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7화
만호의 요구는 처음부터 확고했다. 젊음이 넘치는 청춘 느낌.
‘원하는 컨셉을 말할 때도 똑같이 얘기했었지.’
그렇게 정해진 앨범 컨셉이 악동이었고, 젊은 느낌은 캐주얼한 의상으로도 충분히 낼 수 있다.
그러니 뮤직비디오 촬영 장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준해가 특히나 더 젊음이 넘치는 장소를 제안했다.
예능 촬영을 위해 뉴마로 온 안지택 PD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관심을 보였다.
“잘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고요?”
“저희 학교 홍보팀이 촬영 장소 같은 거 필요하면 최대한 협조해 줄 테니까 연락하라고 했었거든요. 대신 학교 홍보 소재로 쓰게 해달라는 조건이 있었지만…….”
“학교가 어디죠?”
“아, 단군대예요.”
“호오…….”
준해가 재학 중인 학교 이름을 듣고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
단군대 축제에서 있었던 일은 해외 토픽감은 아니더라도 모노크롬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퍼져나갈 정도로 제법 화제였었다.
단군대생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팬들이 모인 커뮤니티 말고 다른 곳으로도 퍼져나가기 쉬웠고.
그래서 축제 이후에 작가나 다른 스태프들은 우리에게 그 화제로 말을 꺼내기도 했었는데, 안 PD는 전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제작진이 우리 멤버들의 정보를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라지만, 멤버가 팀 미로 단원인지도 모르던 것도 그렇고 정말 모노크롬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니까.
‘이런 사람이 용케도 모노크롬 섭외에 찬성했네.’
그만큼 어려운 자리를 따냈다는 뜻이니까 오히려 뿌듯한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좋은데, 혹시 제작사가 미리 점찍어둔 장소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연락해보겠습니다. 따로 정해진 장소가 없으면 부탁드리죠.”
“네. 말씀 주시면 바로 단군대 홍보팀에 문의해 볼게요.”
우선 이야기가 그렇게 정리된 후 나는 준해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그런데 학교에서 촬영해도 넌 괜찮은 거야? 그…… 아버님이 저번처럼 마음에 안 들어 하실 수도 있고…….”
준해의 아버님이 학교 축제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어서 화내셨다고 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도 혹시 준해가 방송을 위해 무리해서 장소 섭외에 나선 건 아닐까.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뭐 어때요. 학교에서 촬영한다고 제가 졸업을 못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 좋은 일 하는 거죠. 아빠가 뭐라 하든 제가 연예인인 건 변함이 없는데요.”
“네가 괜찮으면 됐고.”
그렇지. 가출할 정도로 대담한 아이였지.
준해는 순한 얼굴이라 안 그럴 것처럼 보이면서 은근히 고집이 있었다.
‘이번엔 나도 거하게 뭔가 할 생각은 없으니까 괜찮겠지.’
뮤직비디오 촬영 예정 일자는 준해의 시험 기간과 겹쳤다. 그 말은 학교 전체가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로 가득하다는 뜻이다.
시험으로 예민한 학생들을 방해할 수야 없지.
이번엔 정말 조용히 촬영만 하고 올 거니까 준해의 아버님이 성을 낼 만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얼마 후, 제작진은 뮤직비디오 제작사와 협의하고 우리는 단군대 홍보팀과 연락하여 장소 섭외가 결정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신셋 멤버들을 이끌고 단군대를 다시 찾게 되었다.
***
오늘 뮤직비디오 촬영엔 모노크롬 멤버들도 총출동했다.
전부 출연하기 때문에 따라온 건 아니었다. 준해는 단군대 가이드였기에, 해랑은 필요한 장면이 있어서, 재민은 강당에서 짧게 찍을 안무 파트를 봐 준다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한이는 자신이 필요할 것이라 주장하며 동행했고, 우형은 자신이 작곡가라 곡의 분위기를 가장 잘 안다는 이유를 붙이긴 했지만 혼자 남아있기 뭐해서 따라온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그냥 놀러 온 것 같기도 하고.’
단군대 이야기가 나오자 ‘재밌겠다’라는 반응이 먼저 나왔던 것을 떠올려 보면 목적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듯도 했다.
“준해는 시험 안 봐?”
“과제로 대체하는 과목도 있고 사이버 강의도 있고. 졸업 학기라 몇 개 없어.”
재민이 물어보니 준해는 걱정 없다는 듯 여유 있는 표정.
바쁜 와중에 언제 공부까지 했나 모르겠다니까. 연예인으로서 할 일을 제대로 해내는 사이에 시험 대비도 착실하게 해 뒀던 모양이다.
숙소에서도 함께 있는 멤버들의 말로는 귀가 후에는 거의 방에 붙어 있다고 했었지.
‘이제 현 매니저도 끝이겠네.’
초반 빼고 많이 못 굴린 게 아쉽지만, 그건 그만큼 모노크롬으로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니까.
“다른 학생들도 시험 기간이니까 다들 너무 크게 떠들지 말고 조용해야 돼. 옆길로 새지 말고.”
“네-.”
촬영하면 스태프들이 접근 통제를 할 테니까 사람들이 마구 몰려들거나 시끄러워질 일은 없겠지.
우리는 캠퍼스 뒤쪽 주차장으로 진입했기에 학생들과 많이 마주치지 않기도 했고.
준해가 다니는 학교라고 관심 어린 눈으로 구경하며 걷는 멤버들을 보니, 왠지 소풍 온 학생들을 이끄는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저번에도 오긴 했지만 나랑 같이 잠깐 들렀던 해랑이 외엔 축제 공연만 하고 갔으니까.’
전교생 대상 깜짝 카메라 이후에 잠깐 축제 구경을 해볼 생각도 했었으나, 컬러즈가 출연 소식을 듣고 모여 있기도 했고 혼잡을 일으킬 것 같아서 포기했었다.
조금 아쉬운 기분이 들었는데 오늘은 여유롭게 교정을 거닐 수 있었다.
준해가 안내하는 길엔 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더욱 마음이 편했다.
“이쪽이 구석이라 조용하기도 하고, 산학협력관밖에 없어서 학생들이 많이 안 오거든요.”
촬영 장소로 지정된 곳 중 하나로 향하며 준해가 설명했다.
시험 기간이 겹치는 바람에 학생들이 많은 도서관이나 강의동, 사람이 많이 오가는 길 등을 제외하고 장소를 빌려야 했다. 그래도 캠퍼스를 훤히 꿰고 있는 준해 덕분에 사전 답사가 수월했다고 한다.
준해가 추천한 장소는 대개 학생들이 많이 오지 않고 조용한 곳들이었다.
“학생들이나 교직원들도 평소에 오가는 곳만 다녀서 보통 이런 구석까지는 와 보지도 않을 텐데……. 일부러 구석만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렇게 잘 아시죠?”
동행한 단군대 홍보팀 직원은 준해의 장소 선택이 탁월하다며 칭찬했다.
그저 감탄으로 한 말이었겠지만, 듣고 나니까 진짜 그랬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혹시 학교에서 숨어 다닌 건 아니지?”
“숨어 다니긴요…….”
학교에서 정체를 숨기고 다녔던 게 생각나서 물어봤는데 준해는 그 정도까진 아니라는 듯이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도서관에서 가끔 시선이 느껴지길래 조용히 공부할 데 없나 찾아다니다가 알게 됐어요.”
그게 숨어 다닌 거 아닐까…….
준해의 정체를 밝혀내진 못했지만 ‘혹시?’ 하고 쳐다본 사람은 있었던 모양이다. 본인도 몇 번 질문 받은 적 있다고 했었으니.
조용해야 하는 도서관이라 아이돌 맞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기만 해서 더 신경 쓰였던 게 아닐까.
‘아니면 안경을 뚫고 잘생김을 알아봤거나.’
꼭 이목구비가 아니더라도 얼굴이 뽀얘서 한번 눈에 들어오면 계속 눈길이 가긴 해.
계속 생각해 왔지만 지금까지 잘도 안 들키고 학교를 다녀왔구나.
그의 대학 생활이 쉽지 않았을 듯해 조금 안타까웠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이라 내가 어찌해 줄 수 없고, 덕분에 우리는 도움을 받았으니 좋은 일이라고 치자.
오늘 촬영할 것은 타이틀곡 가사 내용을 표현한 드라마 파트였다.
뮤직비디오를 볼 사람들이 <쉰셋돌>의 시청자층과 많이 겹치다 보니 재미있을 만한 요소를 넣는 게 좋겠다고 해서 연기하는 장면을 추가했다.
제작진과 만호의 아이디어도 들어가긴 했지만 스토리 구성은 우리의 의견이 가장 컸다.
왜냐하면 타이틀곡을 우리가 만들었으니까.
‘딱 모노크롬이 하던 그 악동 느낌이야.’
역시 하던 사람이 잘한다고, 모노크롬은 자신들이 해 오던 악동을 아주 잘 구현해냈다. 다행히도 뉴마에서 자가복제하던 것보다 나은 퀄리티로.
우형 작곡, 준해 작사. 랩 가이드 해랑에 신셋의 래퍼인 제오까지 참여하여 완성한 이 곡.
에너지 넘치는 연하남이지만 사랑에는 서툴러 상대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바로 그 느낌.
‘컬러즈는 지긋지긋해하는 내용이지만 신셋 멤버들이 하니까 신선한 거겠지.’
컬러즈도 모노크롬이 아니라 다른 그룹이 소화하는 악동 컨셉은 흥미로워할 것이다. 이미 타이틀곡 투표에서도 관성에 이끌려 악동에 투표했던 그들이니까.
노래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 경우, 뮤직비디오에 상대 역할 배우가 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신인이라면 이 상대 배우로 유명한 사람을 섭외해서 홍보 소재로 사용하기도 하고.
신셋은 무려 연예대상을 멤버로 뒀기 때문에 굳이 그런 신인용 마케팅을 할 필요는 없었다.
다만 내용상 여자주인공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하긴 했는데…….
“아이고, 선배님. 안녕하세요-.”
“선배님이라니요? 저는 지금 신인 아이돌입니다.”
“그, 그래. 만호야. 잘 있었니? 고생이 많다.”
출연진들은 현장 집합이었기 때문에 우리와는 따로 도착했다.
만호에게 먼저 인사하며 나타난 이는 내겐 익숙한 얼굴이었다. 오자마자 만호와 재밌는 대화를 나누는 심상찮은 그녀.
“어? 누나!”
“재민! 너도 와 있었어?”
뮤직비디오 상대 역할로 섭외된 것은 재민의 예능 촬영 때 한 번 만났던, 코미디언 서다봄이었다.
재민이 그녀를 보고 폴짝폴짝 뛰며 반기자 다봄도 같이 뛰며 인사했다. <최고의 팀메이트> 촬영 후에도 친분을 잘 유지한 모양이다.
‘제작진이 알아서 구해오겠다고 해서 좀 걱정했는데 이번엔 제법 잘 섭외해왔네.’
멤버로 보컬만 잔뜩 뽑아왔던 전적이 있어서 불안했는데 이번엔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원래 신인 모델이나 연기자를 섭외하려 했었다는 이야기도 얼핏 들었다.
그런데 컨셉에 맞춰 연하남 느낌을 내야 하는 만큼, 확실히 연상으로 보이는 상대가 필요했다.
사람들이 나이를 대충 알 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런 고민을 거쳐 제작진이 부른 게 바로 다봄이었다.
방송에서 만나는 아이돌 동생들을 잘 챙겨준 덕분에 여러 아이돌 팬들에게 호감을 산 것도 한몫한 듯했다.
“으흐흥. 이 일 너무 만족스러워.”
……본인도 자신의 역할에 매우 만족하는 것 같고.
“누나가 하고 싶다고 해서 온 거예요?”
“아냐. 여자주인공에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PD님이 직접 뽑아주셨다고.”
신셋 멤버 다섯 명은 각자 한 배역씩 맡는 게 아니라 ‘주인공’ 한 명을 연기한다. 5인 1역이라고 해야 하나.
다봄은 그 주인공에게 서투른 애정 공세를 받는 역할이었다.
전에도 ‘아이돌 좋아하는 캐릭터’를 살려서 여러 아이돌의 사진으로 이상형 월드컵을 진행했던 그녀. 오늘은 신인들과 직접 같이 연기하게 되어서 즐겁게 임하는 모습이었다.
재민과 다봄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데 옆에서 만호가 둘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아이돌은 어떻게 행동하나 관찰하는 건지, 그가 모노크롬이나 신셋 멤버들을 이렇게 지켜보는 모습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
“와~, 누나~.”
“선배님. 체통을 지키셔야죠!”
만호가 재민을 따라 하면서 발을 동동거리자, 다봄이 떫은 감이라도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일부러 그런 반응을 끌어내려고 한 행동인 걸 알아서 기대에 부응해 준 모양인데, 주변 스태프들은 다봄과 달리 훈훈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스타일링 덕분인지 평소보다 좀 귀여운 느낌이긴 해.’
귀여움에 나이 제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비주얼이 제각각이면 안 되니까 스타일리스트도 통일할 필요가 있었는데, 모노크롬과 함께 일하는 스타일리스트 회사가 신셋을 맡기로 했다.
다른 멤버들보다 키가 작은 만호에게 굽이 두꺼운 신발을 신겨 키를 최대한 맞춰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나는 차라리 작고 귀여운 스타일로 갈 것을 제안했다.
‘전에 무릎이 쑤신다고 했으니까 스카이라인 맞추자고 불편한 신발을 신기면 안 좋겠지. 무대도 해야 하는데.’
그가 실제 아이돌이 아니다 보니 신경 쓸 요소가 더 많았다.
스타일리스트들은 여러 번의 회의를 거쳐 그가 원하는 젊은이 느낌을 내려고 최대한 노력했다. 오히려 키가 작아서 더 귀여운 스타일을 내기 좋았다. 옷에 파묻힌 느낌이 하나의 포인트였다.
오늘은 만호 외에도, 스타일링이 특히 눈에 띄는 신셋 멤버가 있었다.
“이런 스타일도 잘 어울리네.”
평소와 다른 자신의 모습을 어색해하며 다가오는 이담을 보고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