같이 떠들던 한이가 능청스레 말하자 해랑이 웃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시끄러워도 보기 좋던데? 예전엔 다른 팀들 보면 낯 가리고 그랬잖아. 오늘은 다들 자연스럽게 인사하고 수다 떨고.”
“그, 그땐 친한 그룹이 별로 없어서…….”
당시에 가장 낯을 가렸던 우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친한 그룹이 늘어난 것도 보기 좋은 것 같아.”
“음. 그쵸. 다들 좋은 애들이라.”
복도에서 후배들을 마주치면 벽을 느끼는 것보다야 지금처럼 시끄럽게 떠들고 노는 게 훨씬 보기 좋았다.
초면인데도 모노크롬을 TV에서 봤는지 먼저 와서 인사하는 후배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원래 있을 자리에 확실히 정착한 것이 느껴졌다. 이 연예계라는 곳에 섞여 있는 게 자연스러워진 느낌.
연초와 비교하여 많이 달라진 모습이 보일수록 올해의 성과를 확인하는 기분이라 뿌듯했다.
‘마이 엔터에선 연말이면 회사가 1년 동안 돈을 얼마 벌었고 회사 가치가 얼마나 커졌는지만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런 점은 역시 제목부터 ‘엔터’가 들어가는 게임다웠다.
이렇게 아티스트가 직접 움직이고 말하는 걸 보는 게 더 재밌는데 말이야.
잠시 게임 생각에 빠져 있는데, 이번엔 모노크롬도 낯가릴 필요 없는 후배가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활기차게 인사하며 들어온 것은 우형의 병아리들……이 아니라.
‘우형이가 얘네들 보면서 병아리 같다고 한 게 생각났어…….’
우리 대기실을 찾아온 것은 엔피버였다.
이들은 <아이돌부 방학캠프> 촬영 이후로 다른 멤버들과도 친해졌지만, 곡을 준 우형에게는 특히 친근하게 굴었다.
친한 선배가 생겨서 신난 건지, 진짜 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형에게 ‘신곡 들었는데 좋더라’, ‘휴가가 생겼다’ 등등 시간이 생길 때마다 자주 연락했다나.
“형님, 이제 다른 팀한테도 곡 주시는 거예요?”
“내가 다른 팀한테도 나서서 줬다기보다는, 이번엔 필요해서 작업한 거지.”
“그럼 저희도…….”
엔피버 멤버들도 가장 먼저 하는 얘기는 <쉰셋돌>에 대한 반응이었다.
곡을 먼저 받은 적 있어서인지 우형이 작곡한 곡에 관심을 보였다. 곡을 달라는 이야기는 장난 반, 진담 반인 듯했다.
‘얘네한테 곡 준 이후로 우형이 작곡 레벨이 올랐으니까 좀 고맙긴 해.’
그런 경험들이 있어서 <쉰셋돌> 출연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지.
리더인 종훈이 자신도 우형을 따라 작곡을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풀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듣던 한이가 종훈을 보며 말을 건넸다.
“그럼 우리도 곡 줘.”
“네에?!”
“우리 리더도 곡 줬잖아. 서로 하나씩 교환하는 거지.”
가볍게 농담하듯이 하는 말이었으나 종훈은 누군가에게 곡을 준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는지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런 기분이었군요. 저도 곡 달라는 얘기 쉽게 안 할게요…….”
“그냥 장난이었어.”
한이는 장난에 솔직히 반응하는 후배가 귀여운지 그에게 어깨동무하며 웃었다.
후배를 귀여워하는 모노크롬이라니. 컬러즈가 말하던 ‘선배미’가 바로 이런 걸까.
신셋 멤버들은 모노크롬을 ‘선배님’이라고 불렀는데 엔피버는 호칭이 ‘형’이나 ‘형님’으로 정착해 있었다.
종훈을 제외한 멤버들이 준해에게도 ‘형, 형.’ 하면서 부르는 모습을 보니, 병아리 같다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엔피버가 지나간 이후엔 이코드도 인사하러 우리 대기실로 찾아왔다.
‘……모노크롬한테 누가 진짜 꿀 발라놨나?’
<아이돌부 방학캠프>가 방영할 때, 왜 이렇게 다들 모노크롬한테 모여드느냐던 글이 계절을 지나 다시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